한국의 대다수 교인은 성경이 말하는 ‘예언’을 두고 미래에 벌어질 일을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예언자를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 중 가장 많이 사용된 ‘나비(נָבִיא)’는 ‘앞일을 내 다 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대변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성경의 예언: 하나님의 뜻 비추어서 지금의 상황을 판단, 나아가야 할 바를 말한 것신학자들은 성경의 예언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받은 사람들이 그 뜻에 비추어서 지금의 상황을 판단하고, 나아가야 할 바를 말한 것이라 이해했다. 이처럼 성경에서 예언자들은 외
지금까지 3주에 걸쳐 요한계시록의 서설에 관해 이야기했다. 오늘은 이 서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계시록 본문(계1:1~8)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다. 서설을 잘 읽어봤다면 오늘 본문은 쉽게 이해될 것이다. 계시의 목적?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종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천사를 보내셔서, 자기의 종 요한에게 이것을 알려 주셨습니다(1절).”지금까지 계시는 먼 미래의 일, 특히 종말
요한계시록은 계시와 예언을 담은 편지다. 계시(啓示)는 닫혔던 것을 열어서 보여준다는 공간적 이미지를 담고 있고, 묵시(默示)는 침묵되었던 것을 들려준다는 청각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요한계시록이 전하는 예수의 계시는 미래가 아닌 현재!요한계시록이 전하는 예수의 계시는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관심이 있는데, 왜 이 시대에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베일을 벗겨 이 시대 문제의 원인을 알려주겠다는 의미였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당시 상황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신학적 해석을 하고, 이를 동일한 역사적 패턴이 반복
지난 시간에는 엄청난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 기록된 일종의 문학양식이 싹 텄는데 이것을 묵시문학이라고 부르고, 이러한 묵시문학은 요한계시록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했다.묵시문학의 특징묵시문학의 특징 중 하나는 고대의 유명한 인물들의 이름을 빌어서 쓴다는 것이다. 에녹서도 그 중 하나인데, 묵시문학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에녹서는 인류의 죄악의 시작에 대해 창세기 6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번성하며 아름다운 딸들이 태어났다. 하늘의 자녀인 천사들이
요한계시록 해석의 역사는 곧 오독과 남용의 역사라고 할 만큼, 요한계시록은 잘못 이해되어 왔다. 한국 개신교에서 요한계시록은 ‘요한이 밧모섬에서 그리스도로부터 미래의 종말에 대한 모든 지식을 받아 환상과 암호의 언어로 바꾸어 전달한 문서’로 이해된다. 이런 이해를 두고 ‘미래주의적 해석’이라고 하는데, 이는 ‘666’, ‘14만 4천’, ‘바코드’, ‘베리칩’ 등 요한계시록에 대해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완전히 잘못된 이해이다.성경은 벌어진 사건에 대하여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여기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
지금까지 약 40강에 걸쳐 바울에 대해 알아봤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너무 세부적인 이야기에 집중하다 보니, 바울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이 큰 틀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정리해 보려고 한다.바울,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차별 없애려우선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을 없애려고 했다. 유대 사회에서는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형성하여 이방인들을 차별할 때 바울은 이방인들의 편에 섰다. 또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으로 인해 로마 교회의 주도권을 잡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
베드로후서 3:16에는 ‘바울의 편지 중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어서 잘못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바울의 편지를 해석하며 겪는 어려움은 우리만의 어려움이 아니었던 것.바울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바울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바울은 1)디아스포라 유대인이면서 2)로마 시민이기도 했고, 교회를 세우고 이끈 3)목회자이면서 신학자였지만 신비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4)신비주의자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가 쓴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5)편지를 받는 교회의 구체적인 상황을 이해해야 하고, 바울 신앙의 역동성이자 바
믿음 특강을 하기 전, 우리는 갈라디아서 이야기를 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이신칭의론(以信稱義論), 즉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갈3:11)는 내용이 담긴 서신이다. 이 내용은 훗날 기독교의 일반적인 교리로 굳어진다. 하지만 교리 이전에 바울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할례 등의 율법준수를 강요하여 그들을 시험에 들게 한, 갈라디아 교회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비판이었다(갈5:1~12).그런데 로마서에서 바울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갈라디아서에서와는 다른 태도를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대로 하나님을 믿어왔다. 누가 믿는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나’가 그렇게 믿어왔다. 그러나 마가복음서 8:27~34을 살펴보자. 베드로는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었고, 자신은 죽게 될 것이라는 예수의 말에 베드로는 예수의 멱살까지 잡고 항의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 믿는 베드로를 향해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말했다.신앙인에게 영적 성숙이란?신앙인에게 영적 성숙이란 자기 욕망을 따르는 사람에서 하나님 뜻을 따르는 사람으로 되어
왜 믿는가?-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인식오늘은 ‘왜 믿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믿음이 무엇인가?’, ‘무엇을 믿는가?’라는 물음 이전에 ‘우리는 왜 믿는가?’라는 물음은 가장 근원적인 질문이다. 이것을 ‘근거 물음’이라고 한다.복습을 하자면 믿음이란 앎과 모름이 함께 관여하는 것이다. 앎의 영역에서는 지적인 동의와 감정적 신뢰 그리고 이 둘이 함께 어우러졌을 때 믿는 대상에 대한 헌신이 동반된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신비 즉 모름의 영역이 존재한다. 이렇게 앎의 영역과 모름의 영역이 공존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
믿는다는 행위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가?지난주부터 그리스도교 신앙 특강이라는 제목으로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믿음 또한 행위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행위와 대결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러면 믿는다는 행위는 어떤 요소가 필요한가? 믿음에는 앎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모름의 영역도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던지는 모험도 필요하다. 그래서 믿음에는 앎과 모험 둘 다 필요하다. 균형 잡힌 믿음이 되려면 참된 지식이 필요하고, 감정적 신뢰가 필요하고, 행동으로의 헌신이 필요하다. 결국 지정의가 균형 잡혀 있어야 온전한 믿음
믿음과 관련 가장 잘못된 관행은 ‘묻지 않게 하는 것’전 세계 그리스도인과 한국의 교인은 각기 다양한 이유로 교회에 나갈 것이다. 모태 신앙인 경우가 있고 친구 따라갔다 결신한 경우도 있고 어떤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교회에 발 들인 예도 있겠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 믿음과 관련 가장 잘못된 관행은 ‘묻지 않게 하는 것’이다. 곧 반지성주의이다.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 교리를 공부하다 의구심이 들면 묻지 않고 덮어놓고 그냥 믿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안 묻고(의심 없이) 그냥 믿는 게 좋은 것인 양 생각한 예도 많았다. 그러나 이
갈라디아서 저술 배경갈라디아는 한 도시가 아니라, 지금의 터키 중앙부, 상당히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세운 여러 교회의 교인들에게 쓴 편지이다. 갈라디아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갈 2:16)를 구체적으로 다룬 성서인데, 바울의 이신칭의는 당시 갈라디아 교회의 상황과 사회적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읽어야 오해하지 않고 읽을 수 있다.바울은 갈라디아 지방 선교를 위해 여러 교회를 세우고 나서 다른 지역으로 선교를 떠났다가 갈라디아 교회의 소식을 듣게 된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코로나 이후 재정난이 커지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목회자 이중직에 대한 찬반양론이 분분하다. 이중직 목회는 목회자도 일을 하기 때문에 성도들의 삶에 대해 더욱 공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같은 이유로 목회에 전념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최근에는 교회에서 목회자에게 사도바울과 같은 자비량 선교를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의 자비량 선교의 진의를 알아보고, 오늘날 목회자 이중직의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바울의 이중직을 못 마땅하게 여긴 고린도 교회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자유
바울에 대한 오해 - 바울은 금욕주의자도, 독신주의자도 아니다고린도전서 7장 1절, “남자는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금욕주의자나 독신주의자로 오해받아왔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잘 살펴보면 이 말은 바울의 말이 아니라 편지를 적어 보낸 사람들의 말을 바울이 인용한 말이다. ‘여러분이 적어 보낸 문제 를 두고 말하겠다’라고 한 것.고린도교회에는 파당 문제, 음행 문제, 세상 법정에 고소한 문제 등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바울에게는 이런 문제를 숨기고 질문할 내용
통상 교회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 뿌리에는 재정, 성(性) 비위가 주류를 이룬다. 맹자가 고자(鼓子)와 인간의 본성을 놓고 대화할 때 장면이 있는데 생지위성(生之謂性)과 식색성야(食色性也)라는 표현을 통해서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능이 성임을 말한다.계모와 통정하는게 스스럼 없는 고린도교인들고린도전서 5장 1절에서 바울은 “여러분 가운데 음행이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자기 아버지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일까지 있다고 하니”라고 했다. 부연이 필요하다. 여기서 ‘아버지의 아내’는 어머니가 아
어느 교회나 겪을 수 있는 이야기바울이 건네는 인사말(고전1:1~3)을 통해서 이 편지가 고린도교회에만 적용되는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린도교회가 겪은 갈등은 어느 교회에나 있을 법한 일이고, 이런 갈등을 겪는 어느 교회나 이 편지를 통해 갈등을 해결할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고린도 교인들이 지식과 언변이 늘면서 모든 면에서 풍족하게 된 것은 좋은 현상이었지만, 문제는 그만큼 분쟁도 심해졌다는 것이었다(고전1:4~6).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당파가 생긴 것을 지적하는데,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베드로)파, 그리스도파를 언급하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선생이 가장 먼저 쓴 편지로 신약성서에서도 가장 연대(AD 50년대 초로 추정)가 앞선 책이다. 이번 주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살펴보며 당시 교회의 상황과 환란에 대해, 그리고 예수님에 재림에 대한 소망에 대해 살펴보겠다.바울의 삼중신학데살로니가전서 1장 1~10절을 살펴보면 하나님, 예수님, 교회가 등장한다. 신학자 김영석은 바울의 진정서신 7권을 꿰뚫고 있는 이 3가지를 바울의 삼중신학으로 표현했다.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의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율법의 계약을 맺은 유대인만을 택했다면, 이제
빌립보라는 도시소아시아 지역은 바울에게 비교적 익숙한 장소였다면 빌립보가 있는 마케도니아 지역은 바울에게 낯선 장소였다. 게다가 빌립보는 ‘작은 로마’라고 불릴 만큼 로마의 축소판 도시였기 때문에 빌립보로 가는 바울의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다. 새로운 도시에 도착한 바울은 가장 먼저 유대인들이 모여 있는 회당으로 가서 정보를 모으고 그 지역을 탐색했다. 그러나 빌립보에 도착한 바울은 회당이 아니라 ‘유대 사람이 기도하는 처소가 있을 만한 곳’(행16:13)을 찾아간다. 이를 통해 빌립보에는 유대인들의 회당이 없었고, 그만큼 소수의 유
빌립보서는 바울이 직접 기록했다고 여기는 7개의 진정 서신 중 로마서와 함께 가장 후기의 서신으로 간주한다. 그만큼 원숙한 말년의 바울을 볼 수 있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이 서신은 바울과 빌립보 교회 사이의 사적인 이야기가 있는 담겨 있는 편지일 뿐이지만, 편지 내용 가운데 바울의 신학적 사유나 목회 철학이 담겨 있어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오늘은 빌립보서를 통해 바울서신을 읽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겠다.낭독될 것을 전제로 쓴 바울의 서신서네로황제의 스승이기도 했던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청년 루킬리우스에게 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