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뚫고 병자를’?

사실은 독서 방법론 중에 ‘따지면서 읽기’라는게 있다. 마가복음 2장 1~12절에서 그래보자. 왜 자기 것도 아닌데 남의 집에 구멍을 내는가? 그런데 마가복음 저자는 이 집이 망가지는 것에 관심이 없다. 이 집은 1세기에 이 가버나움 동네의 집인데 그리 안 크다. 특히 그 지역은 나무 길이가 5m 넘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 길이만큼 집을 짓기 어렵다. 게다가 나무에다 잔가지 올려놓고 그다음에 거적 같은 거 덮어놓았다. 그래서 천장 뜯어낸다는 함은 거적을 치우는 것일 텐데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환자를 들고 자기 앞에 들것을 내린 믿음에 대해 치하하셨다. 이 사람의 병명은 무엇인가? 중풍이다. 오늘날 뇌졸중이라 볼 수 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중병이다.

“중풍병자와 베데스다 못가 환자 동일인”

예수의 역사성을 따지는 데 온 힘을 쏟은 존 도미니크 크로산이라는 학자는 마가복음의 ‘지붕 뚫은’ 중풍병자와 요한복음에 나오는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와 같다고 본다. 그렇게 본 이유는 둘 다 만성적인 질병에 의해서 혼자 몸을 못 가누고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 그렇다. 그렇다면 이 중풍병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상당수 학자는 이 사람이 이렇게 옴짝달싹 못 하고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린 이유로 과중한 세금에서 찾는다. 당시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다 보니 그것을 갚다 갚다 못해 몸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됐다. 그러다가 병을 얻으면 고칠 길이 없다. 혈우병에 걸린 여인도 병을 고치려고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면서 가산을 탕진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사람도 왜 아팠냐 하면 가산을 다 탕진하면서였다. 악순환이 계속된 인생이었다. 급전이 필요하면 사채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갚지 못해 사람들이 나중에 우울증이 깊어지면 실제로 뇌졸중 같은 병에 걸리지 않더라도 무기력해 진다. 엄청난 빚을 지고 갚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과중한 세금에 극심한 빈곤이 원인”

중풍은 후천적인 병이다. 저소득층에서 중풍병자가 엄청 많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왔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고쳐줬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4명의 친구는 동일 업종에 종사하던 사람들일지 모른다. 마가복음 1장부터 2장 읽기 전까지 우리에rp 세 명이 나타났다. 하나는 회당에서 더러운 영 들린 사람 그 다음 가정집에서 시몬의 장모 그리고 피부병 환자이다. 영 들린 사람이나 시몬의 장모나 자세히 보면 귀신을 쫓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피부병 환자 고친 것은 정말 치유이다.

사회 구조적 편견으로 격리된 사람들 

치유의 대상은 사회 구조적인 편견으로 인해 격리된 사람으로 보면 옳다. 사회적 경제적 취약계층으로서 겪는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고치며 “이 사람의 죄가 용서받았다”라고 말한다. 당시엔 몸져누워만 있어도 죄의 결과라고 본 것인데 예수님은 이것을 떨쳐냈다고 선언한 것이다. 시편 38편에 보면 “주님께서 노하심으로 나의 살에는 성한 곳이 없습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나의 뼈에도 성한 데가 없습니다. 내 죄의 벌이 나를 짓 누르니 이 무거운 짐을 내가 더는 견딜 수 없습니다. 내 몸의 상처가 거기 맞아져 악취를 내니 이 모두가 나의 어리석음 때입니다”라고 돼 있다. 죄하고 질병을 연결 짓는 유대인 사유가 팽배해 있는데 예수님은 이걸 타파하려고 했다.

또 한 번 미움 사는 예수

이런 예수님을 성전 제사장이 곱게 볼 리 없었다. 사실 죄를 사해주시는 건 하나님이지만 그것에 대한 선포는 제사장이 하는건데 이걸 예수가 하고 있잖나. 마가복음의 율법학자들이 속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악한 고리를 어떻게든 끊고 싶었다. 죄의 사함을 제사장만 선포해야 한다는 도식은 (종교) 권력을 가진 자가 고통받는 자를 또 한 번 착취하는 일을 만들어 낸다. 어떤 사람이 몸이 다 나았는데 불편한 관계의 제사장이 선포하지 않으면 여전히 죄가 남아있는 상태가 된다. 나아가 이걸 고리로 재물을 부정하게 취득 할 수 있다. 

병은 죄에서 기원’이라는 통념 깼던 예수

결국 예수님이 환자를 치유하는 거는 오늘날 의사의 의료행위와 다르다. 이걸 넘어 ‘죄 때문에 벌 받았다’라는 사회적 편견도 고친 것이다. 10절을 읽자.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진짜 무서운 말이다. 종교권력자에 대한 선전 포고이다. 예수님은 이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어려운 삶 속에서 병을 얻고 일어나지 못하는 저사람을 돌보지도 않고 죄인이라고 낙인찍으면서 내버려 두는 것이 옳으냐’라는 말을.

왜 ‘제사장에게 보여라’가 빠졌을까?

친구 네 사람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예수는 병자가 아니라 사실 이 네 친구의 믿음을 봤다. 친구들은 병자인 벗의 상태를 보고 마음이 아팠을 것이고 빨리 고치는 게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예수에게 찾아왔을 것이다. 예수는 이 사람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집으로 가라”고 하니까 곧바로 일어나 나갔다. 이로써 그는 병이 낫고 아울러 죄 용서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제사장에게 가서 뭐 네 몸을 보이라’는 말은 없다. 예수님은 이제 부터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왜 이랬을까? 마가복음은 3장 6절까지 5개의 논쟁 이야기가 나온다. 예수님이 세리레위 집에서 먹고 간 것을 두고 ‘죄인과 식사를 같이 한다’라는 논란이 빚어졌다. 이후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예수 제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 점, 안식일에 제자들이 걸어가다가 싹을 훑어 까불러 먹어 안식일 법 위반 논란 등이 일으켰다. 1장에서는 예수님도 기존 체계의 권위를 인정해 주는 것처럼 보였다가 2장부터 태도를 바꾼 것이다. 보다 변혁적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국공합작’ 예수 죽이기 모의

한편 3장은 적대적인 자들이 예수에 대한 죽음을 모의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시 안식일에 회당을 찾았는데 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만났다. 예수는 그를 고쳤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한 것이다. 바리새인이야 민족주의적 정서가 있지만, 헤롯 당원은 로마의 친 로마적이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뜻 모으는 데는 한 패가 됐다. 이 연결고리가 가능한 것은 둘 다 기득권을 지향하기 때문 아닐까?

안식일 법에 따르면 고칠 이유 없는 손 오그라든 사람

안식일 법에 따르면 당장 목숨이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 아니라면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을 고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전 주변부에서 위축된 사람을 가운데로 불러 세워놓았다. 이때 예수님의 상태를 두고 성경은 ‘노하셔서’라고 말한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율법주의라는 완악한 마음을 질타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게 좋으냐 악한 일 하는 게 옳으냐, 목숨을 구 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여기 목숨의 원문은 생명으로 표기 된다. 그러니까 선한 일은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악한 일은 죽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한테 손을 내밀어라 밀어라. 이 장면을 여러분 생각해 보시라고 이렇게 쫙 모여 있는데 저 구석에 있는 애를 나오게 해서 여기 앞에 세우고 손을 내밀어라. 손을 쫙 내미는 순간 어떻게 돼? 손이 오그라든 게 펴졌다. 손이 오그라들었다는 사람의 상징은 무엇이었을까? 마가는 분명 무엇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사회구조적 폭력이 만연한 가운데 신분제 질서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획득하지 못한, 무시당하고 차별당했던 그래서 위축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오그라든 삶을 살았던 주변부 사람을 예수님은 중앙에 불러왔고 그 중앙에서 과감하게 손을 내밀어서 당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줬다. 그런데 그 자리가 또 안식일과 회당이었다. 손을 많이 쓰고 무거운 걸 많이 드는 사람들은 손의 인대가 늘어나거나 저려서 잘피지 못한다. 그런 증상은 현대에도 많다. 실제로 원문에는 ‘손이 오그라든다’라는 말이 ‘풀이 시들다’, ‘손이 시들다’ 즉 힘이 없어진다는 말과 같다.

손 오그라든 사람은 누구를 상징하나?

우리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다시 보면서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병이 드는가 또 어떻게 아픈가 그리고 그건 단순히 의료적으로 해결하면 되는가 아니면 거기에 종교 문화적 또는 사회적 편견이 개입된 몸은 물론 마음의 병이기도 한 것은 아닌가 살펴야 한다. 이건 또한 성서를 관통하는 주제일 것이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그 당시로 보자면 별 볼 일 없는 사람들하고만 이렇게 어울리셨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기왕이면 주변에 고관대작도 있고 지식인도 있고 그 나름대로 그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셀럽을 많이 두면 하나님 나라 운동이 좀 더 탄력받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이렇게 다 이렇게 우울하고 참 변변치 못한 인생들과 어울렸을까 하는 질문도 가능할 것 같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에 그리스도교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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