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혈하는 여자, 예수 옷 손대다

마가복음 5장 21~43절에는 혈루증 앓는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재산을 다 잃을 정도로 자기 병을 고치려고 애썼다. 여러 의사에게 자기 상태를 알렸지만 보였지만 고생만 많이 하고 재산을 소진하기만 했다. 상태는 더 악화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희망을 붙잡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다. 환자가 다가와 감히 예수님 옷에 손댄 경우는 이게 최초이다.  혈루증은 피가 계속 흐르는, 즉 하혈하는 상태를 말한다. 월경 외에 무엇이 원인인지 알기 어렵지만 끊이지 않고 피가 흐르는 것이다. 사실 고대 사회에서는 오늘날처럼 수술할 수도 없었다. 외과적 수술은 근대 사회의 발명품이다. 하여간 이건 대단히 심각한 병이다. 레위기 15장은 생리 외에 하혈하는 여인을 불결하다고 낙인을 찍는다. 게다가 그 여성이 눕는 잠자리는 물론 앉는 자리까지 부정하다고 했다. 그냥 마주치지조차 말라고 하는 것이다. 사실 여성 중에는 피로해서 하혈하는 때도 있다. 그렇다고 부정하다고 할 것까지야. 결국 가부장 문화가 문제이고 성경조차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실 성경 본문을 보면 이 여성이 재산이 있었을 수 있다. 그런데 병 고치려다가 재산을 탕진한 듯 보인다. 그런데 마침 예수의 소문을 들었고 무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로 끼어들어 와 예수 옷에 손을 대었다. 이 행위는 여자가 예수님은 물론 무리에게 부정 탄 몸을 접촉했을 것이고 병을 전염시키려 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범죄로 규정할 여지도 있었다. 

예수 “누가 내 몸에 손댔느냐”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댔느냐”라고 묻고 있다. 범죄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여자는 두려웠다. 어찌 보면 허락 없이 예수님의 능력을 구한 것 아닌가? 막 떨면서 ‘이제 난 죽었구나’라고 엎드렸다. 그런데 예수님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신다. “안심하고 가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 건강하라”라고 덧붙이신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딸’이라고 불렀다. 이건 유일한 사례이다. 이건 자신이 아닌 이스라엘의 딸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는 철저히 소외됐다. 

회당장 야이로 딸 위독한 상황에서

그런데 이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가 열두 살 딸이 죽어가고 있다며 도와달라고 간청하는 것과 예수님이 가서 고치신 사건 사이에 있다. 마가복음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문학 기법의 하나가 흔히 ‘샌드위치 구조’라고 하는 ‘인클루시오’(inclusio) 기법이다. 무화과나무 이야기 사이에 성전 정화 사건을 삽입하는 것도 한 예이다. 당시 한 마을은 회당을 중심으로 정치 종교 교육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회당장은 동네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신분이 낮은 목수 아들한테까지 가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마태복음에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야이로의 딸은 죽었고, 예수님은 그를 살린 것으로 나온다.)  야이로와 혈루증 앓는 여인을 대조해 보자. 한쪽은 유력한 사회적 명망가로 능력이 있고 학식 있고 존경받는 사람이다. 한쪽은 이름 없고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사람이다. 게다가 부정 탄 존재면서 예수 옷을 만지는 바람에, 야이로의 딸 고치는 게 지체됐다. 35절을 보니 죽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원망했을 것이다. 

열두 살 vs 12년 투병

사실 12살 생일은 이스라엘에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는 일종의 ‘성인식’과 같다. 그런데 이 나이에 생산이 끊어지는 죽음이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혈루증 앓는 여자는 12년 동안 아기 생산 자체를 못 한다고 했다. 십계명 중 십계명은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라고 한다. (여성은 당시 재물이었다. 재물로써 의미가 있는 것은 아기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게 안 되면 효용성 없는 인간으로 천대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나가 슬퍼했고 이스마엘의 어미 하갈이 득의양양했다) 그런데 12세의 야이로 딸과 12년 혈루증 앓던 여인이 치유됐다.
앞서 바다 건너 거라사 지방에서 벌어진 일을 복기해 보자. 그곳에서 예수님은 군대라는 이름의 악령을 쫓아내셨다. 구체적 언급은 없었지만, 로마의 주둔군이 있는 그곳에서는 여성들이 성적 폭력에 상시로 시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데카폴리스에서는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가련한 여성들을 살렸다. 이렇게 마가는 여성들을 전면에 등장시킨다. 

여성 전면에 배치한 마가

고대 사회에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그들 아닌가? 로마 황제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아내를 통해서만이 아니고 대리모를 두고 낳기도 한다. 그래서 출산했을 때 그가 사내아이면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라고 외쳤다. 유앙겔리온의 뜻은 복음이다. 그런데 딸을 낳으면 산모와 함께 버린다. 고대 가부장적 문화가 곧 로마의 것이었다. 이제 교회 안에서 율법의 이름으로 억압당했던 여성이 예수님을 통해 해방됐다. 이게 진정한 유앙겔리온 아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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