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 치유 가능한 예수님

마태복음 8장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친 이야기를 보면 “우리 집에 오시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된다”라는 믿음의 언어들이 나온다. 당연히 종은 치유된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태도는 사뭇 다르다. 미가복음서 7장 24~30절에 나오는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를 보자.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소문을 온 팔레스타인에 퍼진 상황에서 그 영험한 분이 자기 동네에 온다고 하니까 수로보니게 여자는 찾아가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거절했다. 

이방 여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절함

수로보니게 여인은 그리스 출신이다. 즉 유대인이 아니다. 그런데 앞서 거라사, 데가볼리 등 이방 지역에서도 기적을 베푼 예수님인데 왜 여기서는 이러는가, 많이 수상하고 의아하다. 예수님의 지금 모습은 특권적 지위의 유대인만 차별 대우하는 것이다.
이곳은 지금의 레바논이다. 갈릴리로부터 27km가 떨어져 있다. 차로는 금방이나 걸어서는 상당한 거리다. 인간의 몸을 입은 예수님으로서는 걷기만 해도 피로가 따르는 여정인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특히 환자들로 한 발짝도 못 움직이게 했다. 제발 옷에 손대게만 해달라고 한 것이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옷 만지고 치유한 사건 이후로 더욱 그러했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스트레스를 받았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런 데다 이 본문 앞부분을 보면 바리새파 사람들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 몇 사람에게 ”왜 너희는 손을 안 씻느냐“ ”너희가 뭔데 유대 전통을 따르지 않느냐“라고 공격한다. 그러나 얼마나 힘든가. 게다가 환자를 고치는데 그 과정에 정결법을 무시했다며 고소당할 상황까지 몰렸다. 그야말로 녹다운될 상황이었다. 

스트레스 받으신 상황에서 예수님

예수님은 그래서 피정하려 아무도 모르는 27km 떨어진 두로까지 피신했다. 그런데 여기를 수로보니게 여인이 용케 찾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확 짜증이 났을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은 인성마저 성인이라 절대로 화를 내시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한 인간이었다. 십자가상에서는 고통을 호소했던 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공생애 시작 이후 내내 고도의 스트레스와 피로를 감당해야 했고, 이 와중에 힘없는 한 여인에게 ‘막말’을 했다면 예수님답지 않으신 것인가. 혹시 그가 회당장같은 직함 또 유대인이라는 출신이 아니라서 이 이방 여인에게 함부로 하는 것일까? 

그 막말은 실은 속담

그러나 당시에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개나 다른 가축보다 앞서서 자녀들을 먹여야 한다’라는 속담이 있었음을 알아야 한다. 고대에는 실로 먹을 것이 없었다. 절대빈곤 상황이라 음식이 귀한데 이를 자녀보다 개나 다른 가축에게 먹이면 안 된다. 하지만 이 속담이 딸이 아파 예수님한테까지 와서 무릎을 꿇은 여성에게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그다음에 인간적 모욕을 느끼는 맥락으로 이해될 지점에서 나왔을까? 보통의 경우라면 욕을 한 바가지 해주고 등 돌릴 것이다.
이곳에서 이집트는 기원전 1300년에 이곳을 점령하려다 실패했다. 게다가 바벨론의 제국도 이곳을 함락하기 위해 13일간 전투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래 섬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알렉산더 대왕은 6개월 동안 땅을 바다에다가 흙을 메워서 이곳까지 육지로 만들고는 마침내 점령했다. 그 뒤 이 땅은 팔자가 바뀌었고 고대의 가장 위대한 문명 도시가 됐다. 이곳 사람들은 유대인을 잡아다가 스페인에 팔아넘기는 짓도 했다. 그래서 두로는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었고, 두로 사람들은 유대인을 하류 인생으로 취급했다.

귀족이었던 여인, 예수님 감동시키다

이런 가운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아는 것도 돈도 많은 일종의 귀족이었다. 그의 눈에 목수의 아들 예수님은 어떻게 비쳤겠나? 오늘 본문의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 발언은 여인에게 믿음이 있는지, 아니면 단지 나의 초능력만 필요로 하는지 묻고자 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여인의 답이 어떠한가? “저는 이방 여인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받기에 합당치 못한 존재입니다. 저와 우리 민족은 대대로 아스다롯을 섬겼던 개 같은 여인입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말에 예수님도 감동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의 복음은 이방에까지 널리 퍼졌다. 아울러 마가공동체도 자기만 옳다고 하는 사람들만의 구성체가 아니라 못난 사람 또는 소외된 사람, 길 밖에 있었던 사람, 여성, 그다음 악마화된 사람들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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