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원수 사랑’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이유는 이 말씀 때문일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 이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구약시대 말씀을 거론하면서 시작한다. (놀랍게 원수 사랑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마가복음 요한복음에 안 나온다. 누가복음에는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라는 대목은 있어도 ‘원수 사랑’은 없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돼 있고, 시대적 한계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부분은 오늘날 재해석이 필요하다. 예컨대 바울 사도가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라고 했다고 오늘에도 적용할 수 있겠나? 예수님은 구약에 있는 율법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게 아니고 오늘날에 맞게 재해석했다. 

동태 복수법의 한계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는 평화가 올까? 한쪽이 한 대 때리면 다른 쪽은 두세 대 때린다. 이것을 동태 복수법이라고 한다. 같은 형태로 복수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한 대 때린 것에 대해서 한 대만 보복하는 것은 당시 정의였다. 구약에 있는 이 율법이 상당 부분은 메소포타미아에 있었던 함무라비 법정에서 가져온 것이다. 
동태 복수법은 오래된 법이지만 훌륭하다. 눈은 눈으로 안 갚는 길이 없지 않았다. 돈으로 배상하는 것이다. 돈이 많으면 그걸로 해결하면 된다. 야구 배트 1대당 100만 원씩 물어주던 어떤 재벌 이야기가 생각난다. 결국 권력 있고 돈 있는 자가 함부로 못 하게 왜냐하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마음대로 때려도 된다. 그러나 동태 복수법은 이걸 부정하는 것이다. 폭력이 더 갈수록 심화하고 극대화하는 것을 막지 않았는가? 

폭력의 악순환 부르는 동태 복수

그러나 폭력은 이렇게 악순환을 부른다. 한 대 때리면 반대편에서 또 한 대를 때린다는 것이 그렇다. 이게 정의일까? 사랑을 말하는 그리스도교가 정의라는 이름으로 해야 하는 방식이 피해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가해자를 응징하는 것이 옳은가? 구약시대만이 아니라 실제 인류의 전쟁 역사를 보면 작은 꼬투리를 잡아 시작한 일이 나중에 민족 간 다툼 동족 간 전쟁으로 번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이 정의일 수 없다.

“하나님 자녀의 자존감 소유하라”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딸로 귀족적 자존감 및 명예를 소유하라”라고 말한다. 아무리 율법이 우선이라도 사회적 지위가 낮아도 피지배자 신분의 식민지 백성이어도 말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폭력으로 지배하는 사람들의 양심을 건드린다. 그래서 폭력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 ‘원수 사랑’을 이야기한 것이다. 
남의 지배를 받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노예근성이 들 수 있다. 유다 로마 전쟁을 겪은 뒤의 마태 공동체는 이미 이웃이 원수가 된 경우이다. 같은 동네 사람 한 명은 독립군에 있고, 로마에 의해 징발당한 또 다른 한 명은 로마군에 있었다. 결국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마태 공동체의 고민이 이러했다. 그래서 형제를 셀 수 없이 많이 용서하는 것, 그래야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직감하게 됐다.

로마 전쟁 이후 갈갈이 찢긴 유대인

마태 공동체가 세워갈 당시 유대교는 어땠을까? 유일하게 남은 건 바리새파이다. 그렇다면 마태 공동체는 이 바리새파보다 훨씬 더 훌륭한 도덕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율법 그 이상으로. 그렇다면 ‘원수 사랑’이 가장 독하고 강하다. 바리새파나 세리나 이방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은 의와 윤리를 추구해 가는 마태 공동체에 ‘원수 사랑’은 가장 긍지 넘치는 해법이다.
영화 ‘밀양’에서 봤듯 피해자가 쌓인 한을 풀지 않은 상황에서 제삼자가 특히 기독교가 용서라는 말을 쓸 때는 그건 가해자만을 옹호하는 것이 되기 쉽다. 그러니까 용서를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기독교는 한을 치유하는 종교 돼야

현대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빠져 있는 오류는 뭐든지 개인 윤리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나오는 윤리는 함께 공동체를 세워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예컨대 ‘이혼하지 말라’라는 가르침은 개인 윤리가 아닌 공동체를 세워가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가정폭력이 심한 가정은 이혼하는 게 옳다. 공동체 윤리를 개인 윤리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서남동 선생 등이 말했듯 기독교는 한(恨)을 치유하는 사자가 돼야지 함부로 가해자에게 면죄부 주는 종교여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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