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탕자의 비유’

누가복음 15장은 ‘탕자의 비유’가 담겨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 작은아들은 자기 몫의 유산을 미리 받고 나가 온갖 타락한 일에 허비하고 거지가 됐다. 그리고 돌아왔다. 아버지는 고생한 그를 가엾게 여기며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장남이 화가 났다. 집에 남아 성실히 일한 자신은 홀대받는다고 판단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했다. 

작은 아들의 패륜

이 비유를 예수님이 옛날 얘기처럼 펼친다. 이야기 속 작은아들은 아버지가 죽으면 자기에게 돌아올 몫을 앞당겨 내게 달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이때 유대인 청중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작은아들을 성토했다. 당시에 아버지가 증여할 뜻을 밝히기 전에 자녀가 먼저 재산을 달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말은 그래서 ‘아버지 빨리 돌아가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나 진배 없다. 천주교와 함께 보는 공동 번역 집회서 33장에는 “너의 재산을 아무에게도 주지 말아라. 나중에 그것이 아쉬워 후회할 것” “네 수명이 다하여 죽을 때가 오거든 내 재산을 나눠줘라”라고 했다. 신명기 21장도 보면 사랑을 많이 받는 아내가 둘째 아들을 낳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는 첫째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맏아들 몫의 재산은 누구에게 줘야 할까? 맏아들이다. 아내가 사랑받든 받지 않든 말이다. 아들이 둘이면 이걸 3으로 나눠서 둘째는 3분의 1을 주고, 첫째는 나머지 2를 주는 것이다. 
작은아들은 1/3 몫을 가져간 상황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떠나 자기 혼자 살아보겠다고 했는데, 마지막에는 탕진했고 빈궁한 처지에 놓이자, 마을 주민에게 목숨을 의탁했다. 그리고 마침내 돼지를 치게 하였다. 유대인은 또 욕한다. 돼지는 불경한 동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방 사람들이 살던 지역으로 간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주변 나라에는 약 400만 명 정도의 디아스포라가 살고 있었다. BC 587년에 바벨론의 침공으로 남유다가 완전히 망한 뒤로 유대인은 어느 곳이든 자기네 공동체를 만들었고, 유대인이 오면 극진하게 환대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볼 시스템을 다 만들어 놨다. 그런데 유대인인 둘째는 여기에도 안 가는 것이다. 이유는 유대인이 싫은 것이다. 즉 자기의 민족적 정체성도 싫은 것이다. 그래서 돼지도 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을 듣던 유대인 청중은 능욕감까지 느낀다.

자기 민족까지 배신한 작은 아들

그런데 작은아들이 제정신이 든다. 이스라엘 속담에 ‘돼지 쥐엄 열매 즉 돼지가 먹는 가시가 돋친 콩 꼬투리를 먹으면 정신 차린다’라고 돼 있다. 진짜 회개할 때가 된 것이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서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다고 회개해야겠다’라고 마음먹는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이다. 유대인은 하나님을 함부로 호명하지 않았기에 하늘을 부른다. 
그런데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일까? 스스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포기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풍요롭지 않았던 집

상상력을 발휘해서 이 집안을 생각해 보자. 이 집안은 부자일까? 품꾼이 있다고 했다. 품꾼은 종이 아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일용직 노동자이다. 종을 안 쓰고 일용직 품꾼을 쓰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에서 최악의 착취이다. 그렇다면 아버지도 그러할까? 이 집은 품꾼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근데 이 아버지가 품꾼에게 먹을 것을 충분히 줬다고 했다. 악질적 부자가 아니다.
이 집은 종을 쓰기 어려운 처지였다. 작은아들이 돌아가실 때 큰아들은 어디에 있었나? 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집은 그렇게 큰 부자가 아니었다. 그러면 작은아들도 집 나가기 전에는 함께 일했어야 했을 것이다. 시골에서 가족이 근근이 열심히 살면서 어느 정도 자수성가해 땅을 일군 집안일 것이다. 아버지가 얼마나 검소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은 큰아들이 나중에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아버지는 염소 새끼 하나 안 줬다”라고 투정한 것이다. 
작은아들이 정신을 차렸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아버지가 감격할 만하다. 이 아버지는 대낮에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내내 기다렸다. 이 모습이 1세기에 가부장적 중심의 유대교 사회에서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다. 명예를 회복시킨 것이다. 

회개한 죄인은 하나님 나라 주인공

이 이야기는 무엇을 의미할까? 율법을 어긴 사람 나아가 민족적 정체성도 부정한 사람을 당시는 죄인으로 여겼다. 그런데 회개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바리새인이 숭앙하는 율법에 따르면 관용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지었으나 회개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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