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 비유’ 마태와 누가 다른 이유

마태복음의 잃은 양 비유는 누구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는 마음 즉 가장 약한 자에게 관심이 많다. 그런데 같은 듯 다른 게 누가복음이다. “잃은 자가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을 때 그때 모든 공동체가 함께 기쁨을 누려야 한다”라는 가르침이다. 이 이야기는 99명 중 한 명이 빠지면 안 되고, 100명이 돼야 온전한 공동체라는 이야기이다. 즉 ‘한 사람도 소외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잃은 양 비유에 하나 더 덧붙인 게 있다. 바로 열 드라크마의 비유이다. 드라크마는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열 드라크마면은 열흘 치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동전 10개가 한 꾸러미라는 점, 거기서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본문은 한 여인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열심히 찾고, 또 그 찾은 기쁨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내용이다.

여기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를 본다. 마태는 더 가난하고 더 약한 사람에 대해 관심이 있는데, 누가는 그 약한 사람을 포용하면서 온전히 공동체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마태는 동전 잃은 여성을 염려했지만 누가는 동전이 온전히 모두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얘기는 예수님이 바리새파 율법학자로부터 ‘세리 죄인하고 친구처럼 지내는가?’라는 비난을 받을 때 나온 것이다. 누가복음은 ‘사회적으로 저평가받는 사람과도 함께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여야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전 한 드라크마에 비유되는 ‘잃은 자’에는 비유대인 즉 이방인과 여성, 죄인이라 불리던 세리도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예수의 뜻이었다. 모든 이방인이 모여 하나님 나라의 한 백성이 돼야 한다는 것은 당시 곧 재림주가 오신다는 종말론적 신앙이고 교회의 사명으로 이해됐다.

요한복음에만 있는 ‘새 계명’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요한복음 13장 34~35절)은 아주 익숙하다. 그런데 ‘새 계명’은 요한복음밖에 없다. 율법학자가 바리새파와 모여 예수님한테 구약에 가장 중요한 계명이 뭐라고 물을 때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라고 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그것은 옛 계명이라고 했다. 
요한복음서만 해도 AD 90년대 후반에 쓰였다. 예수님 시대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지났다. 이때 요한 공동체는 회당으로부터 축출당한다. 당시 흩어진 유대인이 정착한 곳에는 어김없이 생긴게 회당인데, 이, 회당을 중심으로 촘촘하게 공동체가 형성됐다. 그래도 회당 안에 있으면 로마 제국의 압박으로부터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지칠 수 있지만 회당 밖으로 쫓겨나면 식민지 백성 억압하는 로마 제국과 직면해야 한다. 

유대교와 갈라진 기독교 차별점 두 가지

처음에 유대교와 예수를 믿는 사람은 구분이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가 커지면 유대교와 분리되고, 그러면서 유대교보다 더 나은 무언가를 내세워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바리새파나 율법학자 같은 유대교 기반 종교인의 가르침보다 더 나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요한복음은 그들과의 구분 선을 분명히 했다.
초대 기독교가 분리하면서 만든 종교의식이 있다. 성찬식과 세례이다. 세례는 세례요한에게 ‘특허’가 있는 것인데 다른 종교에서 완전히 그리스도인으로 변화한다는 의식으로 기념됐다. 성찬식은 예수님이 하셨던 의식으로 그리스도인은 함께 둘러앉아서 밥을 먹으며 그분을 기억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둘 다 유대교에는 없는 것이다. 

성만찬이 빠진 요한복음, 왜?

그런데 요한복음을 보면, 잡히기 전날에 성만찬 한 내용이 없다. 신학적 의도가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대신 세족식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발을 닦아주시면서 너희도 그렇게 남의 발을 씻어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서로 사랑하라’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요한 공동체처럼 자기네끼리 똘똘 뭉쳐 사랑하는 것을 두고 폐쇄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세상과 전혀 다른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세상은 서로 속고 속이고 투쟁하고 경쟁하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남을 짓밟지만, 기독교 공동체는 그래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끼리 정말 똘똘 뭉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모범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으로 지배하고 약자를 착취해서 자기네 배를 불리는 세력과 대조되게 요한 공동체는 예수의 친구로서 서로 사랑하면서 공존하는 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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