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다들 그런 경험 한번쯤 해 봤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배우자 표정에 짜증이 가득하면 내 기분도 즉각 엉망이 된다.

반면 출근시간에 버스를 탔는데, 운전노동자가 밝은 표정으로 “어서 오세요”라고 환하게 웃어주면 내 기분도 하루 종일 가벼워진다. 

놀라운 사실이 있다. 바이러스만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도 전염된다는 사실이다. 행복도 전염되고 불행도 전염된다. 배우자의 짜증에 내 기분이 엉망이 되는 것도, 운전노동자의 환한 미소가 나의 하루를 가볍게 만들어주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짜로 상대의 기분이 나에게 옮아오겠어?’라고 의심하지 말자. 감정전염 현상은 행동경제학은 물론이고 심리학과 신경과학, 뇌과학, 경영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숱한 실험을 통해 입증된 명백한 사실이다. 
감정이 왜 전염될까?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다니엘 골먼(Daniel Goleman) 교수는 이를 인류의 진화와 연결시켜 설명한다. 

사바나의 연약한 동물이었던 인류는 생존을 위해 함께 모여서 사는 길을 택했다. 함께 사냥을 하고, 함께 공동의 천적에 맞섰으며, 함께 농사를 지은 것이다. 단언컨대 사회(society)는 인류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그런데 사회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 감정을 타인에게 잘 전달하고, 타인의 감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능력이 필수적이다. 서로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해야 함께 사는 사회를 잘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생존을 위해 서로의 감정을 전염시키는 독특한 능력을 발달시켰다. 

공포는 행복보다 강하다

의사이자 사회학자인 니콜라스 크리스태키스(Nicholas Christakis) 예일대학교 교수는 행복이 어느 단계까지 전염되는지 연구한 적이 있었다.

1971~2003년 1만 2,067명의 행복에 대해 연구한 결과, 내가 행복하면 1단계 이웃(친구)의 행복이 15% 상승했다. 2단계 이웃(친구의 친구)의 행복도 10% 증가했다. 3단계 이웃(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행복도 6% 높아졌다.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친한 친구가 몇 명 없는 나에게는 실로 충격적인 연구 결과였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는커녕 ‘친구의 친구’ 이름도 잘 기억 못 하고 살았는데 나의 행복이 그 이름도 모르는 ‘친구의 친구의 친구’를 기쁘게 한단다.

오늘 아침 이유 없이 사는 게 행복했다면 그건 어쩌면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가 행복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크리스태키스는 “행복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인간이 형성한 네트워크를 타고 전염된다”고 단언한다. 

한 단계 더 나아가보자. 감정이 전염된다면 행복과 불행 중 어떤 감정의 전염성이 더 강할까? 행복의 전염성이 더 강하면 참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불행의 전염성이 훨씬 강하다. 

왜냐하면 감정전염이 사회를 잘 유지하려는 인간의 진화적 속성에서 기인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사회신경과학의 창시자 존 테런스 카치오포(John Terrence Cacioppo) 시카고대학교  교수는 “사바나의 연약한 인류가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료가 느낀 공포와 슬픔을 빨리 캐치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생일을 맞아 뛸 듯이 기뻐하는 친구의 감정은 사실 시급한 게 아니다. 그 행복을 내가 즉시 공감하지 못해도 목숨에 위협을 받지는 않는다. 물론 “너 같은 놈이 친구냐? 이 개자식아!”라며 친구가 날린 분노의 주먹에 맞아죽을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친구가 분노해서 맞아죽은 것이지, 친구가 행복해서 맞아죽은 것이 아니다.

반면 친구가 고통을 받으며 죽음의 공포에 내몰렸을 때, 이 감정은 매우 강하게 나에게 전염돼야 한다. 친구의 불행은 ‘우리 부족 주변에 뭔가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는 강력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호를 빨리 캐치해야 나도 위험에 대비할 수 있다. 행복보다 불행의 전염 속도와 강도가 훨씬 강한 이유다.

시장은 행복과 불행을 해결하지 못한다

문제는 행복과 불행의 전염 문제를 시장이 절대 해결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시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행복과 불행에 가격을 매기고 돈으로 사고팔아야 한다. 하지만 전염이 되는 재화는 절대 시장에서 정상적으로 거래될 수 없다. 

생각해보자. 누군가가 돈을 주고 행복을 잔뜩 샀다. 그런데 문제는 옆 사람이 덩달아 행복해졌다는 점이다. 그러면 행복을 돈 주고 산 사람은 “어이 친구. 넌 내 덕에 15%가량 더 행복해졌으니 나에게 대가를 지불해야겠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시장의 원리다. 그런데 그게 될 리가 있나? 친구는 그렇다 치고 ‘친구의 친구’에게는 어떻게 돈을 받을 건가? ‘친구의 친구의 친구’에게는?

행복보다 전염성이 강한 불행은 더더욱 시장에서 거래되지 못한다. 나는 김용균 노동자가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을 때 정말 마음이 찢어지는 슬픔을 느꼈다. 그래서 내가 태안화력발전소를 찾아가 “내 불행의 원인이 당신들이니 당신들이 나에게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  내 불행의 대가로 돈을 내놓아라”라고 주장해보라. 이게 될 일이 아니지 않나?

따라서 행복과 불행 모두 시장에서 거래되는 사유재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모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공공재의 성격을 훨씬 강하게 갖는다. 행복은 독점되지 않고 불행도 한 곳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왜 불행한가? 그 불행의 원인이 나일 수도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냉정하게 살펴보자. 우리는 오늘 먹고 살 수 있는데도 내일이 불행하다. 오늘 직장이 있는데도 내일 실직할까 봐 불행하다. 오늘 정규직인데도 내일 비정규직이 될까 봐 불행하다. 

왜냐고?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 중 한 명이 그 일로 불행을 겪었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 공포와 불행이 전염돼 우리는 늘 불행하고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확신한다. 국민들의 불행과 공포를 없애는 일, 그리고 국민들에게 행복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일은 결단코 시장이 아니라 사회와 공공의 힘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이 땅에 사는 그 누구도 빈곤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내몰리지 말아야 한다. 그 사람이 죽음의 공포에 내몰리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당연히 상관이 있다. 불행은 전염되기 때문이다. 내 ‘친구의 친구의 친구’ 중 한 명이 그렇게 죽으면 나 또한 ‘나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몰라’라는 극심한 공포에 시달려야 한다. 

반면 내 이웃이 올겨울을 따뜻하게 나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살고, 우리 농민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지 않고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우리 산업노동자들이 전보다 안전하게 노동을 할 수 있으면, 그들의 ‘친구의 친구의 친구’ 중 하나인 나도 덤으로 행복해진다. 내가 시장이 아닌 사회와 공공의 힘이 지배하는 따뜻한 복지국가를 꿈꾸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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