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은 남로당의 폭동이었다?

혁명관점에서 본 제주 4.3사건?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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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을 공산화하기 위한 남로당의 게릴라성 전쟁이라는 내용의 일부 보수단체와 정치권의 토론회와 강연회가 잇달아 열리면서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특별법 개정안 마련을 촉구하는 시민사회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

강병수 제주4.3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도민연대 사무총장은 8일 오후 6시 30분 서울대 트루스포럼이 주최하는 혁명전쟁 관점에서 본 제주 4.3사건이란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제주도 토박이로 해군 소령을 예편했고, 현재 제주 관광대 교수인 그는 다음날(9)도 여의도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대한애국당 조원진 의원 주최로 열린 제주 4.3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세미나'에 발제자로 참여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때 작성된 4.3 진실조사보고서에는 전투 양상에 대해서는 누락했다"고 운을 뗀 후 강연 내내 "4.3 사건은 남로당의 공산주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혁명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1947년 제주 3.1 발포사건과 3.10 총파업은 남로당의 공산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대중동원단계로 봐야 한다”고 부연했다. 남로당원들이 경찰의 발포를 유도하기 위해 말의 항문을 죽창으로 찔렀고, 말이 흥분해 아이를 밟아 대중들의 흥분을 격발시켰으며 그 사건으로 (경찰이) 건수(약점)를 잡힌 것이란 주장이다.?

누군가 고의로 경찰의 격발을 유도했다고 치더라도 경찰이 민간인을 향해 총을 쏜 행동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강 사무총장은 경찰의 총에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입었던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에 대한 지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에 면죄부를 주는 발언만을 해 그의 역사적 인식이 한참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3.10 총파업이 끝날 때쯤 20여명에 불과했던 남로당원은 3500여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제2혁명 단계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면서 남로당 지령서에는 관련 내용이 적혀 있다”며 주장을 이어갔다.?

그는 1947216일 기록된 남로당 1차 지령서에는 "3.1기념준비위원회를 즉시 조직하고, 스탈린·김일성·박헌영 등을 명예회원으로 추대할 것"이라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고 했다. 또 남로당 2차 지령서는 "우리는 인민주의 피투성이 속에서 남조선노동당을 지지하자"는 내용이, 225일 기록된 남로당 4차 지령서는 "우리 당면과업을 구체적으로 충분히 해설해, 대중에 침투시켜 압도적인 대중동원에 주력할 것, 대중의 감정을 격발시킬 것"등의 내용이 적혀 있으며 남로당 10차 지령서에는 "증오감과 투쟁욕, 대중의 혁명적 열정을 자극시키라. 3.1사건 이후, 2혁명단계의 투쟁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열변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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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방수 사무총장이 강연에 사용한 P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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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사무총장은 남로당 지령서를 발견하게 된 계기도 설명했다. 그는 "제주대학교 조성일 사회학과 교수가 20여년 전, 학생들에게 집에서 한자로 되어 있어 보기 어려운 옛 기록들을 가지고 오면 레포트 점수를 많이 줄 테니 제출하라"고 제안하자 "당시 제주시 외곽에 사는 한 학생이 들고 온 것이 남로당 지령서였다"면서 “(남로당지령서는) 16개가 발견됐는데 4개는 살인사건에 대한 것이고 10개는 총파업에 대한 것 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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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강연 중 남로당 지령서 원본은 커녕 사본 공개도 없었다.?

그는 "김달삼에 이은 인민유격대 2대 사령관 이덕구는 군과 경찰에 침투시킨 프락치들과 합세해 제주도를 장악하려 했다"면서 "1031일 경찰은 프락치 사건을 적발 하고 많은 좌익들이 검거됐다. 곧바로 정부는 19481117일 계엄령을 선포했다"고도 했다.

아울러 "정부군과 경찰의 양민 학살만 부각된 측면이 강하지만, 남로당원들도 양민들을 많이 죽였다"면서 "당시 제주 4.3사건으로 1만4311명이 희생됐는데, 그 중 군경이 1955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제주 4.3사건에 군인으로 참전한 큰아버지 말을 인용해 "양민인지 남로당인지 당시 구별하지 못했기에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했다"며 "양민인 줄 알았다가, 뒤돌아서면 총으로 쏘는 경우가 많았다"는 진술도 덧붙였다.

강연 후에는 질문도 쇄도했다. 한 참가자는 "좌익들이 주장하는 역사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며 "다시 우익정부가 정권을 잡아 4.3을 재정리한다면 제주도민들의 반응은 어떨 것 같느냐"고 묻자. 방 사무총장은 "남로당의 후손들은 자기 조상의 불명예를 덮고싶어한다"며 "그래서 그들 입장에서는 그것을 정당화시키려면 민중항쟁 쪽으로 몰고 가야 할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은 우익이다, 좌익이다’라는 판단을 할 수 있지만 조선 시대 왕정국가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된 직후 이념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없던 시절, 민중들이 어떻게 조직적인 좌익활동을 했겠느냐고 묻는 질문에는 “19193.1 운동이후 일본에서 대한민국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그런 과정에서 1921년 약소국가들은 독립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었고, 오늘날처럼 좌익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독립운동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답했다.

한 참가자가 "우익들의 활동을 활성화하기 위한 연대가 필요한 것 같다"고 제안하자, 그는 "맞다. 그런 계획도 가지고 있다"고 응수했다. 아울러 그는 4.3과 관련한 책? 을 홍보하며 구매를 유도하기도 했다.

제주 4.3사건 평화재단 관계자는 강방수 씨의 주장과 활동에 대해 오래전부터 이런 활동을 해 오던 사람이라며 그의 주장에 반박할 가치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말했다.

그는 강연 중 독일 나치스 정권의 선전장관 괴벨스의 말을 인용해 대중은 거짓말하면 처음에는 부정하고, 그다음은 의심하지만 되풀이하면 믿게 된다면서 이는 좌파들이 사용하는 문구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인용한 괴벨스는 히틀러에 충성을 맹세하고 베를린 지방의 당 지도자까지 된 그릇된 정부의 하수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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