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집필 거쳐 전태일 열사 일대기 담아낸 ‘전태일 실록’
최재영 목사 “전태일 열사 50주기 맞아 한국교회 교리적 장벽 허무는 계기되길”

‘전태일 실록’ 출간을 앞둔 최재영 목사와 전태일기념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 목사는 “전태일 열사에 대한 성경과 같은 하나의 텍스트북을 만들고 싶었다”고 집필을 시작한 배경을 밝혔다. 사진은 최 목사가 기자에게 청계피복노조 관련 전시물을 설명하는 모습. (사진=평화나무)
‘전태일 실록’ 출간을 앞둔 최재영 목사와 전태일기념관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 목사는 “전태일 열사에 대한 성경과 같은 하나의 텍스트북을 만들고 싶었다”고 집필을 시작한 배경을 밝혔다. 사진은 최 목사가 기자에게 청계피복노조 관련 전시물을 설명하는 모습. (사진=평화나무)

[평화나무 김준수 기자]

37년 동안 한 사람의 일생을 탐구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사람만 300여명. ‘실록’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이유다. 50년 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고 외치며 분신까지 불사한 한 청년 노동자의 삶을 <전태일 실록>을 통해 입체적으로 엿볼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그동안 조명되지 못했던 전태일 열사의 신앙적 배경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책을 써가면서 전태일 열사에 대한 성경과 같은 하나의 텍스트북을 만들고 싶게 됐죠. 전태일 열사를 연구하려는 모든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전태일 실록> 출간을 앞둔 최재영 목사(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의 말이다.

지난달 30일 평화나무와 만난 최 목사는 집필을 마무리한 소회를 담담히 밝혔다. 최 목사도 4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릴 줄은 결코 예상하지 못했다. 다소 무모해보이기까지 했던 최 목사의 결심은 37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끝에 <전태일 실록>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비로소 열매를 맺게 됐다.

최 목사를 필생의 작업으로 이끈 전태일 열사와의 만남도 자못 운명적이었다. 전태일 열사의 흔적이 남은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와 관련된 숨은 일화들을 하나둘씩 알게 되면서 본격적인 탐구에 들어갔다. 결정적으로 37년 전 젊은 신학도였던 최 목사가 느닷없는 불심검문을 당한다. 그 과정에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전태일 평전을 가지고 있던 것을 들켜 불온서적 소지혐의자로 몰린 최 목사는 남대문경찰서에서 밤샘심문에 시달렸다.

최 목사는 “고구마 넝쿨이 딸려오듯이 기독교와 관련된 전태일 열사의 자료와 일화들을 듣기 시작했는데, 전태일 열사가 창현감리교회 종치기 소년이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며 “그때 일이 계기가 되어 전태일 열사의 역사적, 시대적, 종교적 의미를 남기고 싶다는 사명감 아닌 사명감이 생겼다. 그 후부터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전태일 실록>을 쓰기 시작했다”고 집필을 결심한 순간을 회상했다.

전태일 열사의 발자취를 오롯이 담기 위해 이소선 여사와 전태삼 씨와의 인터뷰도 몇 년 동안에 걸쳐서 이뤄졌다. 최 목사는 “이소선 여사님이 아들에 대한 회한과 아픔이 있다 보니 사람들도 그 분 앞에서는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았다. 그 자체가 고통이었기 때문”이라며 “당시 산동네에 있던 전태일기념관에서 숙박하다시피 살면서 이소선 여사님에게 23살의 나이에 각인된 아들의 삶을 들을 수 있었다”고 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 씨도 유족만 보관하고 있던 전태일 열사의 친필수기를 제공하며 <전태일 실록> 집필을 도왔다. 이번에 출간되는 <전태일 실록>에는 원본은 사라졌지만 스캔본으로 남은 전태일 열사의 기록도 다수 확인할 수 있다. 최 목사는 “전태일 열사의 일기도 수난사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의 일을 겪어왔다”며 “기자들이나 노동청 관계자가 훔쳐가는 등 도난이나 분실 사건이 허다하다”고 했다. 지난해 출범한 전태일기념관에도 최 목사의 손길이 곳곳에 묻어있다. 자료 제공은 물론, 집필 중이던 <전태일 실록>을 참고해 기념관의 전시 방향도 정했다.

이외에도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천막촌(현 쌍문동 삼익아파트단지)의 이웃들, 함께 일했던 노동자들, 창현감리교회(현 갈릴리교회)와 대한수도원, 임마누엘수도원 관계자들을 수소문하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최 목사가 만난 이들 중에는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전태일 열사의 첫사랑으로 소개된 김예옥 씨, 절친한 친구였던 정원섭 씨도 있다. 최 목사는 정원섭 씨를 만나기 위해 에콰도르까지 찾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노력 끝에 <전태일 실록>에서는 전태일 열사의 출생에서부터 시작해 이사를 다녔던 지역들, 학교들, 이직한 발자취를 망라하면서 친필수기도 시간대별로 배치할 수 있었다.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일했던 당시 봉제공장을 재현한 전시물. 노동자들은 햇볕도 비치지 않는 1.5m도 되지 않은 좁은 다락방에서 15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사진=평화나무)
전태일 열사를 비롯한 노동자들이 일했던 당시 봉제공장을 재현한 전시물. 노동자들은 햇볕도 비치지 않는 1.5m도 되지 않은 좁은 다락방에서 15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사진=평화나무)

 

참담한 노동 현실 외면한 한국교회 질타했던 전태일 열사

최 목사는 단순히 전태일 열사가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주목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당시의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헌신했던 운동가로서의 모습이 조명됐던 것에 비해 그의 신앙적 면모는 대체로 잘 알려지지 않는 것도 맞지만, 무엇보다 전태일 열사의 이타적인 삶과 사상, 인간애의 근본이 그의 신앙에서 출발됐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교회가 운영하던 공립학교를 통해 기독교를 접한 전태일 열사는 1967년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출석하던 창현감리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된다. 스스로도 주일학교로서 자부심을 가지면서 아이들을 만나는 일요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또 바쁜 와중에도 강원도 철원 대한수도원과 서울 삼각산 임마누엘수도원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참석하고 교회 건축 봉사를 위해 벽돌도 기쁨으로 감당했다.

늘 배움에 목말라있던 전태일 열사는 한때 대학진학을 꿈꾸기도 했다. 1967년 2월 20일 일기를 살펴보면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전태일 열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남은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할 리가 어디 있어. 해보자. 그리고 내년 3월 달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76일 남았구나. 1년하고 10일. 재단을 하면서 하루에 저녁 2시간씩만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보겠지. 해보자. 해라”고 자신의 결심을 담담히 써내려갔다.

이런 열망이 반영하듯 전태일 열사는 의형제를 맺은 몇 살 위의 형과 당시 서울대 법대 근처에서 자취도 했다. 최 목사는 “서울대 담장을 사이로 전태일 열사와 조영래 변호사는 살아생전 길거리에서도 마주쳤던 것”이라며 “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책을 만든다는 말처럼 전태일 열사는 서울대 학생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분신 항거 이후에는 서울대 학생들이 전태일 열사의 영향을 받아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시발점이 됐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의 신앙이 자라갈수록 유독 노동자들에게 가혹하기 그지없는 평화시장의 현실과의 괴리도 두드러졌다. 당시 삼동(三棟)으로 불리던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의 업주들은 북한에서 신앙을 이유로 핍박을 받아 내려온 기독교인들이 대다수였다. 교회에서는 헌금도 잘하고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고용인들을 재봉틀 취급했던 업주들의 이중적인 신앙행태를 전태일 열사는 온 몸으로 경험한 것이다. 업주들은 일요일에도 일을 시키면서 철야작업을 위해 ‘타이밍’이라는 각성제까지 먹였다.

이소선 여사도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드님의 정신과 사상에는 기독교 정신이 밑바탕에 있다고 들었습니다’라는 질문에 “많이 깔렸지. 지가(전태일이) 주일학교 선생을 하는데, 주일날에 평화시장 안노니까 교회 선생을 못한다 말입니다. 그러니까 밤에 와서 (공과준비)해놓고…”라며 “투사를 하려고 죽지도 않고, 열사를 하려고 죽지도 않고, 정말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 내가 돌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서 노동청에 댕기다가 자기 힘으로 부닥치니까 그런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최 목사도 <전태일 실록>에서 “전태일은 어쩌다 한 달에 한 번 겨우 쉬는 일요일을 애타게 기다리며 손꼽아 기다려왔다. 그에게 있어서 주일은 ‘햇빛을 보는 날’이었다. 물론 어두컴컴한 형광등 몇 개가 전부인 공장에서 일하다가 쉬는 날이 되면 밖으로 나와 마음껏 하늘을 바라보며 맑은 공기를 쐴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했을 것”이라며 “전태일은 인간을 재봉틀처럼 여기는 고용주들에게 항변하면서 자신의 몸을 희생해서라도 다른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육 간에 햇빛을 보도록 했던 것”이라고 했다.

1970년 4월경에 작성한 글에서는 노동자들이 겪는 참담한 현실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이라며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라고 참담한 심정을 기록했다.

전태일 열사가 목도한 기독교인의 이중성은 업주들에게서만 본 것이 아니다. 당대의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없기는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태일 열사는 죽음을 앞두고 임마누엘수도원에서 기도하면서 평화시장 노동문제를 수도원에 방문한 목회자들과 상담을 자주했다. 하지만 목회자들은 한결같이 “기도생활에만 열중하는 것이 좋겠어”라거나 “아직 나이도 젊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뭐하려고 노동문제에 뛰어들려고 해? 그런 일들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전태일 열사의 활동을 비난하기 바빴다.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도 현실의 문제에서 눈을 돌리는 한국교회를 질타했다. 전태일 열사는 이소선 여사에게 남긴 두 번째 유언에서 “목사님들은 교회 강단에서 교인들을 향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살아라’는 설교를 하시잖아요. 나는 정말 성경 말씀대로 실천하는 목사님들이 우리나라에 열 명 정도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엄마도 그런 사람들처럼 그런 식으로 엉터리로 예수를 믿으려면 차라리 믿지 마세요”라고 했다.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노동 환경 개선에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근로기준법을 지키고 노동자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는 ‘태일피복’이라는 모범업체 설립을 꿈꾸기도 했다. (사진=평화나무)
전태일 열사는 평화시장 노동 환경 개선에 목소리를 높이는 한편, 근로기준법을 지키고 노동자에게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는 ‘태일피복’이라는 모범업체 설립을 꿈꾸기도 했다. (사진=평화나무)

 

“성경 말씀대로 실천하는 목사님들이 열 명 정도라도 있었으면…”

전태일 열사는 자신의 죽음을 외면할 한국교회의 반응을 예견하기도 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까지 불사한 후 병상에 있던 전태일 열사는 이소선 여사에게 “많은 목사님들이 내가 죽으면 분명히 내 죽음을 자살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자살했으니 지옥에 갔다고 말할 거예요. 그렇지만 요한복음 15장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평화시장의 친구들과 수만 명의 불쌍한 여공들을 위해서 죽은 것이니 주님의 말씀에 절대 어긋난 것이 아니에요”라고 했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는 단순히 현실에서 희망을 보지 못하고 비관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불사른 것이 아니다. 최 목사는 고통 받는 동료 노동자들에 연민과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신앙적 결단이었다고 단언했다.

분신까지 결단한 전태일 열사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글도 있다. 1970년 8월 9일 임마누엘수도원에서 건축 봉사를 하며 마무리된 전태일 열사의 유언장이다. 여기서 전태일 열사는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담담히 자신의 심정을 정리했다.

최 목사는 <전태일 실록>에서 “그토록 번민하면서도 그의 마음은 온통 평화시장 여공들에게 향했다. 잠 안 오는 약을 먹고 사흘 연속으로 야간작업을 하던 중 폐병으로 피를 토하던 여공들을 위해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리며 하늘의 은총과 자비를 구한 것”이라며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타들어 가는 목마름에 허덕이는 소녀들에게 한 방울의 이슬이 되고자 자신을 불길 속에 던지고자 마침내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오재식 박사나 최종구 명예교수(서울대)가 당시 가장 존경받던 한경직 목사에게 전태일 열사의 장례를 부탁한 건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한국교회의 상징이었던 영락교회에서 나서준다면 당시의 노동문제에 기독교인들의 관심도 환기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경직 목사는 전태일 열사가 자살을 했다는 이유로 매몰차게 거부했다. 진보 기독교계를 대표하던 강원룡 목사도 데모 협조를 요청하는 브라이덴슈타인 교수의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한경직 목사는 오재식 박사에게 “그동안 우리 교회에서는 자살한 사람의 장례예배는 치른 적이 없었고, 장로교 원칙 상 치를 수도 없고, 치러서도 안 됩니다. 이번에 꼭 전태일의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고 싶다면 내가 알기로는 그 청년이 감리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하던데 그 교회에 가서 장례식을 치루는 것이 마땅한 원칙입네다”고 말하며 전태일 열사의 장례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했다고 한다.

전태일 열사의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정권의 사주를 받거나 평화시장 업주들의 편에 서서 유가족들을 회유하려고 했었던 목회자들까지 있었다. 그 중에는 전태일 열사의 가족이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목사까지 있어 이소선 여사의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 목사는 “집사님, 이 돈은 하나님이 주신 돈입니다. 모른 체하고 빨리 받아 넣으세요. 일단 장례식부터 치르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며 업주들과의 합의를 종용했다.

또 교계 지도자들 자처하던 한 목사도 이소선 여사에게 “대한민국에서 근로자 한 사람이 죽었는데 이 만한 액수의 위자료를 지급한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는 역사적인 일입니다. 이 돈이 엄청난 액수인 걸 진짜 모르십니까?”라고 훈계도 서슴지 않았다.

37년이라는 인고의 시간 끝에 <전태일 실록>을 마무리한 최재영 목사는 한국교회가 전태일 열사의 외침을 외면하지 말고 이제라도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했던 예수님의 정신을 회복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최 목사는 “전태일 당시나 지금이나 현장의 노동자들은 마치 죽어서야 증명이 되는 것처럼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느 한 노동자가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어야만 그제야 없던 문제가 발생하는 것처럼 한국교회나 이 세상은 그렇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며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그동안 쌓아놓은 교리적 장벽을 허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11일 출간을 앞두고 있는 ‘전태일 실록’. 최재영 목사가 37년 동안 전태일 열사의 발자취를 기록했다. (사진=동연 제공)
11일 출간을 앞두고 있는 ‘전태일 실록’. 최재영 목사가 37년 동안 전태일 열사의 발자취를 기록했다. (사진=도서출판 동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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