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언론에 대해 묻고 따져야 하는 이유

정준희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

 

저널리즘 비평은 전례 없이 활성화되어 있다. 기성 매체에서 저널리즘 비평을 표방하고 있는 정기프로그램이나 특별기획이 상당히 눈에 띄게 증가했고, 시사 프로그램 안에 저널리즘 비평 꼭지가 포함되어있는 경우는 더 확산하고 있다. 

신규 매체인 유튜브나 팟캐스트 등을 통해서도 저널리즘 비평에만 초점을 맞춘 경우는 물론, 다양한 시사 논의에서 저널리즘에 대한 비평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는 사례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게다가 미디어를 업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언론에 대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 이들에게 언론이 딱히 전문적인 행위로 비취지 않듯 저널리즘 비평 역시 그다지 큰 전문성을 요하는 행위인 것처럼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적어도 정치와 시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론을 비판할 자세와 준비가 되어있다.

따라서 내가 굳이 더 나서서 한국 언론의 문제를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다닐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감을 나는 갖고 있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은 대다수의 한국 언론이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리고 어떤 면에서 비판을 받아야 하는 지에 관해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은가? 요컨대 지금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언론에 대한 ‘무지’를 깨닫게 해줄 ‘철학자 소크라테스’가아니라, 누구나 알고 있는 이 답답한 언론 현실에 관해 토로할 혹은 같이 분노해줄 ‘테스형’일 수도 있다는 거다. 물론 또 한 가지 남은 역할, 즉 당파적 소피스트로서의 역할이 있기는 하다. 어차피 전체로서의 언론은 비판하고 분노해야 할대상인 것은 맞지만, 그 비판과 분노의 구체적인 대상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이유가 정치적·이념적 견해에 따라 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파적 소피스트는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는 비판과 분노 각각에 그럴싸한 정당성과 논리를 제공한다. 게다가 요즘은 딱히 엄청나게 정교한 논리와 대의명분도 아니고 그저 ‘조금 더 유명한’ 문제적 인물이기 때문에 효용이 있다.

최근 한국 언론의 최대 출입처로 부상하고 있는 그 누군가의 입과 글과 SNS가 그렇듯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오래전에는 사회운동의 입장에서, 그리고 어느 시점을 넘어서면서는 학문과 연구의 견지에서,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대중매체라는 창구를 통해미디어 체제 비판과 저널리즘 비평을 수행해온 사람으로서, 한국 언론을 바라보는 데 유용하고 필수적이라 판단하는 몇 가지 준거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비판은 단지 부정적인 시각을 대상에게 들씌우는 행동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 사고의 한 형식이며, 그 연장선에서 비평은 단지 흠잡기이기보다는 상대의 맹점(즉 스스로 보지 못하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성찰을 유도하는 생산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막연한 보편성이 아닌 특정한 종류의 기준에 입각해 있을 때 가능하다. 한국 언론에 대한 비판적 사고와 비평적 인식을 끌어내기 위해 내가 흔히 채택하는 기준은 한국 언론 스스로가 내세우는 가치나 원칙이다. 예컨대 소위 ‘팩트의 신성함’을 그렇게나 강조하는 이들이 실제로 사실 확인과 검증을 수행상의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가, 공정성을 핵심 가치로 선언하는 언론의 보도는 그 가치만큼 공정한가, 보도 대상의 실력과 전문성을 문제 삼는 강도만큼이나 언론 스스로의 저널리즘적 실력과 전문성이 충분히 갖춰져 있는가 등이 그것이다. 즉 한국 언론이 자신들의 직업과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가치나 원칙을 그들 스스로에게 돌려보자는 것이다. 자신이 남에게 적용하는 원칙과 스스로가 행하는 바 사이의 현격한 격차와 비일관성을 지적하는 이른바 ‘내로남불’ 프레임도 비슷한 궤적 위에있다. 이는 한국 언론 다수가 현재의 정치 권력을 비판할 때 무척 즐겨 채택하고 있는 기준이기도 한데, 솔직히 이들이 쓰는 내로남불 프레임조차 상대에 따라 대단히 비일관적이기는 하나, 적어도 비판과 비평의 높은 지향은 이러한 ‘기준의 재귀성(再歸性)’을 통해서 확보된다는 점에서는 유의미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첫째, 한국 언론이 구가하고자 하는 자유의 뒤에는 얼마만큼의 자유주의가 체현되어 있는가를 묻는다. 세계 모든 언론의 이념적 기초를 하나로 일별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현대사회에서 가장 주류적이고 일반화된 (영미식) 저널리즘의 사회철학적 기초는 자유주의로부터 나온다. 물론 자유주의는 철학적 자유의지론에서부터 경제적 시장 자유주의, 정치적 자유지상주의, 사회적 자유개혁주의 등 때로 상충되기도 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이념적 입장이다. 그럼에도 이들을 관통하는 어떤 일관된 선은 있어서 그 강도가 절대적·무조건적인 것에서부터 상대적·제한적·조건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사회 구성원 일반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호혜적 자유 개념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한국 언론이 그렇게나 울부짖는 ‘언론자유’는 이들 가운데 기껏해야 시장 자유주의에 가까운 대단히 협소한 개념일 뿐이며, 그마저도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회 구성원들 일반에게 동등한 수준으로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간 수없이 관찰되어온 바다. 

둘째, 한국 언론 다수의 의식과 행동은 지극히 엘리트 지향적인데 정작 스스로는 제대로 된 엘리트가 아니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학벌 문제가 아마도 그 어느 사회부문보다도 더욱 강력하게 자리 잡고 있는 부문이 바로 언론일 것이다. 이들과 유사한 수준의 폐쇄적이고 서열적인 학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곳이 법조계, 의료계, 학계, 관계 등일 텐데, 이들은 그나마 공통적으로 고시나 학위라는 공통의 공식적 진입 관문을 통과하고 들어온 사람들로서의 평준화 효과에 의해서라도 부분적인 제어를 받는다.

그리고 그 집단 전반의 엘리트성이나 집단 내부에서의 엘리트성을 가늠하는 사회적·개별적 기준이 있다. 그러나 한국 언론은 (잠시 언론고시로 지칭되는 꽤 높은 비공식적 관문이 존재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사회적으로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던 경우가 흐릿하고 희박하다. 게다가 언론 집단 내부에서 가늠되는 엘리트성은 (이 역시 언론인들 가운데 나름 ‘선수’나 존경받는 인물을 비교적 공통적으로 지목할 수 있었던 일부 시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일반적이지도, 일관적이지도 않다.

셋째, 이는 결국 ‘소명의식 없는 전문직주의’의 문제로 이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소명의식은 성직에 준하는 사명감이나 희생, 그리고 엄격한 자기 기준으로 움직이는 장인정신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봉건적 질서를 낭만화하는 혐의가 짙을 뿐 아니라, 산업화된 현대사회에서 노동이나 특정 직업을 과도하게 신성시하는 것은 은밀한 착취를 강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인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현대의 기자에게 정의와 진실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절대적 소명의식’을 기대할 까닭은 딱히 없으며 강요할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특정 직업에게 부여된 특권이나 우호적 조건에 상응하는 윤리적 기준으로서의 ‘상대적 소명의식’이다.

예를 들어, 공직자에 대한 감시 권한을 주었다고 해서 공직자의 공적 행위와는 무관한 영역을 파헤치고 다닐 권한까지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언론사 기자와 심부름센터직원의 차이가 정말 소속된 회사의 차이밖에 없는 건가? 만약 권력 감시와 비판이라는 ‘대의’를 위해 어느 정도의 경계 모호성과 실수 가능성을 폭넓게 관용해야 한다고 한다면, 언론사 기자의 비윤리적인행위는 용인하면서 심부름센터 직원의 순기능은 불법으로 다스려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전문직, 심지어 성직에 준하는 특권은 당연시하면서, 절대적인 소명의식은 말할 것도 없이 상대적 소명의식조차확인 하기 어렵다는 점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공직에 대해서, 소방직에 대해서, 심지어 일반직 노동자들에게조차 그토록 높은 수준의 소명의식을 요구하는 언론이 스스로에 대해서 갖고 있는 태도는 과연 어떠한가? 근대적 사회철학의 토대이자 해방적 정치기획의 가장 강력한 흐름으로 자리해 왔던 자유주의에 대해 나는 전면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유주의를 체현하는 언론에 의해 더 높은수준의 언론자유가 쟁취되고 실천되는 모습을 보길 원한다. 물론 표현의 자유를 주장할 자격이 없는 이들에게도 표현의 자유는 주어져야 하고,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언론에게도 언론자유는 주어져야 한다. 솔직히 과거의 나치나 현대의 극단주의 집단처럼 자유주의를 배척하고 민주주의를 훼방 놓았던 집단이, 자유와 민주의 가치를 위해희생한 이들의 피로 구축된 제도의 덕을 가장 많이 본다는 건, 인류 현대사가 경험해온 씁쓸하기 그지없는 역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적 사회 설계의 일부이자 그것의 가장 혁혁한 성과 중 하나이기도 했던 언론이, 자신의 자유주의를 제대로 밀어붙여 민주적 질서에 기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를 통해 자유와 민주를 참칭하는 극단주의를, 그리고 특히나 최근 들어 더욱 맹렬해지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발호를 제어할 수 있는지,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면서, 때로 비판하고 때로 연대하고자 한다.

정준희 한양대학교 언론정보대학 겸임교수

 

# 이글은 쩌날리즘 1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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