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거나…한 명 것이라도…
쉽고 비열하게 하는 ‘인용보도’

정상근 프리랜서 기자 

 

‘따옴표’는 죄가 없다. 따옴표의 수는 기자의 성실성과기사의 품질을 보증했다. 그동안 제기된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문제는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지 않고, 더 많은 사람에게 사실 확인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여기에 한국 언론 특유의 익명성이 더해지면, 기사의 시각은 협소해질뿐더러, 신뢰는 바닥을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국 언론을 비평할 때 이 ‘따옴표’는 빠지지 않는 문제가 됐다. 취재원의 말을 인용하고 독자들에게 정보를 전달해주는 소중한 따옴표가 한국 언론을만나 이 무슨 수모인가? 아예 ‘따옴표 저널리즘’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니, 몇 년 전 따옴표 없는 ‘뇌피셜 저널리즘’이 문제가 됐던 때가 있었던가 싶다.

 ‘아무거나 인용한다’

‘따옴표 저널리즘’의 첫 번째 문제는 ‘아무거나 인용한다’는데 있다. 주장을 그대로 옮기고 검증에 소홀하다. 이런 식이라면 언론 보도가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지라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런 방식은 필연적으로 ‘오보’를 부른다.우리 언론이 따옴표를 얼마나 관성적으로 사용하는지, 지난 미국 대선에서 미국 언론이 보여준 태도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국 대선 중간 개표 과정에서 초반에 트럼프 대통령이 치고 나가자, 우리 언론은“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누군가의 말을, 사건을 총정리한다는 ‘종합’ 기사에서 제목으로 자신 있게 인용했다(뉴시스). “바이든은 나 못 따라잡는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민망해진 자신감을 곧이곧대로 따옴표 치며 기사를 작성한 언론(뉴스1)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 언론의 태도는 달랐다. 트럼프 대통령의 성명이 발표된 직후, 영국 가디언은 제목에서 아직 승패가 결정 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가짜뉴스’임을 명시했다. 아예 미국의 주요 방송사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에서 일방적인 주장이 이어지자 생방송을 중단하거나, 연설 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적인 주장임을 시청자들에게 고지했다. 해외 언론의 이런 태도는 누군가의 말을 따옴표로 전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우선적으로 그 따옴표 속 주장이 진실인지 아닌지 가려야 한다는 의무가. 저널리즘의 첫 번째 정명임을 보여준다. 반면 한국 언론은 누군가의 말과 글에 담긴 사실과 진실을 가리는데 관심 없이 무조건 ‘옮기자’는 태도를 갖고 있다.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보다, 그가 그 말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저널리즘의 책무를 완수한다는 태도를 갖고 있다.이유가 매우 간단하다. 그런 식의 기사 작성이 아주 쉽고, 간단하고, 이 나라에서는 아주 안전하기 때문이다.

‘한 명만 인용한다’

따옴표가 한국 언론에서 매우 변태적으로 사용되는 방식 중 또 다른 하나는, 기사 내 따옴표가 단 한 명의 말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의 성명, 주요 국책사업에 대한 속보나 1보.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있다.그런데, 속보도 아닌 것이,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지도 않은 것이 단 한 사람의 말은 인용해 주요 뉴스로 포털에 타전되고, 많은 대중에게 공개된다. 김준일 뉴스톱 대표가 명명한 ‘진중권 저널리즘’은 한국 언론의‘따옴표 저널리즘’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보여주는 매우 흔한 예다. 누구나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자유는 있지만, 언론은 그 누구의 말이나 인용하지 않는다. 어디서 불이 나고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전하거나, 한국 사회에 진지한 고민거리를 상기시킨 방송인 사유리 씨의 SNS가 아니라면, 누가 SNS에 쓰는 글을 그대로 퍼오면서 그것을 ‘기사’라고 부르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진중권 전 교수의 SNS는 한국 사회 모든 것의 평론 기준이 됐고, 어떤 사회적 이슈든 평가의 기준이 됐다. 기자협회보가 지난 7월, 9대 일간지가 가장 많이 발언을 인용한 사람에 대한 통계를 냈을 때, 1위가 도널드 트럼프, 2위가 문재인 대통령, 3위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 등등이었는데, 난데없이 진중권 전 교수가 17위에 올랐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보다 3단계 높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보다 6단계나 높았다. 진중권 전 교수의 SNS 글 대부분은 특별한 사실관계가 담긴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날선 글과 비판이 누군가에게 카타르시스를 줬을지라도, 그걸 거의 대부분의 언론들이 받아쓰는 건 황당한 일이다. 한국의 3분기 성장률이 최하위권이라는 한국경제의 가짜뉴스를 진중권 씨가 받아쓰고, 이를 다시 다른 언론이 따옴표로 묶어 보도한 촌극은 ‘진중권 저널리즘’이 얼마나 너절해졌는지 보여준다.

꼭 진중권 씨가 아니더라도, 한국 언론의 정치 보도 역시 그동안 주로 누군가의 발언을 인용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정치인의 말과 글이 가볍지는 않지만, 주요한 사실관계도 아닌 단순한 평론이 언론에 보도되고, 여기에 자극적인 제목을 달아 유포함으로써 상호 간의 지지자들을 격분시킨다. 신문은 쳐다도 보지 않고 인터넷으로 뉴스를 소비하는 시대에서, 누군가의 일방적인 주장 하나만 따옴표에 실려 대중에게 전달된다면 그 자체로 여론 왜곡일 뿐 아니라, 진중권 씨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을 갈라치는 앞잡이’가 되는 것 뿐이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는 ‘검찰 정국’도 결국 ‘따옴표 저널리즘’이 아닌가, 검찰의 주장이 검찰이라는 권위에 실려, 사실 확인 혹은 반론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보도됐고, 이에 따라 여론이 갈라졌으며,그 여론이 다시 누군가의 SNS를 통해 언론에 인용됐다. 그렇다면 그것은 언론이 여론을 보도한 것인가, 언론이 여론을 만들어낸 것인가?

‘너무 쉽고, 너무 비열하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런 따옴표 저널리즘이 한국 사회에 통용되고 한국 언론이 차용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쉽고 안전하니까. 우리나라 언론은 포털에서 기사의 개수로 수익을 내는 구조에 익숙하다. 그리고 기사를 빨리 쓸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안전한 방법은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내보내는 방법이다. “누구는 ○○○○이라고 말했다.”,“누구는 ○○○○이라며 ○○○○이라고 하면서 ○○○○이라고 덧붙였다.”, “누구는 ○○○이라고 했다. 한편, 이에 대해 누구는 ○○○○이라고 했다.” 하루에 100개도 쓸수 있는 방식이다. 책임 소재도 벗어날 수 있다. “가짜뉴스라고요? 이거 그냥 누가 한 말인데요?” 따옴표 저널리즘의 궁극적인 악랄함은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린치로 나타난다.

심지어 한국 언론은 인용 대상이 누군지도 알 수 없는 이른바 ‘네티즌’들의 글을 따옴표 치며 인용하기도 하는데, 기사나 잔뜩 써서 돈이나 벌려다 보니 합리적의 네티즌 의견은 재미가 없는 것이다. 지난 2017년 아이가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내렸는데, 버스 기사가 문을 닫고 출발했다는 인터넷 글이 올라왔고 언론들은 이 충격적인 주장을 검증 없이 옮기기에 바빴다. 그리고 네티즌의 글이라면서 버스 기사를 비난하는 따옴표들이 난무했는데, 이것이 곧 가짜뉴스임이 드러났다. 온갖 네티즌 비난을 인용한 기사, 그리고 그 기사에 달린 온갖 비난 댓글, 버스 기사분이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연예인들에 대한 악플, 한국 언론이 악플을 비난할 자격이 있나?

언론에 대한 한국사회의 기대치가 극도로 낮아진 상황에서 ‘따옴표 저널리즘’은 기자를 쓰레기나 구더기로 만들어버렸다. 사실 자업자득이다. 편하게 대충 하나 말아 PV나 높이려는 데스크, 컴퓨터에 앉아 기사거리 찾으며 누구 SNS나 돌아다니는 기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장터에 걸터앉아 너저분한 불량식품을 버젓이 판매하는 포털. 한국 언론의 고질적인 문제는 ‘따옴표 저널리즘’으로 더욱 분명해지고 말았다. 

정상근 프리랜서 기자 

# 이 글은 쩌날리즘 3호에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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