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오후 서울 종로구&nbsp;<strong>전태일</strong>다리에서 '2020<strong>전태일</strong>50주기준비위원회 출범식이 열리고 있다.&nbsp; (사진=연합뉴스)&nbsp;<br>
19일 오후 서울 종로구&nbsp;<strong>전태일</strong>다리에서 '2020<strong>전태일</strong>50주기준비위원회 출범식이 열리고 있다.&nbsp; (사진=연합뉴스)&nbsp;<br>

 

[평화나무 김준수 기자] 

어느 새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로 훌쩍 지나가버린 50년이라는 세월. 다가오는 11월 13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다.

지금까지 전태일 열사가 근로기준법과 씨름하며 열악한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해 사투를 벌였던 운동가로서 삶이 조명됐던 것에 비해 그의 사상과 활동의 기반이 됐던 신앙적 면모는 대체로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창현감리교회(현 갈릴리교회)에 출석하면서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다거나 당시 한국교회를 대표했던 한경직 목사가 자살했다는 이유로 전태일 열사의 장례를 거부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정도다.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에서도 전태일 열사의 신앙관이나 관련 활동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최근 출간을 앞둔 <전태일 실록>에서는 그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전태일 열사의 기독교적 배경을 조명하는 한편, 그의 일생 전체가 연대순으로 낱낱이 기록됐다. <전태일 실록>은 저자인 최재영 목사(손정도목사기념학술원장)가 최초 집필을 결심하고 37년이라는 인고의 시간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이소선 여사와 전태삼 씨, 전순옥 의원 등 전태일 열사의 가족들을 비롯해 최 목사가 만난 사람만 300여명 가까이 된다. 

최 목사가 집필에 뛰어들게 된 계기도 자못 의미심장하다. 1983년 젊은 신학도였던 그는 불심검문 중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의 전태일 평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들켜 결국 불온서적 소지혐의자로 남대문경찰서까지 가게 된다. 최 목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그때 일이 계기가 되어 전태일 열사가 이 시대에 주는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 마음을 다잡고 본격적으로 자료를 모으고 <전태일 실록>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전태일 열사와 기독교의 접점은 당시 대한성경구락부 제도를 도입한 교회가 운영하던 공민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늘 배움에 목말라 있던 전태일 열사는 기회만 있으면 학교의 문을 두드렸다. 전태일 열사는 1957년 4월 서울 남대문초등공민학교(남대문교회)를 시작으로 1961년 서울 동광초등공민학교(동광교회), 1963년 대구 복음고등공민학교(남산교회),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녔다. 

대학 진학까지 결심했던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불꽃 같은 삶으로 내달리게 된다. 1967년 2월 20일 일기를 살펴보면 배움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던 전태일 열사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전태일 열사는 “남은 다 하는데 나라고 못 할 리가 어디 있어. 해보자. 그리고 내년 3월에는 꼭 대학입시를 보자. 앞으로 376일 남았구나. 1년하고 10일. 재단을 하면서 하루에 저녁 2시간씩만 공부하면 내년에는 대학입시를 보겠지. 해보자. 해라”고 담담히 자신의 결심을 써 내려갔다. 

학업을 위해 다니기 시작했던 교회였지만, 교회는 전태일 열사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1967년 주일학교 교사로 임명되고, 틈틈이 시간이 날 때면 강원도 철원 대한수도원과 서울 삼각산 임마누엘수도원 부흥회에 참석했다. 바쁜 와중에도 벽돌을 나르며 교회당 건축에도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신앙이 자라갈수록 유독 노동자들에게 가혹한 부조리한 현실과 참상에 점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특히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면서 일요일도 제대로 쉬지 못해 주일성수를 할 수 없었던 상황은 그를 고민에 빠뜨리게 했다. 또 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었던 평화시장 업주들의 이중적인 신앙행태에도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평화시장, 통일상가, 동화시장 업주들 대다수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기독교인들이었다. 평화시장의 명칭도 ‘평화통일을 염원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최 목사는 <전태일 실록>에서 “그들은 매주 일요일이 돌아오면 자신들은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 주일예배를 드리고 봉사활동을 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운영하는 공장이나 작업장에는 일요일에도 문을 열었다. 업주들은 일요일에도 시다들과 미싱사, 재단사들이 의무적으로 출근하도록 해 평일처럼 일을 시켰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요일 근무는 예사로 벌어졌다. 심지어 일요일에도 철야 작업을 시키면서 업주들은 ‘타이밍’이라는 각성제까지 노동자들에게 먹여가며 고된 작업을 아무렇지 않게 시켰다. 아무리 업주가 소위 신실한 기독교인이었어도 그들의 자비는 같은 기독교인들이나 노동자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노동자들을 착취해 얻은 이익도 함께 나누기는커녕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에 바빴다. 그 돈으로 교회에는 정성껏 헌금으로 바치거나 강남 신도시에서 벌어지는 땅 투기에 쏟아붓기도 했다. 

전태일 열사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고 부르짖었던 배경에는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일해야만 하는 열악한 노동 환경을 질타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적어도 주일만큼은 마음 편히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도 있던 것이다. 

1970년 4월경에 작성한 글에서는 노동자들이 겪는 참담한 현실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나이가 어리고 배운 것은 없지만 그들도 사람, 즉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이라며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한 자는 부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빈한 자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안식일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까?”라고 절절한 외침을 기록했다.

전태일 열사의 노동관 형성에도 기독교 신앙이 깊이 관여했다는 점도 <전태일 실록>에서 밝혀낸 부분이다. 전태일 열사와 그의 가족들이 출석했던 교회나 시간을 보내곤 했던 대한수도원은 인간회복이라는 설립 정신을 바탕으로 노동을 신성하게 여기는 곳으로 체류하는 이들은 수도원의 각종 노동 봉사에 동참해야 했다. 

전태일 열사는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예배를 놓지 않으며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소임도 다했다. 또 자신의 몸을 불사르기로 결심하기까지 임마누엘수도원 예배당 건축 봉사에 5개월 동안 헌신하며 십자가에 달리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처절하게 울부짖었던 예수님처럼 기도했다. 1970년 8월 9일에 작성된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나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라는 전태일 열사의 유언장도 그즈음에 작성된 것이다.

수도원에서 머무는 와중에도 전태일 열사는 노동 현실에는 무관심한 한국교회의 민낯을 목격하게 된다. 수도원을 찾아온 목회자들에게 평화시장 노동문제를 상담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기도 생활에만 열중하는 것이 좋겠다”였다. 심지어 “아직 나이도 젊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 뭐 하려고 노동문제에 뛰어 들려고 해? 그런 일은 빨갱이들이나 하는 짓”이라며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치고 은혜 충만한 사람이 없으니 우선 기도생활이나 열심히 하는 것이 좋을 듯하네”라는 핀잔을 듣기까지 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참담한 노동 현실을 외면하는 한국교회를 질타했다. 전태일 열사는 이소선 여사에게 “목사님들은 교회 강단에서 교인들을 향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살아라”는 설교를 하시잖아요. 나는 정말 성경 말씀대로 실천하는 목사님들이 우리나라에 열 명 정도라도 있었으면 좋겠어요. 엄마도 그런 사람들처럼 그런 식으로 엉터리로 예수를 믿으려면 차라리 믿지 마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전태일 열사는 현실을 비관해서나 허무를 느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다. 그는 다른 유언에서도 “많은 목사님들이 내가 죽으면 분명히 내 죽음을 자살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리고 자살했으니 지옥에 갔다고 말할 거예요. 그렇지만 요한복음 15장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저는 평화시장의 친구들과 수만 명의 불쌍한 여공들을 위해서 죽은 것이니 주님의 말씀에 절대 어긋난 것이 아니에요”라고 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를 외치며 분신까지 불사한 청년노동자의 죽음에 한국교회의 반응은 크게 갈라졌다. 정권의 사주를 받아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애써 외면하며 유가족들을 회유하려고 했었던 이들도 있었던 반면, 그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도 있던 것이다. 

당시 전태일 열사가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목사는 목회자의 권위를 내세워 이소선 여사에게 평화시장 업주들이 내건 합의금을 받으라고 종용했다. 그 목사는 “집사님, 이 돈은 하나님이 주신 돈입니다. 모른 체하고 빨리 받아 넣으세요. 일단 장례식부터 치르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뜻입니다”라고 했다. 교계 지도자를 자처했던 한 목사도 “대한민국에서 근로자 한 사람이 죽었는데 이만한 액수의 위자료를 지급한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는 역사적인 일입니다. 이 돈이 엄청난 액수인 걸 진짜 모르십니까?”라며 자신은 목사니 평신도인 이소선 여사가 목사가 하는 말을 따라야 한다고 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손꼽히던 한경직 목사도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외면하긴 마찬가지였다. 한경직 목사는 전태일 열사의 장례를 부탁하러 온 오재식 박사 일행을 만나주지도 않았다. 이후 한경직 목사는 “그동안 우리 교회에서는 자살한 사람의 장례예배는 치른 적이 없었고, 장로교 원칙상 (장례를) 치를 수도 없고, 치러서도 안 됩니다. 이번에 꼭 전태일의 장례식을 교회에서 하고 싶다면 내가 알기로는 그 청년이 감리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하던데 그 교회에 가서 장례식을 치르는 것이 마땅한 원칙입네다”고 오재식 박사에게 말했다고 한다. 진보 기독교계를 대표하던 강원룡 목사도 전태일 열사의 분신항거의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 데모 협조를 요청하는 브라이덴슈타인 교수의 요청을 거절했다. <전태일 실록>에서 최종고 명예교수(서울대)는 당시를 회상하며 “브라이덴슈타인 교수가 새문안교회 강연을 마치고 청중들을 데리고 데모를 하겠다는 거예요. 강원룡 목사와 상의를 해보고 싶다고 해서 크리스챤아카데미하우스로 데리고 갔더니 강 목사가 냉정하게 거절을 하더라”며 “교회마저도 이론적으로 생각하는 사회정의의 보루가 못되는구나. 사회가 돌아가는 것은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아니라 이해관계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노동에 임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고통받는 동료 노동자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청년 전태일.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고 외쳤던 그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울리지만, 노동자들이 착취당하는 현실은 50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최 목사는 “전태일 당시나 지금이나 현장의 노동자들은 마치 죽어서야 증명이 되는 것처럼 이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어느 한 노동자가 현장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어야만 그제야 없던 문제가 발생하는 것처럼 한국교회나 이 세상은 그렇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며 “전태일 열사의 50주기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그동안 쌓아놓은 교리적 장벽을 허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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