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먼저 오해를 몇 가지 풀고 시작하고자 한다. 첫째, 기본소득 지지자로서 기본소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아마 그 특정 정치인은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말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이 지사가 언제부터 기본소득을 지지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내의 기본소득 지지는 단언컨대 이 지사와 상관이 없다. 나는 기본소득이 한국에 도입될 초창기였던 2008년에 ‘뭐 이런 신박한 아이디어가 다 있나?’라는 놀라움으로 이 개념을 접했고 그때부터 이 제도를 지지했다. 그리고 그 시절 나는 이재명 지사가 누군지 몰랐다.

둘째, 나는 기본소득이 이 시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기본소득당의 당원이 아니며, 그 당의 당명(黨名)을 지지하지 않는다.

물론 기본소득당이 추구하는 기본소득을 나는 지지한다. 하지만 정당이 추구해야 할 정치적 가치가 기본소득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내가 꿈꾸는 세상을 위한 도구일 뿐, 그것이 절대적인 가치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 정당의 이름이 기본소득당인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당의 이름은 그 정당의 핵심 가치인데, 그 가치는 기본소득을 넘어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민중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셋째, 나는 기본소득이 100%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 않다. 아둔한 머리로 살펴본 결과 기본소득이 훌륭한 제도이고,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나 스스로 믿을 뿐이다. 

넷째, 이 글은 기본소득의 내용에 관한 글이 아니다. 나에게 기본소득은 하나의 거대한 실험이다. 그리고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다. 이 길을 걸어보았는데 결과가 좋지 않다면 우리는 다시 돌아올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핵심 가치는 기본소득 그 자체가 아니라 민중들에게 더 나은 삶, 이 보다 실질적인 자유를 부여하는 것에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다만 문제는 우리에게 그 길을 걸어볼 용기가 과연 있느냐는 것이다. 여러 연구가 말한다. 이 길은 매우 혁신적이며, 우리에게는 충분히 도전할만한 여력이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단지 두려움 때문에 도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건 전혀 진보답지 않다. 진보의 핵심은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용기이기 때문이다. 

현상유지 편향

행동경제학에는 현상유지편향이라는 이론이 있다. 주류경제학은 인간이 이익과 손실에 매우 정확하게 반응하는 존재(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익과 손실을 정확히 계산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선택이 이익인지 손해인지 확실치 않을 때에는 그냥 그 선택을 하지 않는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이런 성향이 나타나는 이유는  위협을 기회보다 더 절박하다고 보는 생물이 생존할 확률이 더 높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사바나의 연약한 동물이었던 인류는 어떻게든 포식자들 사이에서 생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늘 물을 마시던 곳에서 물을 마시고, 늘 과일을 따던 곳에서 과일을 따는 것이다. 

만약 무리 중 누군가가 “우리 저쪽 산 너머로 한 번 가보자. 거기에는 물이 더 맑고, 과일도 더 달콤할지 몰라”라고 제안하면 부족원 대부분은 이 제안에 단호히 반대한다. 왜냐? 지금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물론 산 너머가 더 살기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그곳이 사자의 영역일 수도 있다. 위험과 기회가 공존할 때, 인류는 위험을 피하는 선택을 한다. 그래야 연약한 동물인 인류가 생존 확률을 더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강아지도 자기 집 앞마당에서 싸우면 절반은 이기고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나는 조상들의 뛰어난 관찰력에 놀랄 때가 매우 많은데, 이 속담은 현상유지편향의 진화생물학적 의미를 그야말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실제로 강아지가 자기 집 앞에서 싸우면 평소보다 훨씬 강해진다. 왜냐? 자기 집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보금자리를 지키는 것은 동물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다. 반면 남의 집을 침공한 강아지는 자기 집을 지키는 강아지에 비해 절박하지 않다. 이기면 새 영역을 얻어서 기쁘긴 한데, 그렇다고 그 기쁨을 위해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다.

만약 둘의 전력이 비슷하다면 이 싸움은 하나마나다. 절박한 쪽이 그렇지 않은 쪽에 비해 훨씬 강한 전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앨콕(John Alcock) 같은 행동생태학자는 “어떤 영역을 점령한 동물이 경쟁자의 도전을 받으면, 거의 항상 주인이 이긴다. 그것도 대게 몇 초 안에 이긴다”라는 유명한 정리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이것도 현상유지편향의 일종이다. 도전하는 자는 최선을 다하지 않지만, 현상을 지키려는 자는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보수의 유혹을 넘어 용기 있는 진보가 되자

그래서 현상유지편향은 인류의 진보에 매우 큰 걸림돌이 돼왔다. 진보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끊임없이 현실을 바꾸는 사상이다. 그런데 인류의 본성에는 그런 변화보다 ‘지금 이대로가 더 좋아’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만의 꿈을 좇으려 하다가도 ‘그러다가 굶어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변화를 막는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함께 싸웁시다”라고 권해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이 바뀌면 지금 내가 가진 것을 잃지 않을까?’라고 두려워한다. “누구나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복지국가를 위해 세금을 더 내야 합니다”라고 말해도 “내가 세금을 왜 더 내야 해? 그냥 지금처럼 살던 대로 살아!”라는 반발이 나온다. 세금을 더 내고 복지혜택을 더 받는 것이 대부분의 민중에게 훨씬 이익인데도, 사람들은 이익과 손실을 정확히 계산하지 않은 채 ‘그냥 살던 대로 살아!’라며 현상 유지를 택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내 살아생전에 기본소득이 인류 역사에서, 특히 한국 사회에서 이처럼 자주 화두로 거론되는 날이 올 줄 정말 몰랐다. 왜냐하면, 이 제도는 너무나 거대한 변화여서 사람들이 이 제도를 절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특히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보편복지의 가치와 장점에 대한 연구도 그 어느 때보다 풍부하다. 국민적 공감대도 높다.
 그렇다면 이 길을 한 번 걸어볼 만하지 않은가? 무작정 국운을 걸고 기본소득에 올인하자고 충동질하는 게 아니다. 작은 규모의 다양한 실험부터 시작하면 된다. 지난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던 전국민 재난지원금이 좋은 사례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다양한 실험으로 예상되는 부작용을 미리 발견하고, 장점은 더 부각시키는 연구를 시작하자는 것이다. 

“실패하면 어떡해?”라는 두려움은 보수의 가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한번 해보자고!”라는 용기가 바로 진보의 가치다. 우리는 평생 우리 집 앞마당만 지키는 강아지로 살아서는 안 된다. 인류는 이 두려움을 뚫고 도전하고, 이동하고, 개척하면서 역사를 진보시켜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상유지편향이 아니라, 두려움 없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도전하는 용맹스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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