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민TV 출연한 김승연 교수 인터뷰

김승연 전 홍익대 교수 기자회견 (사진 연합뉴스)

 

[평화나무 김용민브리핑 2021.03.22]

박형준 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의 '딸 입시비리' 의혹이 폭로가 터져나오자, 국민의힘은 공익 제보자인 김승연 전 홍익대 교수의 기억력을 문제삼았다. 

김소정 국민의힘 부산 선대위 대변인은 22일 성명서에서 "김 전 교수는 어렸을 때 죽을 고비를 다섯 번이나 넘기면서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에 걸렸다고도 알려졌다"며 "정권 나팔수들은 김 전 교수의 말을 철저한 검증도 없이 이리저리 퍼나르며 박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 정치공작에 여념이 없다"고 비판했다. 김 전 교수가 과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한 회고를 악용한 것. 

그러나 김승연 교수는 22일 김용민브리핑에 출연해 자신의 기억력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과시했다. 아울러 입시는 무엇보다 공정해야 하며, 박형준 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자와 관련한 의혹들을 철저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형준 국민의힘 후보는 김승연 전 홍익대 교수 등에 5억원 민사소송을 제기했다고 23일 밝혔다.

김승연 교수가 22일 김용민브리핑에 출연 중이다. (출처 = 김용민TV )

 


김용민(진행자) : 김승연 홍익대 교수, 스튜디오에 들러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교수님, 오늘 보도를 통해 접하셨겠지만 김소정 국민의힘 부산 선대위 대변인이 ‘교수님께서 어렸을 때 죽을 고비를 5번이나 넘기면서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에 걸렸다고도 알려졌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수님의 이런 공익제보 폭로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 같은데 이 말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 자체가 참 민망합니다만, 수준 낮은 정치공세인데 이게 뭐라고 느끼셨어요. 

김승연 교수 : 제가 사실 여기 오기 전에 잘 아는 기자가 저한테 이렇게 해줬어요. 읽어보니까. 이거 웃어야 될지. 저희 노모가 지금 94세이신데요, 노모가 가끔 그런 말을 하셨어요. 5번 죽을 고비를 맞았다. 그 얘기인 즉슨, 제가 태어나자마자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그다음에 돌 때도 죽을 고비가 있었대요. 그래서 저희 집에 제가 돌 사진이 있는데 임금님 수라상같이 엄청나게 (차렸어요.) 제가 (오래) 못 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랬대요. 그리고 제가 병을 달고 살았어요. 굉장히 몸도 약하고 육체적으로 굉장히 힘들었어요. 학교생활도 참 힘들게 했어요. 대학 들어가기 전 19살 때 지병이 재발해서 종양 비슷한 걸로 혼수상태도 가고 서울대학병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어요 사실이에요. 조금 전에 기사 읽으면서 그 기억이 또 나더라고요. 제가 그때 방사선 치료를 받았어요. 기억상실증 때문에 고생을 했죠. 굉장히 고생하고 투약하고 기억상실증이라는 게 자기 인생의 송두리째 전부 없어지는 거거든요. 그거 회복하고 기억이 이제 살아나기 시작하고 부분적으로도 기억도 안 나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 다음에 극복이죠. 의지를 극복하고 투약하고 그 병과 싸우느라고 참 힘들었죠. 국민의힘 부산 선대위 대변인이 쓴걸 보고 제가 웃지 않을 수가 없는 게 누구나옛날에는 의료시설도 취약하고 약도 없어가지고 죽을 고비 넘긴 사람들은 많아요 그거 다 극복하고 저도 오늘이 있는 거예요. 제가 만 65세인데 지금까지 제가 잘 극복하고 사는... 저는 제가  국민의 힘 쪽이라면요, 남의 단점을 이걸 단점화시켜서 지금 그 박형준 패밀리의 그 입시 부정 사실을 이걸로 덮으려고 그러니까, 이건 물타기도 아니고. 남이 단점을 딛고 일어선 걸 높이 사 줘야 되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김용민 : 이건 인식 공격이고. 아니 이번 사건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 열린공감TV의 취재진들이 ‘교수님의 기억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억력이다’ 이렇게 평가를 하더라고요.

김승연 교수 : 제가 기억상실증 극복하면서 관련 책을 많이 읽었어요. 의사 선생님 만나서 기억상실증에 대해서 의학 공부도 많이 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억을 되찾기 시작하면서 더 기억이 또렷해진다는 의학적 의견도 있고 그렇습니다. 

김용민 : 교수님 노력도 많이 하셨고요. 아니 그런데 사실은 10년 전 일이고 과거에 그런 고통을 겪으셨다고 ‘그 사건을 이상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 같은데 교수님은 그때 기억이 아주 또렷하신 거 아니에요. 한마디로. 

김승연 교수 : 옛날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제가 교수 임용될 때 어떤 교수분이 제 기억을 문제 삼았어요. 그래서 제가 서울대학병원 제 주치의를 찾아가서 제 의료기록과 소견서를 좀 써달라고 했더니, 그건 왜 필요하냐고 물으세요. 그래서 제가 그 내용을 얘기했더니 '그건 의학계에 보고해 혼을 내줘야 되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필요합니다'라고 했더니 간호사를 시켜서 찾아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불이 나서 기록이 불타버렸대요. 근데 지하실에서 마이크로 필름을 찾아서 소견서를 (학교에) 낸 적이 있어요. 제가 그 기억이 나더라고요. 

김용민 : 대단한 기억력이십니다. 

김승연 교수 : 옛날에 아팠다고 그걸 극복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다시 새 삶 찾은 분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래서 나는 국민의힘 선대위원회에서 이렇게 쓰면 안 돼요. 이런 걸 외치려면 ‘옛날에도 그런 적도 있는데 혹시 그것 때문에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닌가’, 그 정도면 제가 오케이 본인이 주장할 수 있으니까 그 정도는 제가 넘어갈 수 있는데 이거는 좀 심한 것 같아요. 저는 기사를 쭉 읽어보니까 이 대변인분이 이 문장을 잘 못 쓴 것 같아요. 그리고 옛날에 제가 그 입시부정 사건 때 10년 전에 나왔던 기사를 캡처해서 썼어요. 그걸 빙자해서 제 기억력을 호도하는 거죠. 

김용민 : 교수님. 오늘 아침 방송 나가셔가지고 당시에 그 박형준 씨 부인 복장까지 기억을 하셨는데, 그런데 보니까 박형준 씨 딸의 기억력은 좀 문제가 많은 것 같아요. 

김승연 교수 : 생각을 해보세요. 입학시험 본 거 잊어먹으세요? 연세있는 분들에게도 옛날에 입학시험 어디를 봤냐고 물으면 ‘내가 옛날에 어디를 봐서 고문을 내가 몰라가지고 틀려가지고 떨어졌다 그래서 2차를 어디 갔는데 2차도 떨어져서 내가 어디서 재수해서 또 시험을’그거 다 얘기하죠. 저도 1975년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시험 쳤다 떨어졌어요. 태릉에 있을 때 버스 내려서 논두렁길 따라서 가야 돼요. 그 길 그 기억도 나요. 그 가운데 매점에그 벌판에 거기서 점심 도시락 먹고 또 오후 시험 보고 다 기억합니다. 그리고 참 재미있는 게요, 그 당시 시험 문제 출제가 뭐가 나왔는지도 기억이 나요. 당연하죠. 제 수험 번호가 25번이었어요. 합격자 발표를 밖에 붙이잖아요. 쭉 붙이는데 1번부터 24번까지 없더라고요. 내 앞번호가 붙고 내부터(내 뒤로) 또 없어. 그때 20대 1이 넘을 때니까. 그때도 다 기억해요. 필기시험볼 때 앞에서 시험보던 여학생도 생각나요. 그분도 나를 기억하더라고요. 사람이 기억력이라는 게 무심할 때 없어지는 거지 신경 쓰면 다 기억이 나요. 제가 남들보다 특출하다고는 생각을 않해요. 그렇지만 어느 순간순간 그 팩트에 대해서 생각하면 떠오르죠.‘아, 그 사람에게 당신 무슨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 거예요 사람이. 

김용민 : 그런데 지금 계속 이야기가 달라지고 있다고 얘기하고 있는데

김승연 교수 : 네네. 제가 이제 뭐 경향신문 강지구 기자님이 그쪽에다가 전화도 하고. 처음에 이게 코미디가 아니에요. ‘홍대 근처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그다음에 어렸을 때 갔기 때문에 2005년도까지 한국에 있은 적이 없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출입국 기록 동사무소에 신청하면 바로 나와요. 

김용민 : 바로 나오죠. 

김승연 교수 : 그거 본인이 확인해서 보여주면 될 거 아니에요. 그 다음에는 ‘홍대 근처에 친구들하고 놀러 간 적은 있지만 시험은 안 봤다’ 2005년도까지 입국한 적이 없다고 그러더니 그렇게 말이 바뀌었습니다. 

김용민 : 아 그러네요. 

김승연 교수 : 그렇죠. 그때부터 제가 학교에 확인하자고 얘기를 계속했어요. 그랬더니 말이 또 어떻게 바뀌냐. ‘시험유무는 중요하지 않고 청탁은 안 했다’

김용민 : 그러면 시험은 봤다는 얘기 아닙니까. 

김승연 교수 : 그렇죠. 그거 간접적으로 본인이 시인한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 시험 본 딸 기억이, 여러 개의 대학을 또 (시험을) 봤다는 얘기가 있어요. 그러면 2005년도까지 (한국에) 안 들어왔다는 거는 이미 거짓으로 자인한 거 아니에요.

김용민 : 계속 말이 바뀌니까. 

김승연 교수 : 홍대를 봤는지 안 봤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제가 얼마나 화가 나면 ktx 타고 아침에 내려가서... 

김용민 : 부산에 가셨어요.

김승연 교수 : 네. 나와라. 박형준! 또 패밀리! 전부 나와서 (시시비비를 가려보자) 그리고 조현 씨하고 저하고는 1996년도 개인전을...

김용민 : 조현 씨는 박형준 후보 부인이죠. 

김승연 교수 : 네네. 그 그때 갤러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그때는 광안리에 아트타운인가, 그 건물 소유주로 알고 있어요. 그 빌딩. 거기서 갤러리를 하고. 거기에 그때 우리 대선배이신, 그 부산여대에 계신 분인가, 허 작가님. 대선배시죠. 그분 작업실이 그 윗층인가 그랬어요. 제가 96년도 것도 기억합니다. 그래서 그 대선배님이 저한테 저녁도 사주셨어 같이. 

김용민 : 무슨 메뉴였는지 기억나십니까? 

김승연 교수 : 뭐 부산 뻔하죠. 

김용민 : 회?

김승연 교수 : 그렇죠. 그 뒤에 광안리 뒤쪽으로 어디 가서 회를 먹고 저한테 야단을 많이 치셨어. 우리 그 대선배님이. 그 대선배님이 모교가 좀 불만이셨나봐요. 모교의 그 교수진들도 본인 성에 안 차고, 나는 부산에 있지만 모교가 잘 돼야 되는데 이 모교가 지금 엉망이라고 막 성토를 하시고 저한테 그러셨어요. 많이 후배니까. ‘너 이놈아. 너는 잘해야 돼’라고 해서 내가 그랬죠. ‘네 선배가. 잘 알겠습니다’ 그때부터 조현 씨하고는 굉장히 잘 아는 사이예요. 그리고 그때는 조현 씨가 부산에 화랑을 낸 지 얼마 안 됐고 부산의 오래된 화랑들이 있어요. 그건 그 베테랑이죠. 재력을 떠나서 사회문화적 역할을 해온 부산의 고참 화랑들이 있을 때죠. 거기 비하면 이건 뭐 신생이고 단지 남의 건물에 세 들지 않고 자기 건물에서 넉넉하게 하고 있다 그 정도지. 그분이 그때 뭐 화랑주로서..그때 화랑 협회 사람들은 잘 모를 때예요. 이분이 화랑주로서 명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잘알려진 것도 아니고 전국의 큰 화랑들과 교류도 없을 때니까. 그리고 저를 미국에서 불러주신, 그때 학장이었던 우리 은사님하고 전시나 작품 거래 이런걸로... 그때 여기랑 작품 거래하는 작가들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가까워서 저도 소개를 받았고 전시를 했기 때문에 그 사장은 잘 알죠. 그리고 이분이 전시 기간 동안에 저희 노모가 광안리에 계셨어요. 우리 형님 부산지점장 발령나서. 그래서 제가 내려간 김에 그때가 방학때인가 그럴거예요. 제가 거기 좀 오래 있었죠

김용민 : 박형준 후보하고 재혼한 거 아닙니까. 조현 씨가. 언제 재혼했는지는...

김승연 교수 : 제가 만났을 적에는 조현 씨는 전 남편이 있었고, 저는 자식 관계는 모르죠. 본 적이 없으니까. 제가 그 딸의 존재를 안 거는 시험 볼 때 알았지. 

김용민 : (조현 씨는) 99년에 재혼한 걸로 되어있네요. 96년에는 전남편하고 살던 때였고.

김승연 교수 : 그렇죠. 그 전남편분이 뭐. 글쎄요, 제가 96년도에 박형준 씨도 처음 봤어요. 그때 두 분이 따로 가정이 다 있고 그럴 때니까 저는 그냥 한 번 어떻게 봤던 기억. 그거는 제가 신경을 안 썼어요. 

김용민 : 아 그렇군요. 아니 가정사와 관련해서까지 여쭤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얼마 전에 박형준 후보가 ‘아내의 딸, 아내의 아들’ 이런 표현을 써가면서 뭔가 현재 가족의 문제 의혹으로 밖에서 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내의 딸 아내의 아들’ 이런 표현을 썼는데... 

김승연 교수 : 두 분의 관계에 대해서는 부산이 별로 큰 지역도 아니잖아요. 

김용민 : 뭐 아시는 게 있나요?

김승연 교수 : 특히 화가들 사이에는 많이 알려져 있고 저도 많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거다, 어떤 사람은 ‘큰 흠이다’라고 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경도 안 썼어요. 

김용민 : (박형준 후보의) 따님이 미대 시험을 치를 때가 몇 년도였죠? 

김승연 교수 : 2000년 전후 같아요. 

김용민 : 얼마 안 됐네요. 99년인가 재혼을 했으니까. 

김승연 교수 : 네 그렇죠. 

김용민 : 근데 그때 ‘쌤, 우리 딸 꼭 붙여 주이소’ 이렇게 울면서 부탁을 했다...

김승연 교수 : 그분 목소리가 귀에 생생해요. 그분 목소리가 진한 부산 사투리거든요. 

김용민 : 그래서 ‘꼭 붙여 주이소’라고 하셨을 때 뭐라고 하셨어요. 

김승연 교수 :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죠. 그 분이 저한테 청탁한 건 아니니까.

김용민 : 이 모 교수한테 청탁했다면서요? 

김승연 교수 : 그렇죠. 제가 개인적으로 청탁받은 건 없어요. 조현 씨하고 딸이 나한테 직접 청탁을 했다 하는 얘기는 제가 꿈에도 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지시를 받은 거죠. 대선배의 지시. 제가 심리적으로 거절하기 참 힘든 거예요. 

김용민 : 어떤 지시를 뿌리치기 쉽지 않은 위치였고. 

김승연 교수 : 그렇죠. 그렇지만 만약에 선배님이 개입이 안 되고 저한테 직접 청탁을 했다면 제가 ‘제가 살피겠습니다’ 그리곤 제가 점수를 안 줘요. 제가 개인적으로 대학원 시험 이럴 때 부모들이 찾아와서 청탁도 하고 그래요. 그러는 순간...

김용민 : 그렇게 청탁하는 순간 불합격되는 거군요. 

김승연 교수 : 일생을 (부모)찬스만 쓰는 사람도 있고, 입시 정도는 공명정대하게 해야 하고. 

김용민 : '쌤, 우리 딸 꼭 붙여주이소' 이 발언을 저 같은 사람이 접하면 ‘참 몹쓸 짓 했네’ 이런 생각이 들지만, 홍대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에게는 정말 큰 좌절감을 주지 않았겠는가. '아니 여기는 명문대고 또 미대에 있어서는 한국에서 최고 학부로 통하는 곳인데 여기서도 이런 청탁이 가능했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을 갖고 또 절망감을 갖게 되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고요. 교수님도 만연한 부정 입시가 있어서 내부 고발을 하셨던 거 아닙니까. 현직이 계실 때.

김승연 교수 : 제가 사실 갈등이 많았어요. 언제부터는 제가 지시를 안 받아요. 그니까는 제가 컴퓨터 추첨으로 채점 인원인데, 내일 새벽에 실기 보면 새벽에 대기했다 쉬고 채점을 해야 되잖아요. 그 당시 교무처장 하시던 분이 교무처에서 내일 채점위원을 추첨해서 정해놓고 갑니다. 집에... 그러면 새벽에 와서 새벽에 전화를 해요. 시험 시작할때쯤 전화를 해요. 그래야 서로 컨택이 안 되니까. 그런데 아침에 와서 보니까 제 이름이 없더라는 겁니다. 

김용민 : 아니 분명히 선생님 이름이 있었는데.

김승연 교수 : 저랑 잘 아는 그 공대 좋은 처장님이시고 저보다 연배가 서너살 위고 친해요. 그분이 내 이름이 나온 걸 분명히 봤는데...

김용민 : 교수님도 보셨고?

김승연 교수 : 아니요. 저는 모르죠. 아침에 연락하려고 명단을 딱 보니까 제 이름이 없어졌대요. 그래서 그 명단 조작한, 뭐 제가 고발한 사람 중에 하나죠. 막 질타하고. 그게 이제 입시부정 사건 터졌을 때 저한테 그 내용을 얘기해 주셔서 저도 늦게 알았죠. 

김용민 : 그래서 검찰이 수사에 들어갔는데 그냥 무혐의가 됐단 말이죠. 

김승연 교수 : 사실은 제가 다른 인터뷰 때 얘기 못한 큰 의혹이 하나 있어요.

김용민 : 뭡니까 교수님. 

김승연 교수 : 제가 2008년도 입시를 중심으로 해서 과거 5년치를 고발했잖아요. 2001년전 것, 2007년도에 아주 명확한 것 두 점, 그건 개인이 한 거예요. 어느 교수가. 그다음에 2008년도 같이 짜고 한 거, 그다음에 2004년도 되는데 조사하면서 검사가 저한테 그랬어요. '이거 처음 것은 우선 구속감이네.'

김용민 : 아, 검사도?

김승연 교수 : 그러니까 제가 적시를 했어요. 가번호 5번 7번을 K모 교수가 혼자서 했다. 같이 채점도 안했던 그날, 그런 날은 제가 묘하게 빠지는 거죠.

김용민 : 작전이 펼쳐져야 되는 날에는...

김승연 교수 : 제 예감이 그래요. 그전에도 학교 조사위원회에서는 ‘아니 김승연 교수가 이거 채점을 안했는데 이날을 어떻게 아느냐’ 고 해서 ‘같이 채점한 교수가 나한테 얘기했다’고 했다. 그러니 ‘그걸 갖고 어떻게 신빙성이 있다고 하느냐’고 해서 나는 그 교수가 두 번을 컨펌해 줬기 때문에... 그렇죠. 입시부정을 어떻게 했고 그다음에 합격자 발표날 때 붙었다는 것도 얘기할 때 간접적으로 알아서 저한테... 제가 지금 생각하면 저한테 소스를 던져준 건가 그런 생각도 해요. 그래서 제가 교수 말에 제가 신빙성을 갖고 저도 베팅을 한 거죠. '이거 확인하세요. 내가 붙었다 확신합니다'라고 했더니 '믿을 수 없대요, 채점도 안 한 사람이...'
그래서 '내가 이거 합격이 안 됐으면 내가 내부 고발을 철수하고 내가 학교의 처벌을 받겠다'고 했어요. '내가 학교 나갈 수도 있다'고 그랬어요. 내가 자신했거든요. 

김용민 : 운명을 거셨군요 한마디로.

김승연 교수 : 내가 고발하기 딱 1년 전 물증이 나왔잖아요. 그거를 더이상 조사 안 한 게 저는 미스터리예요. 학부형과 학생들이 나왔잖아요. 입학원서에 학부모 관계 있잖아요. 그걸 왜 검찰에서 조사를 안 했을까. 이 교수한테도 면죄부를 줬을까, 그게 미스테리예요. 그래서 이건 추측하는 거예요. 혹시 검찰이나 법조계에 누가 있지 않나하는 의혹을 갖는 거예요.

김용민 : 그 뒷배가. 

김승연 교수 : 그건 모르죠. 내가 이런 의심을 하는 이유는 당시 부처장으로 있던 법대 교수가 단독으로 그 두 작품을 들고 서부지검의 담당 검사한테 가서 ‘이거 입시부정으로 (고발)됐는데 잘 그린 그림이다. 이것 좀 봐달라’ 검사 말이 구걸하러 왔었답니다. 검사가 얘기하니까 내가 알죠. 부처장인가 법대 교수가 와 가지고 '이거 잘 그린 그림이다' 

김용민 : 그때도 박형준 딸 건이 조사되고 있었던 건가요?

김승연 교수 : 아니에요, 그때 제가 내부 고발할 때는 제가 우리 이사장님을 설득했어요. 우리학교 망한다. 우리 학교 캐치프레이즈가 ‘맑고 깨끗한 대학’이에요. 이 캐치프레이즈가 무색한 거라고 해서 이사장이 동의해서 (고발)했지만, 참 제가 이걸 고발할 적에는 이사장께 '5년치만 고발하겠습니다' 

김용민 : 그런데 청와대에서 누군가 이거를 말았다. 그런데 막은 사람이 박형준으로 추정 된다. 이렇게...

김승연 교수 : 왜냐하면 그 사람이 정무수석이니까. 청와대 고위층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검경의 제일 컨트롤할 수 있고 가까운 쪽은 정무수석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이 사건이 종결이 되고 제가 청와대에 따졌으니까. 중간중간에 청와대 관련한 제보들이 있어요. 그때 내가 박형준이가 정무수석이라는 걸 처음 알았어요. 사실은 그때 메이저 언론사가 그 제보를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왜 이거 안 터뜨리냐’고 그랬더니 ‘이 정권에서 우리는 할 수 없다’

김용민 : 이명박 정권에서는... 

김승연 교수 : 그렇죠. 대한민국 톱 언론사가 저한테 던져요. 기자 보내 가지고 교수님이 언론사에 직접 찾아와서 이거 터뜨린 걸로 하면 1면 톱기사로 내겠대요. 뭐 이런 게 언론이냐. 내가 그랬어요. ‘거꾸로 너희가 터뜨리면 내가..."

김용민 : (교수님께서 증언으로) 뒷받침해 주겠다

김승연 교수 : 그럼. (언론사에서는) '우리는 먼저 못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제가 하고(폭로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 자문이었던 구 변호사님이 ’언론사 트릭이다. 하지마라‘라고 해서 안 했어요. 그리곤 MBC나 여러 언론사에 입질을 했어요. 그런데 못해요. 정권 눈치보면 못하는 거예요.

김용민 : 그런 시대였어요. 

김승연 교수 : 사실 지금은. 지금 언론들이 얼마나 자유로운 시대예요. 옛날에 우리 군사 정권이나 박정희나 전두환이나 그 정권 때 보면 언론들이 숨도 못 쉬었잖아요. 

김용민 : 그렇습니다. 교수님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쭙고 마무리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최근에 박형준 씨의 엘시티 소유를 두고도 논란이 많습니다. 해명이 사실과 너무 달라서 듣기조차 민망하던데, 딸도 여기 또 거론이 됩니다.

김승연 교수 : 저도 부산에 갔다 와서 봤어요. 엘시티 조형물 있죠. 미슬 조형물 그것도 보고. 저는 개인적으로 사실 기겁을 했어요. 

김용민 : 기겁을 하셨어요? 

김승연 교수 : 그렇죠. 일단 주변 경관과 엘시티 건물 외벽 디자인이 전혀 안 어울려요. 제 시각으로는 전혀 안 어울리고 일단은. 그다음에 공간 조형이 없어 보여요. 이게 외국 작가 거래요. 그런데 그걸 조현화랑에서 제작한 거더라고요. 

김용민 : 조현, 박형준 씨 부인이. 

김승연 교수 : 부산 지역 철물하는 사람들 데려다 도면 놓고 했겠지요. 그 작가는 스페인 작가래요. 스페인 작가가 와서 작업한 느낌이 하나도 없어요. 엘시티 같은 경우도 왜 거짓말을 했을까. ’그냥 나 여기 살아요‘ 그러면 되잖아요. 

김용민 : 그렇죠.

김승연 교수 : 우리 국회의원분들 중에도 재벌급들 있잖아요. 그냥 다 공개 하잖아요. 원래 대대로 부자도 있고 그걸 왜 감췄나 저는 그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저걸 감춰야만 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저도 중앙지검특수부에서 사찰을 했어요. 수사 중에, 조사 중에 죄송하다고 그래요. 저는 그것도 밝히라고 하고 있어요. 이거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건데 우리가 할 수 없이 윗선의 지시로 했대요. 그리고 고백하고 '우리가 교수님 집 몇 년도에 얼마에 주고 사고 그 자금 어떻게 되고 우리가 다 알아요. 교수님은 문제없다'

김용민 : 깨끗하다. 

김승연 교수 : 조사하면서 그런데 다른 사람들 부동산 몇채씩 있고, 그 집안의 자금 흐름이 언제 어떤 때 움직였는지까지 다 알더라고요. 구입 자금을 언제부터 만들어서 이 자금 출처가 명확하냐 그걸 따져야죠. 그리고 그 조형물이 제가 보기에는 가당치조 않아요. 그 큰 조형물을 왜 그 화랑이 땄을까. 부산에 화랑도 많고 좋은 작가도 많아요. 부산에 특히 좋은 조각가 많습니다. 부산 조각가뿐만 아니라 마산에도 있고. 부산, 마산 그쪽에는 우리 역사적으로 좋은 현대 조작가들이 많아요. 그런데 왜 그걸 거기서만 땄을까 그래서 나는 엘시티 발주한 곳과 책임자가 누군지, 다 조사해야죠. 

김용민 : 그쪽에서 또 새로운 뭔가 진실의 돌파구가 있을 것이다, 그런 말씀이네요. 

김승연 교수 : 그걸 누가 심의했고. 심의위원들 검찰에서 진술서 받으면 다 나오죠. 어떻게 심의했고 심의 과정에 혹시 로비가 있었는지. 

김용민 : 그렇죠. 

김승연 교수 : 스페인으로 그 작가 계좌로 얼마를 보냈는지 조사하면 나오죠. 그러면 그 조형물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움직였는지 다 나옵니다. 그다음에 공사했던 사람들 다 불러다 조사해야죠. 재료비, 인건비 그리고 그 사람이 왔다 갔다면 부산 공항 출입국 기록이라도 찾아 내면 다 나오죠. 

김용민 : 그 스페인 그 사람이요?

김승연 교수 : 나는 박형준 씨하고 결혼하고 나서부터 이게 갑자기 엄청 커지는 거예요. 정치인들 부인은 화랑 내는걸 참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줄 서요. 이유 없이 놀러왔다 그러고. 저 같으면 우리 아내가 화랑을 하고 있다? 그러면 문 닫아요. 나 (정치)할 동안에. 

김용민 : 정말 부르는 게 값이니까 그걸 통해서 로비 통로로 활용할 수도 있고. 

김승연 교수 : 증언들 보면, 재벌 회장님이 원래 일반화랑 안 다녀요. 그 회장님 부인은. 자기는 미술관도 있고 다 있는데. 부르죠. 그런데 거기 직접 가고. 저는 그때 들어서 뭐 집으로 식사...오 마이 갓. 그럼 혼자만 가요? 그런 정황들을 보면 저는 부산 전체의 조형물 프로젝트를 전수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용민 : 오늘 열린공감TV에서 밤 9시에 국회 뒷마당에 박형준 씨가 국회 사무총장할 때 국회 뒷마당에 이상한 조형물이 있다는 거예요. 그게 만들어졌다는 건데. 교수님 좀 아시는 게 있으세요?

김승연 교수 : 아니 저도 본 거예요. 작가마다 보여지는 공간조형이나 예술성이 다 다르잖아요. 그 작가는 참 좋은 작가야. 근데 국회의사당에 그 과일더미가 왜 올라갔냐, 국립공원이나 어린이 공원 이런 데 어울리는 거죠. 국회의사당에는 좀 더 묵직하고 정적이고 그런 것들이 (들어가야죠.) 작가는 좋은 작가죠.

김용민 : 알겠습니다. 그 부분도 오늘 열린 공간 분리해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교수님, 너무 짧은 시간인데 이렇게 소상한 말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김승연 교수 : 오늘은 사실은 제가 다른 데서 인터뷰 안 한 내용들이 많았어요. 제가 이 머릿속을 정리하자면 너댓 시간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용민 : 알겠습니다. 언제 한번 기회를 마련해서 교수님의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듣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김승연 교수 : 정말 좋으세요. 상대방한테 물어보실 때 부담이 없이 물어보셔. 그것도 참 중요하지. 어떤 분은 송곳같이 오는데, 죄송합니다. 동네 아저씨가 얘기 하듯이...

김용민 : 고맙습니다. 교수님 정말 외로운 길을 걸어오셨고요.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 참 많은 고통과 고난을 감수하셨는데 교수님의 이런 어떤 노력이 우리 미술계의 정화와  혁신의 큰 어떤 주축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승연 교수 : 저는 외롭다고 생각해본 적 한 번도 없어요. 남들이 그렇게 걱정하는데 뭐 왕따냐. 저는 제가 그런 그룹들을 왕따하고 살았기 때문에 외롭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김용민 : 알겠습니다. 그들을 왕따시키고 오신 김승연 교수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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