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근 프리랜서 기자 
정상근 프리랜서 기자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에서 국민들이 느끼는 복합적 감정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감정을 하나 꼽아보자면, 아마 ‘상실감’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 누구나 꿈꾸는 공기업에 들어가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따뜻하게 일하는 자들이, 월급만 따박따박 받아먹어도 평생 노후 걱정 없이 살 것들이. 자기들끼리만 정보를 공유하고, 자기들끼리 투기해서, 자기들끼리 해 먹었다는 것.

 

이런 세상에서 나는 대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가. 아침 6시에 나가 밤 12시에 들어오며 밤낮없이 일을 해대도 사무실 안에서 쏙닥이는 정보 하나에 내 연봉에 수십, 수백배에 이르는 돈을 벌어댈 수 있다는 것. 나랏일 하는 사람들이 이 모양인데, 내가 누굴 믿고 살아야 하나,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뭐하나. 상실감이 들지 않는 편이 더 이상할 것이다.

이 국민적 공분 앞에, 언론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보도했다. 새로 발견된 금광처럼, 기자들 앞에 별천지가 열렸다. 등기부등본 하나에 기사 한 건, 취재도 용이하다. 게다가 이런 국민적 분노를 등에 업고 취재하고 기사를 쓰고 있으니, 그 기사 한 건 쓸 때 마다 좋아요가 달라붙고, 댓글이 주렁주렁하다. 모처럼 기자 일을 하면서, 오늘 내가 사회정의를 세우고 말았다는 자부심이 든다.

필요한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다. 언론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모처럼 찾아온 ‘언론의 시간’ 앞에, 국민들은 모처럼 뉴스를 소비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위기가 기회이듯, 기회는 또 다른 위기다. ‘언론의 시간’을 맞은 언론이 여기저기서 단독, 특종이라는 폭죽을 터트리고 있지만, 마음 한 켠에선 언론이 그들을 비판할 자격이 있나 돌아보게 된다. LH 사건은 과연 남의 이야기인가. 이 사건이 언론사, 혹은 기자 개개인에게 어떤 경고를 보내고 있는가. 이걸 고민하지 않으면 지금 언론이 신나서 쏘아대는 이 화살이 언제 언론의 등을 파고들지 모른다.

LH 사태는 공직자 윤리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에, 더 큰 배신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대중은 기자에게도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막대한 윤리의식을 요구하고 있다. 기자들이 입만 열면 국민을 대신해 질문한다고 하는 만큼, 그 국민을 대신할 자격만큼의 윤리의식이 있는지,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품고 있고 또 기대도 갖고 있다.

그런데 언론이, 기자가 그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윤리 의식을 충족하고 있는가. 언론과 기자는 이해충돌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울까. 우리 사회 곳곳에 윤리 의식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언론과 기자들이 분명 있지만, 많은 기자들은 이 물음에 시원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을까?

작은 이야기부터 해보자. 부동산 이해관계로부터 기자들은 자유로울까, 대한민국 기자들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기자들이 가지고 있는 아파트와 땅의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기사를 쓸 수 있을까? 주식이나 가상화폐 같은 것은 어떨까?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한 기자들이 없을까? 이 사람들이 삼성전자의 주가가 떨어질 수 있는 기사를 쓸 수 있을까?

인간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고, 자본주의는 투자든 투기든, 법적 테두리 안에서 벌어지는 자산 증식 행위를 용인하고 있다. 하지만, ‘정책’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공직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에 얽힐 수 있는 행위를 해서는 안된다면, 그 정책을 알리고 비판해야 하는 기자들,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이 되야 한다는 기자들은 이해관계에 얽혀도 괜찮은가? 아니 자신의 이해관계가 기사에 반영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을까?

언론의 시간을 맞아 수많은 언론은 LH 직원들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비판하고 공직자들의 재산 증식을 경멸하고 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비판의 대상이 언론사와 언론인들의 이해관계가 됐을 때, 그때도 기사를 쓸 수 있냐는 의미다.

공직자들의 투기에 엄벌을 촉구하는 언론은, 부동산 가격 폭등을 막기 위한 정부의 각종 규제는 자본주의 시장 질서를 막는 행위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이번 사태의 핵심은 공직을 이용한 사전 정보 취득이라고 하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상실감의 본질은 돈이 돈을 부르는 불로소득과, 불로소득이 노동소득을 넘어서면서 벌어지는 양극화에 있다. 그런데 언론과 기자들은 오랫동안 본질을 외면해왔다.

범위를 언론사로 넓혀보자. 언론이 이해충돌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지만, 정작 본인들은 이해충돌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방송국들은 허가 받아 내보내는 뉴스라는 공공재를 통해 자사가 방영하는 드라마를 홍보하고, 자신의 이해관계가 듬뿍 담긴 광고시장을 정부가 어찌저찌 해야 한다고 개입한다.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이라든지, 방송의 공공성이라는 그럴 듯한 핑계를 대고 있지만, 자사 이익이 걸린 문제를 태연히 뉴스로 내보내는 행위는 이해충돌이 아닌가?

신문은 자신의 지면을 통해 돈을 받고 광고 아닌 광고를 내보낸다. 병원에 공문을 보내 수천만원의 돈을 요구하고, 돈을 지급하면 섹션 1면에서 병원을 소개해주기도 하고, 정부 부처로부터 돈을 받고 장관 인터뷰를 실어주기도 했다. 국민들은 언론이 당연히 공익에 따라 기사를 써서 자신들에게 판매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언론도 철저히 시장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심지어 언론은 정권 탄생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방송 사업권을 따내기도 했으며, 다음 정권을 탄생시키고자 그 방송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불러놓고 ‘형광등 100개 아우라’ 운운해대곤 했다. 이런 행위는 이해관계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얼마 전, OB맥주가 기자들을 불러 모아 맥주 시음회를 열었다. 새로 판매될 맥주를 선보이는 자리었는데, 코로나19 상황임에도 기자들 수십명이 다닥다닥 모여 앉아 맥주를 시음했다. 이후 나오는 기사들은 뻔했다. ‘오비맥주의 혁신’, ‘이름 빼고 싹 바꿨다’, ‘완벽을 추구하는 우리의 자신감’, 출입처로부터 대접받고 객관적인 기사로 위장된 광고들이 포털에 넘실거렸다.

정의를 운운하고 공정을 되새기는 언론이기에, 이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요구받는 것은 당연하다. 서울대 교수로 근무했던 조국 장관 딸이 서울대에서 인턴을 했다며 비판한 동아일보가 김재호 사장 딸이 기자로 합격한 것을 문제 삼았다고 언론 지망생을 고소하는 행위를 해선 안 되듯, 언론은, 또 기자는 자신들이 사회에 요구한 만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윤리 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 외부의 압력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공직자가 아님에도 기자들은 김영란법 대상에 포함됐고, 부작용이 우려되면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의 대상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공직자 이해충돌의 원칙이 논의되면서, 기자들도 이해충돌 방지법의 대상이 되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고 있다. 공직자 이해충돌방지법을 발의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여러 논란이 있겠지만”이라고 전제를 달면서도 “이해충돌방지법을 김영란법(청탁금지법) 수준으로 끌어올려서 교사와 언론까지도 적용하는 것이 맞지 않나”라고 말했다.

이 법이 적용되면 기자들의 사적 영역도 공적 감시 대상이 될 것이고, 그 이유로 기자들은 또 반발할 것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국민들은 찬성할 것이다. 공직자만큼 높은 윤리의식을 기자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막기엔 한국 언론이 너무 멀리 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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