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으면 보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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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싶으면 보도해라."
  • 노광준 전 경기방송PD
  • 승인 2021.03.24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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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드라마-뉴스는 반만 믿어라] 다섯번째 이야기
노광준 전 경기방송 PD
노광준 전 경기방송 PD

나른한 오후 4시 서울의 한 고등학교 강당, 교복 입은 학생들 50여 명이 띄엄띄엄 앉아 수업을 듣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졸고있는 아이가 한 명도 없다. 떠드는 아이도 없었다. 다들 얼음처럼 굳은 얼굴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어떤 수업이길래...

 “미얀마 민주주의 항쟁에 대한 계기학습”

이 학교에서는 특정 주제에 대해 선생님의 도움없이 학생들이 직접 준비해 토론을 벌이는 ‘계기학습’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날의 주제는 미얀마 사태. 학생들이 준비한 뉴스 동영상에서는 장갑차를 앞세운 군부가 평화시위를 벌이는 미얀마 시민들에게 실탄사격을 하는 모습이 흘러 나왔다. 군화발로 밟고 곤봉으로 마구 때리고 총상을 입은 채 피를 흘리며 나뒹구는 시민들의 모습이 나왔다. 이게 실화? 학생들은 너무 놀라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화면에 집중했다.

잠시 후 처음 보는 여성이 마이크를 잡았다.

“제가 말하는 중간에 숨이 찰 수가 있어요. 제 뱃 속에 아이가 있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30대 여성은 10년전 한국으로 유학을 온 미얀마 사람으로 한국 이름은 선우 씨였다. 임신 6개월로 몸이 무거운 선우 씨는 지금 미얀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진실을 알리고 싶다며 마이크를 잡고 설명했다.

“민주 정부를 총칼로 뒤집은 군부는 2만3천명의 중범죄자를 감옥에서 풀어줘 난동을 부리게 했어요. 그리고는 질서유지를 빌미로 경찰과 군인이 도심에 투입돼 시민들을 향해 실탄사격을 했습니다.”

선우 씨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놀란 눈으로 선우 씨를 봤다.

“미얀마 시민들은 냄비와 쟁반을 치면서 군부에 저항했어요. 미얀마에서는 냄비와 쟁반을 쳐서 악귀를 쫓는다는 풍습이 있거든요. 하지만 군부는 그런 시민들에게 총을 쐈어요.....”

화면에는 ‘Everything will be OK(다 잘 될 거야)’란 글귀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시위에 나섰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 19살 태권소녀 ‘에인절’의 모습이 나왔다. 미얀마에 있는 한국 대사관 정문 앞에 모여 무릎을 꿇은 채 한국말로 ‘도와주세요’라고 애원하는 미얀마 청년 학생들의 음성이 또렷이 들렸다. 선우 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학생들에게 말했다. 

“시위에 나선 미얀마 청년들의 팔뚝에는 글자가 쓰여있습니다. 내가 사는 곳은 어디이고, 내 혈액형은 B형이고 내가 죽게 되면 장기를 기증한다고. 지금 미얀마 청년들은 시위에 나가기 전에 엄마, 아빠에게 절을 올리고...”

결국 말끝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고 말았다. 충격에 휩싸인 학생들 사이에서도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한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언론은 무얼하고 있습니까?”

학생들은 왜 언론이 침묵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선우씨는 군부가 제일 먼저 TV와 라디오 방송국부터 장악했고 말 안듣는 언론사를 폐간시켰으며 지금은 가짜뉴스 전문가와 댓글부대를 고용해 미얀마 상황을 왜곡하고 있다고 답했다. 말도 안돼. 소오름...학생들은 몸서리를 쳤다.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그리고 강당 뒤에서 조용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한 60대 남자가 말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도 그랬지. 80년 5월”

그는 이 학교의 교감샘이었다. 학생들 수업을 참관하러 왔던 그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강당 밖으로 나왔다. 조용히 눈을 감았다. 1980년 5월, 41년 전의 참상이 떠올랐다. 공영방송 기자였던 그의 형이 겪은 언론통제의 참상이....

“5월18일 새벽1시반경, 전북대에 계엄군이 진입해 진압 작전을 벌이던 와중에 농학과 2학년 이00 군이 학생회관 옥상에서 13미터 아래로 떨어져 숨졌습니다.”

 80년 5월 기자 J는 광주에서 송고된 기사들을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광주 시내에 계엄군이 투입되면서 곳곳에서 믿을 수 없는 참상이 전해졌던 것이다. 

“5월21일 밤 10시, 현재 이곳 광주 시내 병원에는 총상을 입은 시민들의 시체가 59구 넘게 안치돼있습니다. 병원마다 총상입은 부상자들로 초만원을 이뤄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으며 적십자는 피가 모자란다며 헌혈을 호소하고...”

군의 실탄사격이 시작되면서 광주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와 남편을 잃은 아내가 오열하다 쓰러졌다. 그러나 현장에서 기자들이 보낸 기사는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보도지침.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신군부가 모든 언론사의 뉴스를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 평균 620건의 기사가 삭제됐다. 신군부는 모든 기사에 손을 댔다. '광주 유혈 사태 닷새째'라는 제목은 '광주 데모 사태 닷새째'로, '사상자가 속출한다'는 부제는 '군경-시민 사상자 발생'으로 둔갑했다. 누가 봐도 계엄군이 시민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담은 TV 영상은 악마의 편집으로 가위질 된 뒤 이렇게 보도됐다.

 “광주사태는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악화되는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신군부는 한 손에는 총을, 한 손에는 돈다발을 들고 언론을 통제했다. 현장 소식을 있는 그대로 쓴 기자들은 군화발로 짓밟았다. 신문을 인쇄하던 윤전기를 멈춰 세웠고, 오리걸음을 시켰다. 반면 말 잘 듣는 기자들에겐 돈다발을 쥐어줬다. 중앙 언론 기자 49명을 광주로 초청해 설명회를 갖고, 한 명당 20~30만원씩의 돈봉투를 줬다. 지금 물가로 400~600만원씩 나눠준거다. 언론사 간부들에게는 수시로 오찬(점심식사)과 만찬(저녁식사)를 제공후 3만원(60만원)씩 줬다. 자연스럽게 신군부가 원하는 기사 내용으로 채워졌다.

 “시민들이 경찰 차량을 뒤엎고 불을 질렀습니다.”

 “폭도로 변한 광주시위대가 유독 경상도 차량에만 불을 지르고 있습니다.”

 “영남고속버스가 불타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경상도 정권을 박살내자는 전단지가......”

영호남 지역갈등이 원인인 것처럼 묘사하는 가짜뉴스가 신문과 방송을 통해 보도됐다. 죽어가는 시민들의 모습은 삭제되고 시민들을 폭도로 묘사하는 영상만 돌아갔다. 뉴스만 본 사람들은 하루빨리 계엄군이 폭도를 진압하기만을 기다렸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던 언론인도 있었다. 

 “차라리 내가 죽어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다면......”

 J기자는 어떻게 하면 신군부의 언론통제를 피해 진실을 보도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기자들은 다 알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죽이고 있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러나 누구도 보도할 수 없었다. J는 한가지 꾀를 냈다. 

 “오늘 7시 뉴스는 이렇게 보도하겠습니다.”

당시 공영방송 TBS의 7시 뉴스 제작을 맡고 있던 J는 방송뉴스를 검열하던 군복차림의 보안사 검열관에게 한 뭉치의 뉴스 원고를 넘겼다. 당시로써는 하나도 방송될 수 없는 광주의 진실이 담겨있었다. 원고를 휙휙 넘겨본 검열관은 예상한 그대로 J를 노려보며 이렇게 말했다.

 “죽고 싶으면 보도해.”

 ‘알겠다’고 대답한 J 기자는 원고뭉치를 들고 보도국장실로 들어갔다. 

 “국장님, 오늘 방송할 뉴스 대본입니다.”

 원고를 살펴본 보도국장은 얼굴이 퍼렇게 질린 채 J에게 말했다.

 “이걸 방송한다고?보안사에서 하래?”

“예.”

“보안사에서 허락했다고?”

“예. 허락맡았습니다.”

“진짜지?”

“그럼요. '보도해'라고 저에게 똑똑히 말했습니다.”

 J기자는 '죽고 싶으면 보도하라'는 검열관 말에서 '죽고 싶으면'을 떼버리고 '보도하라'는 말만 살려 보고했다. 죽기를 각오한 도발이었다. J를 철썩같이 믿은 보도국장은 결제서류에 서명했고, 원고를 숙지한 아나운서는 7시 정각에 방송했다.

“보안사령부 취재기자와 외신보도를 종합하면 이 시각 광주에서는......”

뉴스가 나가자 곧 난리가 났다. 서울시청에서 방송뉴스를 검열하며 짜장면을 먹던 계엄사령부 검열단장은 너무 놀라 짜장면 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불같이 화를 냈다.

“이 뉴스 누가 내보내라 그랬어?”

 “저희 방송 담당 검열관이 허락하셨는데요?”

“당장 끊어. 뉴스 바로 끊어 XX야”

이 사건 직후 방송검열은 더 물샐틈 없이 강화됐다. 뉴스를 허락(?)한 검열관은 어디론가 끌려갔고 직위해제됐다. J는 두 달 뒤 해고됐다. 동료 기자들은 J에게 '그나마 끌려가서 고문당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위로를 건넸다. 당시 보도통제에 맞서 제작거부 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방송국 기자협회장이 계엄군에게 연행돼 끌려갔다. 어떤 사람은 남영동으로 또 어떤 사람은 서빙고로 끌려가 고문당했다. 

그리고 전남도청에 모여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시민군이 헬기까지 동원한 계엄군의 마지막 공습에 몰살당했을 때, 다음날 보수신문은 이렇게 썼다. 

 “10일만의 평온, 복구 서둘러, 어떻게 지내느냐 인사 나눠, 광주 시민을 돕자 민간단체 등 호응, 광주 생필품 비상 공급”

마치 수해피해를 입은 뒤 복구작업에 나선 것처럼 진실을 왜곡했다. 방송뉴스에서는 9시 ‘땡’하자마자 계엄군의 수장 전두환 장군을 미화하는 보도가 시작됐다.

“정의감이 강하고 포용력 있는 대범한 인물, 우국충정에 불타는 사심 없고 청렴결백한 전형적인 군인, 인자한 범국민적 인물, 문무를 겸비한 민주주의 신봉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41년전의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떠올린 교감 선생님은 ‘후’,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다시 강당 안으로 들어갔다. 강당 안에서는 학생들의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래의 유튜브 크리에이터를 꿈꾼다는 한 여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펜이 칼보다 강할까요?"

아니, 교감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적어도 그가 경험한 현실 속에서 펜은 칼보다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칼에 묻은 핏자국을 케첩이라고 분칠하는 펜이었다. 강단 안에 있는 또 다른 학생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펜이 칼보다 강한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시민들이 갖고 있는 폰은, SNS는 칼보다 확실히 강하다는 겁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미얀마의 진실을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얀마 민주항쟁에 대한 '계기학습'은 지난 3월 10일 오후 4시 서울 동대문구의 휘봉고등학교에서 열렸습니다. 미얀마의 참상을 알린 외부 강사는 재한미얀마청년연대에서 활동하는 웨노에흐닌쏘(한국이름 강선우) 씨였으며, 모든 내용은 휘봉고 학생들이 준비했습니다.

강의를 들은 학생 중 한 명은 소감문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여러 번 소름을 느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미얀마의 민주화 열기가 40여 년 전 우리나라의 민주화 열기와 유사하기 때문이고 그때 광주의 모습과 지금 미얀마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라고 썼습니다. 

80년 광주의 보도통제와 관련해 소개된 에피소드는 1980년 5.18 당시 KBS 뉴스담당 편집부차장을 맡고 있던 장두원 차장의 실화로, 장 차장은 ‘나 하나 죽으면 이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겠지’하는 생각으로 5월 21일 KBS 7시 뉴스를 보도한 뒤 ‘반정부’ 인사로 찍혀 해고됐습니다.

장 기자는 8년 뒤인 1988년 KBS로 복직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신군부의 안내를 받아 5.18의 참상을 왜곡하고 ‘땡전뉴스’를 쓰던 다수의 언론인 중 5.18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와 참회를 한 이는 거의 없습니다. 정말 펜이 칼보다 강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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