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나무 김준수 기자] 한국 개신교의 유별난 ‘미국 사랑’은 선교 초기부터 이미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188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항으로 돌아가 보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조선 땅을 밟았다. 그들은 미국 북장로교와 남감리교가 파송한 선교사였다. 선교사 파송에 가장 열심이었던 곳이 미국이었다. 해방되기 전에 활동했던 선교사의 65.9%가 미국인이고, 영국인이 13%, 캐나다인이 6.3% 정도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의 경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듯이 한국 개신교는 미국 개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해방 이전 선교사의 10명 중 6명은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 소속으로 전체 선교사의 60.9%(장로교 34.%, 감리교 26.3%)를 차지했다. 미국 개신교 중심의 선교가 남긴 열매는 분명하다. 한국 개신교 현황만 살펴봐도 여실히 느껴진다. 한국교회 대다수를 차지하는 300여개의 장로교단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김근주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경험과 신학에서 비롯된 한국 교회의 보수성’이라는 글에서 “기독교 신앙이 주로 미국을 비롯한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졌다는 점에서, 일본에 눌리고 위협당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은 서양의 힘과 문명과 거의 동의어였을 것”이라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미소 양국의 대치로 인한 남북 분단의 상황이라는 경험이 한국교회의 성격을 규정했다”고 분석했다.

자연스럽게 근본주의, 경건주의, 교파주의라는 신앙 특성도 물려받았다. 이에 대해 배덕만 교수(기독연구원 느헤미야)는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라는 글을 통해 “한국 개신교는 미국 선교사들의 절대적 도움과 영향 하에 형성되었다”며 “한국 개신교 내에 근본주의적 성향이 조성된 것도 이들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영향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 개신교 선교 초기 신학을 가르친 교수들과 교과 과정도 근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후에 평양신학교와 협성신학교로 발전한 신학반의 교수 55명 중 39명의 외국인 교수 중에 33명이 미국인이었다. 출신 학교가 알려진 16명의 선교사 중에서 당시 ‘근본주의 신학의 요람’이라고 평가받던 프리스턴신학교 출신이 7명이었다. 

이만열 박사(전 국사편찬위원장)는 ‘한국기독교와 민족의식’에서 “한국교회의 보수주의적 신학 및 신앙 형성은 이들 미국의 보수주의 신학교 출신 선교사와 이들에 영향 받은 한국인 신학자들이 이루어냈다고 말할 수 있다”며 “이 같은 현상으로 한국 신학은 지나칠 정도로 미국 의존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고, 반면에 한국교회 자생력에 의한 신학 형성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엘리트 개신교인 대거 등용한 미군정
일제 재산 처리과정서 개신교에 특혜

해방 이후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개신교인들이 미군정에 대거 등용되기 시작했다. 백중현은 <대통령과 종교>에서 “당시 개신교는 미국 유학파 출신의 엘리트를 가장 많이 보유한 집단이었다. 미군정 부처장 19명 중 11명이 개신교인이었으며, 1946년 미군정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중 35명이 개신교 신자였다는데서 알 수 있다.

해방 당시 개신교인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1퍼센트도 안 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높은 수치”라고 설명했다. 미국 출신 선교사와의 끈끈한 유대는 해방 직후 일제가 남긴 재산을 분배하는 과정에서도 계속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방되었다가 광복 이후 조선으로 돌아온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인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 선교사(한국명 원한경)는 미군정청 고문, 미소공동위원회 고문을 맡는다. 또 장로교선교회 재산관리관으로 위촉받았다. 

여기에 미국 유학파이자 193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남궁혁 목사가 미군정청 적산관리처장으로 활동했다. 한국개신교가 다른 종교에 비해 적산 처리 과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던 주요한 요인 중에 하나다. 실제로 조선천리교(일본의 종교단체) 소유의 부동산을 불하받아 조선신학교,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 바울교회(현 성남교회), 야고보교회(현 경동교회)를 세웠다. 
 
‘기독교국가 건설’ 꿈꾼 이승만
대한민국 세운 위대한 감리교인?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선출된 점도 무시할 수 없다. 1901년 한성감옥에서 종교적 체험 이후 개신교로 개종한 이승만은 190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조지워싱턴대학, 프린스턴대학 등에서 수학하면서 일제 침략이라는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할 길은 개신교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소위 이승만의 건국이념 중에 ‘기독교국가 건설’이 포함된 이유다.

이승만은 유관순 열사, 주시경 선생 등과 함께 2016년 기독교대한감리회(당시 전용재 감독회장)가 출판한 <대한민국을 세운 위대한 감리교인> 중에 하나로 선정될 만큼 감리교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승만이 미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는 1908년 피츠버그 대회에서 한 연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우리 한국의 교인들은 여러분 형제자매께 감사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을 통해 우리가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셨다”며 “여러분이 파송한 선교사들은 우리에게 와서 아름다운 봉사의 삶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 민족은 대단히 호의적으로, 또한 적극적으로 응하여 1885년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이래 놀랄만한 진보를 이루었다”고 했다.

이덕주 박사(한반도통일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는 이승만에 대해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기반으로 정치적 실험을 모색했던 시대의 인물’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배타적 기독교 중심주의 ▲미국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 등을 한계로 지적한 바 있다.

이 박사는 ‘이승만의 기독교 신앙과 건국론’이라는 글에서 “(이승만에게) 미국은 선교사를 보내 주어 봉건적 가치와 질서에 매여 있던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가치를 깨우쳐 준 은인의 나라였다. 이승만이 꿈꾸었던 ‘기독교 국가’의 원형이었다”며 “미국에 대한 ‘대안 없는’ 선택과 의존은 자주적인 사고와 행동의 폭을 좁혀 결과적으로 독립을 추구했던 국가를 미국의 ‘종속 변수’로 전락시키고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미국 관련 부정적 여론 생기면 
구원투수 자처한 한국 개신교

한국 개신교가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내거나 광장으로 나오기 시작한 것도 2005년 사립학교법 개정안 처리 반대와 함께 미국과도 관련이 깊다. 광우병 파동이 온 나라를 뒤흔들던 시절, ‘장로 대통령’ 이명박과 미국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것도 한국 개신교였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당시 대표회장 엄신형 목사)는 2008년 5월 18일 ‘나라를 위한 특별기도회’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했다. 당초 순수한 기도회로 진행된다고 밝혔던 것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온갖 정치적 구호와 발언이 난무했다.

당시 설교를 전한 조용기 원로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는 일부 언론이 ‘광우병 공포’를 조장해 이명박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조 목사는 “오늘날 한국은 광우병의 공포가 일어나 전국을 휘몰아치고 있다. 시장바닥의 근거 없는 소문이 비과학적인 선동을 통해 공포를 일으키고 있다”며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세력들이 계획적으로 공포정책을 펴고 있다. 마음속에 불안이 들어가면 모두가 이성을 잃고 모두가 불안한 것이다. 광우병 공포가 민족의 분열을 가져오고 있다”고 했다

초강대국인 미국과 불편한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특정 세력이 반미 선동을 조장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 목사는 “앞으로 100년간 미국은 초강대국이다. 미국은 6·25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큰 도움을 줬다. 북한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북한 가서 살지 왜 남한에서 사나. 미국과 대결하고 대항해서 우리가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며 “지금의 반미 선동은 정권을 현 정부를 무력화 시키려는 것이다. 비민주적인 혼란을 틈타 조직적으로 선동하는 세력이 있다. 특정언론과 반미세력이 정권무력화를 시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분위기는 같은 해 5월 20일 열린 ‘한국교회 원로지도자 초청 특별간담회’에서도 이어졌다. 당시 발표한 시국성명서에서 원로들은 “최근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하여 광우병 공포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됨으로써 국민 모두를 두려움에 떨도록 하는 것을 목도하면서,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특히 신뢰할만한 과학자와 전문가들의 견해에 반하여 일부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학업에 전념해야 할 나이 어린 학생들이 정치적 집회에 동원되고 선동당하는 것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 다”고 했다.

이어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관련된 국론분열과 새롭게 출발한 정부에 대한 발목잡기식 정치공세를 개탄하며, 일부 언론은 현 정부 무력화 시도를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라며 “정부는 이번 미국산 쇠고기 파동을 거울삼아, 정책수립과 시행에 있어서 국민 모두의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이라크 추가 파병을 촉구한 곳도 한국개신교였다. 한기총(당시 대표회장 길자연 목사)는 2003년 10월 14일 ‘국가와 민족을 위한 한국교회 원로초청 특별 기도회’를 개최하고 시국성명서를 발표했다. 원로들은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이라크전은 세계 평화 질서 교란자인 사담 후세인을 축출함으로써 압박받아 온 이라크의 민주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라며 “인류 정의와 평화, 특히 대한민국의 국익을 위해 이라크에 추가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방한을 맞아 대대적인 환영행사도 개최했다. 한기총(당시 대표회장 엄기호 목사)은 2017년 11월 7일 새문안교회 맞은편에서 ‘회개와 구국기도회’를 진행했다. 

당시 전광훈 씨(당시 한기총 공동회장)는 ‘국가의 위기와 악에서 떠나는 회개’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전했다. 그는 “138년 전 조선이 망해갈 때, 하나님께서 미국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를 보내주시지 않았나. 그들이 병원과 학교와 교회를 지어줘서 민족의 개화가 시작됐고, 한국교회는 독립운동과 산업화ㆍ민주화까지 주도하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이뤄냈다”며 “한국교회가 다 망한 나라를 살려놓으니, 종북좌파들이 한국교회를 비난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라고 주장했다. 

한미‘군사’동맹에서 한미‘평화’동맹으로
“방위비 증액, 분단체제 견고하게 만들어”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 정부에 방위비 분담금 대폭 증액을 통보하면서 한미관계의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장관의 발언처럼 한국은 미국과 공동 안보의 무임승차국이 아니다. 방위비 분담금은 해마다 증가해 1조원을 돌파했다. 한국의 분담금 중 일부가 주일 미군 유지에 쓰이고 있는 점도 문제다. 

한국은 분담금 외에도 주한 미군 지원하는데 재정을 아끼지 않고 있다. 주둔지 정비 같은 자잘한 일부터 세금 면제, 심지어 훈련 중에 발생한 민간 피해까지 우리 정부가 배상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는 미국의 입장만을 대변하는듯한 한국 개신교의 무책임한 행태를 더 이상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 화해통일위원회가 지난 13일 ‘미국은 우리의 우방인가?’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성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NCCK는 “5배가 넘는 방위비 분담금 요구에 더해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지소미아 복원을 압박하는 미국의 행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며, 이는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한미군사동맹이 지닌 불합리한 구조를 타파하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한미평화동맹으로 전환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특히 미국이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더 이상 이용하지 말고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방위비 분담금 증액으로 한반도 분단체제를 더욱 견고하게 유지하고, 역내 군사적 영향력을 증대시키려는 행위는 동북아시아의 냉전구도를 강화할 뿐”이라며 “70년간 전쟁상태를 이어오며 가중된 안보불안을 악용하고, 관계개선을 말하며 턱밑에 총칼을 들이미는 행위가 과연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적합한 것인지 돌이켜 보기 바란다”고 했다.

NCCK는 “미국이 소모적인 군비경쟁을 부추기며 한반도와 역내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고,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정착과 남북의 상생과 통일에 기여하는 길로 나아가기를 바란다”며 “우리는 이를 위한 기도와 함께 평화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기사는 2019년 11월 장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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