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오 베들레헴 작은 골',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패널 : 강미희 / 진행 : 김용민

예수님은 정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을까요? 이성과 과학으로 보자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됩니다. 단성생식은 불가능하잖아요. 물론 양성이 있는 생물체가 한쪽 성이 다 죽어 멸종 위기에 닥쳤을 때 기적적으로 한쪽 성만으로도 번식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그건 일반적이라고 볼 수 없겠지요.

그러나 2000년 동안 그리스도교가 확고히 믿은 ‘동정녀 탄생’은 어디에 뿌리를 둔 것일까요? 우선 이 교리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은 “처녀가 잉태해 아들을 낳을 텐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처녀’는 히브리어 원문 성경을 보면 남성과 성관계를 가져본 적이 없는 여성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얄마(עלמה)라고 그냥 ‘젊은 여성’입니다. 옛날에는 13세 된 여성을 성인(成人)으로 간주했고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명시적으로 말해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마리아로 말입니다. 결국 핵심은 처녀에게서 예수가 태어났다고 하는 것인데, 결국 이것은 ‘영웅은 그 자체로 난 사람이어야 하기에 부계(父系)를 거부한다’라는 서사를 따른다는 보편적 영웅 서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상위의 의미가 있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모든 통념을 뛰어넘는다는 점일 것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그런데 탄생이 아니라 죽음 이야기에서 비롯됐다고 봐야 해요. 또 성서도 예수님 죽음 이야기로부터 탄생했다고 봐야 하고요. 마치 친구 윤동주 죽음을 유산처럼 안고 살던 문익환 목사님이 장준하 선생의 죽음 이후 그 유지를 받들기 위해 생애 마지막 18년 중 여섯 번 투옥돼 11년 3개월을 감옥에서 살았던 것처럼요. 즉, 복음서를 쓴 사람들은 탄생이 아니라 죽음을 계기로 예수님 전기를 다룬 거예요. 그래서 탄생 이야기가 없는 복음서(마가, 요한복음)가 있잖아요. 

복음서를 읽을 때 우리가 머릿속에 새겨야 할 것이 있어요. ‘이 복음서는 왜 썼는가’하는 부분이지요. 마태복음은 초장부터 예수님 탄생 이야기가 나와요. 이건 바울을 내심 의식한 거예요. 바울서신이 복음서보다 먼저 쓰였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보기엔 단 한 번도 예수님을 본 적이 없었던 바울의 서신이 예수님의 가치를 설명하니까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라고 생각한 거예요. 

바울이 쓴 로마서 1장 3~4절에는 예수님을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으로 말합니다. 로마서보다 후대에 쓰인 마태복음의 저자는 바울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을 동의해요. 또 로마서에서 바울은, 예수님이 성령으로는 부활하고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됐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는 아니라고 반박해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말이지요.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 거룩한 성령의 힘으로 잉태된 분이다. 바울 너는 잘 모른다.”

사실 바울의 말에서 비롯됐겠지만, ’예수는 원래 사람이었는데 신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이 됐다‘라는 주장이 훗날 교회에서 돌았어요. 이른바 ’양자설‘(養子設)이 그래요. 그런데 이 주장은 이단으로 낙인찍혀요.  마태복음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분으로서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아예 탄생 때부터 그러했다고 반박성 신앙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어린 남자아이를 죽여라”

우리가 성탄을 기쁘고 즐겁게 보내지만, 당시 상황을 마태복음서는 살벌한 풍경으로 그려요. 당장 지역의 왕인 헤롯은 예루살렘 사람들과 더불어 메시아 탄생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다고 해요. 그럴 수밖에요. 자기 말고 왕이 또 나타났다고 하니까요. 게다가 헤롯왕은 이두 출신이에요. 이스라엘의 주류인 유다 출신이 아니란 이야기지요. 한마디로 반쪽 유대인이었어요. 그러니까 유대 사람들은 헤롯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너는 우리의 왕이 아니다’라고요. 물론 표나게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유대인들에게 마음 얻지 못하는 처지를 절감 못했겠습니까?

헤롯은 자신을 빛내보려고 어떻게든 왕이 되려고 했어요. 그래서 로마에 빌붙어 외교술을 빙자한 아부로 일관했고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됐는데 백성은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는 거에요. 때로는 독재로 때로는 성전을 지어주는 식의 회유책으로 통치기반을 만들려고 했어요. 이 와중에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라는 이야기가 들리는 거지요. 그래서 ‘이놈 누구지? 죽여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두 살 아래 사내 어린이를 모두 죽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 어디서 들어보지 않았나요? 바로 왕이 히브리 백성의 규모와 세력이 커지니까 사내아이를 죽이라 하고, 요게벳이라는 여성이 갓 태어난 아들 모세를 강가에 띄우는 이야기. 마태복음의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모세의 이야기를 재현하고 있는 겁니다. 모세 서사는 이것만 닮지 않았어요. 바로의 압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한 영도자가 아닙니까? 물론 최종적으로 ‘허락하신 새 땅’으로 이끈 지도자는 여호수아지요. 그런데 여호수아는 히브리어인데 예수님 시대 지역 방언인 아람어로 바꾸면 바로 ‘예수’가 됩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아버지는 요셉이에요. 요셉이 누구입니까? 이집트로 끌려갔고 모함 속에 고난을 받았지만 끝내 성실함과 정직함, 지혜로움으로 총리가 된 주인공 아닙니까? 그 이름과 같아요.

지금 예수님 한 명에게 마태복음 저자는 어떤 이미지를 덧입히고 있습니까? 모세, 여호수아의 서사를 덧입혀요. 족보에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하고요. 게다가 아버지가 (이름이 같은) 요셉이지요. 또 할아버지는 누군지 알아요? 역시 야곱이에요. 아브라함의 손자, 증손자 이름과 같지요. 그게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탄생할 때 누가 찾아옵니까? 동방박사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디에 누워 있었을까요? 구유요? 아닙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마태복음이고요. 구유 이야기는 누가복음에만 있어요.

아무리 같은 예수님 탄생 이야기라도 마태복음은 마태복음대로, 누가복음은 누가복음대로 해석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동방박사는 몇 사람이지요? 세 사람이오? 아닙니다. 정답은 ‘알 수 없다 ’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 사람으로 이해돼왔을까요? 그들이 가져온 예물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잖아요. 세 개니까 한 사람이 하나씩 들고 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그러나 세 명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동방박사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했기 때문에 한 사람이 아닌 건은 맞아요. 두 명일 수 있고, 네 명일 수도 있어요.

동방박사는 누구인가?

그러나 핵심은 동방박사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에는 마고스(μάγος)의 복수 마고이(μάγοι)라고 돼 있어요. 고대 점성가를 뜻하지요. 그렇다면 동방박사의 학위가 짐작됩니다. ‘철학 박사’일 가능성이 커요.

그들은 메대제국 출신입니다. 곧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기억하는 후손입니다. 아마 이들의 선조는 왕실에서 왕을 보좌하면서 하늘을 보며 별을 연구하고는 조로아스터교의 최고 신인 아후라 마즈다의 명령을 해석해줬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국정의 방향을 점치는 일을 한 것이지요. 예컨대 “지금쯤 전쟁을 나가시는 게 좋습니다. 이게 아후라 마즈다 님의 뜻입니다”라고 진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역사 상식. 페르시아가 누구한테 망하죠? 그리스 알렉산더 왕에게 망합니다. 그 그리스는 나중에 로마에도 망하지요. 나라가 망하니까 이 점성가는 물론, 그 후손은 떠돌이가 되지요. 그래서 갑바도기아라든가 소아시아 지역의 아나톨리아라든가 그다음에 바벨론이라든가 하는 곳으로 흩어져요. 그들은 하지만 로마 멸망과 페르시아 제국 재건을 꿈꿨습니다.

잔인했던 로마, 이에 앙심 품은 페르시아 귀족

당시 지배자 로마는 무척 잔인했어요. 일례를 들어볼까요? 그래서 정복지에 가서 행패를 부렸지요. AD 83년경 스코틀랜드 장군 칼카쿠스가 로마와의 질 게 뻔한 전쟁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해요. “세상의 강도들, 지금은 그들이 모든 것을 초토화하는 손들을 땅이 막아내지 못하고 있는데, 그들은 심지어 바다까지 넘보고 있다. 만일 그들의 적이 재물이 많으면 그들은 탐욕스럽고, 만일 그 적이 가난하면 그들은 잔인하다. 동방이나 서방도 그들의 욕망을 채우지 못했으며, 인간 중에 오직 그들만이 부유한 땅들만이 아니라 가난한 땅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탐욕을 부린다. 약탈하고 살육하고 도둑질하는 것을 그들은 제국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황무지로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평화라고 부른다.”(한상봉 역) 이 평화는 팍스로마나(Pax Romana) 곧 ‘가짜 평화’였습니다. 수백 년이 흐른 마당에도 페르시아 출신 점성가 후손은 네트워크를 끊지 않고 폭력적 로마 제국주의를 극복하고자 뜻을 모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별이 떴어요. 로마를 이길 주인공의 출현이 예고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이상한 동네로 가요. 좁은 이스라엘 땅임에도 성경에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은 나사렛에, 메시아를 잉태할 가문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했던 목수의 가정에 말입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의하면 나사렛에서 서북쪽으로 8㎞ 거리에 있는 고대 도시가 있었는데 세포리스라는 곳이에요. 요셉은 이곳에서 (소년 예수와 더불어) 토목공사를 했으리라는 추정이 있어요. 그렇다면 이런 일용직 건설 노동자 집안 갓 난 아들에 페르시아의 정치고문들이 와서 절하고 ‘당신이야말로 유대인의 왕입니다’라고 말하는 모양새이지요.

바벨론에서 구원해준 페르시아

그렇다면 마태복음이 전하고 싶은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망한 제국(페르시아)을 재건하기 위해 뭉친 후손이 거대 제국(로마)의 횡포에 맞서 싸우기 위해 식민지의 대중적 민중적 저항 세력과 연대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 탄생이 단순히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것만이 아니라 사악한 지배 세력을 연대의 힘으로 극복하기 위한 사람들의 꿈을 담았다는 점에 의미를 둬야 해요.

‘중동의 역사’(버나드 루이스 저)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멸망시키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앞서 바벨론에 유대민족이 끌려갔고요. 유대민족에게 있어서 로마에 맞서 싸울 협력자로 페르시아만 한 상대가 없었던 거예요.

가장 가난한 민중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엘리트 세력들이 함께 연대해서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희망 이야기로 받아들일 때 예수님 탄생의 의미는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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