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진행 : 김용민
찬양 : 유기농수도사 / 반주 : 강미희 전도사

크리스마스의 유래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 미사’ 즉 예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탄생일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날로 12월 25일로 못 박은 주체는 리베리어스 교황이었어요. 기원후 353~354년경이었지요.

사실 12월 25일은 동지(冬至)와 관련이 있습니다. 로마는 태양신을 섬기는 나라였어요. 그래서 동지를 싫어했어요. 왜냐? 이날은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 아닙니까? 많은 사람이 일찍 해가 저물면 태양신이 죽은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래서 아무리 밤이 길어도 아침이 되면 태양신이 떠오른다는 점을 환기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이날을 축제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그 로마의 국교가 그리스도교가 됐어요. 또 그 로마를 교황이 지배하게 됐고요. 리베리어스는 예수가 태양신보다 위대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태양신 축제일의 주인을 바꾼 것입니다.

예수님이 정말 겨울에 태어나셨을까? 생각해보세요. 그때 이스라엘은 춥기도 하거니와 우기인데, 목자가 밤에 들에서 양 떼를 쳤다는 건 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그때 예수님이 오셨다면 성경 내적 근거라 하더라도 12월 25일일 가능성은 작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족보에 담은 ‘이스라엘의 워너비’

예수님 족보를 담은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첫 줄부터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의 뿌리를 밝히고 있어요. 영아 살해가 탄생 이야기에 언급되는데 모세의 상징성을 담은 것이고, 예수님이라는 이름 자체가 여호수아에서 비롯된 점을 참작했을 때 가나안 땅을 완성한 주역의 이미지를 담았습니다. 게다가 예수의 아버지는 요셉, 할아버지는 야곱이고요. 유대인들이 존경할 만한 인물들을 모두 몰아넣은 셈이지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희망을 예수님에게 투영한 것입니다. ‘가짜 족보’가 횡행하는 현실도 그렇습니다만, 자기 조상 명성으로 자기를 빛내려는 문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어요.

오늘 읽은 데를 보면 어떻게 돼 있지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14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요시아)까지가 14대, 그 후 여고냐에서 그리스도까지 14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 이후 그리스도는 14대-14대-14대(42대)에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따져보니 41대예요. 다윗을 두 번 센 겁니다. 다윗이 그만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이었어요. 참고로 다윗이라고 하는 히브리어를 숫자로 풀면 14에요.

이스라엘의 운명을 그래프로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상승 곡선을 긋다가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기까지 하향 곡선을 그리지요. 지금 로마에 지배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포로기로 비유의 상황을 닮았지요. 이 시점에서 우리를 노예 상태에서 끌어내 줄 메시아는 역시 다윗 후손에게서 나와야 한다고 하는 메시지가 있어요.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에게 족보는 왜?

그런데 이런 반론도 있어요.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한 것인데 부계가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 말입니다. 사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동정녀 탄생설’이 깊게 각인되다 보니 그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사람들 처지에서는 다윗의 후계에서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게 더 큰 의미가 있었어요. 예수님 족보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홍수로 인류 심판하시고 나서 최초로 선택한 민족의 조상이었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는다고 하셨어요. 이 말씀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예수님의 아브라함 후손 됨’이 중요했어요. 하나님이 다윗과 계약 맺은 것은 또 어떤가요? 이것은 ‘영원한 계약’이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했지만,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은 유의미해요. 예수님은 공간적으로 보편적으로 또 시간상으로 영원히 우리의 메시아가 된다는 점 또한. 물론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의식을 강화하고 이방을 멸시할 수도 있는 우를 낳지요.

예수 족보의 대반전 : 다섯 명의 여자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족보에 아주 기가 막힌 장치가 있어요. 바로 여성들입니다. 예수님 족보에 여성 다섯 명이 등장합니다. 이들 중 4명은 ‘선민의식’에 비추어 볼 때 결함이 있어요. 대를 잇기 위해 시아버지를 유혹한 아랍 여성 다말, 성매매하던 가나안 여성 라합. 모압 여인 룻, 다윗에게 성폭행당한 히타이트 여성 밧세바가 그렇습니다. (물론 나머지 한 사람,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유대 사람으로 보이고요) 그런데 이 여성들은 이스라엘이 생존이 위태로워질 시기에 이스라엘을 살린 사람들이에요. 예수님 족보에 아브라함 부인 사라, 이삭 부인 리브가 정도는 나와줘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 거예요. 무슨 이유일까요? 국수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위해서였을 거예요. 

마태복음 “예수 족보는 구약의 실현”

마태복음 족보 맨 마지막에 마리아가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만 호명되는 흐름으로 보면 “야곱은 요셉을 낳고”로 가야 자연스러운데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라고 해요. 이게 묘한 겁니다. 마태복음 저자는 국수주의를 지웠어요. 또한 예수님을 다윗의 후계만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지요. 사실 마태복음은 유대교의 전통을 존중하면서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사람의 기록이에요. 왜냐? 유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또는 행위를 하시는데 사람들이 놀랐다’라고 하는 대목이 다섯 번 나와요. 이것은 모세 오경을 대체하려는 의도예요. 마태복음 1장에서 2장까지 예수님 탄생 이야기인데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다섯 번 나오지요. “예수님은 (유대인이 하늘처럼 받드는) 경전 구약을 성취하는 존재”라고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래서 족보가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은 예수님이 구약(에서의 예언)과 신약(에서의 실현)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자, 여기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족보를 비교해봅니다. 마태복음에서 다윗은 밧세바 사이에서 솔로몬을 낳는다고 하지요? 그런데 누가복음은 나단이라고 말해요. 다윗에게는 자식이 많았지만 솔로몬을 적자(嫡子)로 본 게 아니지요. 게다가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할아버지가 놀랍게도 야곱이 아니라 엘리예요. 엘리는 제사장이지요.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제사장이나 예언자의 이미지를 짙게 드리우려 했지만, 마태복음은 왕의 적통으로 보고자 했어요. (마태복음 족보에 따르면 예수님은 아브라함, (...) 다윗, (...) 여호야긴 왕의 계보를 잇게 돼요.)

예수 탄생, 모세와 닮은 꼴

예수님의 어머니는 마리아고 아버지는 요셉인데 둘이 정혼하는 중에 아이가 생긴 것입니다. 정혼했다는 것은 같이 살기 전 단계를 말합니다. 즉 정혼녀는 친정에 있을 시기이지요. 결혼한다면 남편이 와서 데리고 간 이후인데요. 그런데 마리아가 정혼 상태에서 아기를 잉태한 것입니다. 둘이 동침은 물론 손 잡아보지도 않았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절대 용납받을 수 없었어요.

이럴 때 유대교에서는 두 가지 해법이 있어요. 첫째, 공개 재판이 있었어요. 망신과 모욕은 기본이지요. 분한 마음에 대개의 남성은 이 카드를 집는데요.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두 번째 해법, 즉 사적으로 조용히 해결하는 것, ‘내가 너를 아내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다’라고 말하고 결별을 선언하는 방법을 택합니다. 마리아라는 여성을 불쌍히 본 것이지요. 마태복음은 이런 요셉의 태도를 두고 ‘의롭다’라고 표현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의롭다’라는 표현이 다시 나오는데 세례 요한이 주저함에도 예수님에 세례를 베풀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뭐라면서 세례 요한에게 ‘하라’고 합니까?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라고 해요.)

그런데 이때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요.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과, 태어난 아기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하지요.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탄생 서사도 떠올려야 해요. 그 역시 노예 상태의 히브리 민족을 구원하잖아요. 이뿐입니까? 두 살 아래 남자아이는 다 죽이라고 명령한 바로나, 영아 살해 명령을 내는 헤롯이나, 아기 시절부터 고난을 겪는 영웅 서사의 악역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을 죄에서 구원한다’라고 했는데 민중이 바라는 바인가요? 지금 로마로부터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잖아요. 게다가 이건 율법 학자를 열받게 만들어요. ‘아니 예수가 뭔데 죄를 구원해주는가?’ 그건 율법 학자가 독점하다시피 한 ‘용서’의 권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민중과 종교 기득권자 모두에 환영받지 못하는 하나님 아들, 마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임마누엘’의 기원

이사야 7장 14절을 보면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라고 돼 있어요. 이사야서의 맥락은 어떨까요? 당시는 북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아시리아가 점점 세력이 커졌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무척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시리아, 에돔에 남유다를 더해서 팔레스타인 국가 연합을 만들어서 아시리아에 맞서려고 했어요. 그런데 남유다가 주저합니다. 그러자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를 치려고 했어요. 그랬더니 남유다가 아시리아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때 나온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너는 어째서 하나님 아닌 강대국을 의존하려 하느냐?”라고 묻는 거예요. “곧 처녀(그러나 원문에서는 ‘젊은 여인’(עלמה)이로 나옴)가 잉태해 임마누엘을 낳을 것이니 버텨라”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임마누엘’의 의미

이사야 7장 14절에 등장하는 젊은 여자가 잉태한 ‘임마누엘’이 누구를 특정하는지 당시로선 정확하게 알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마태복음에서 이 ‘임마누엘’이 다시 거명되는데 로마 제국에 짓밟힌 이스라엘 사람의 여망을 안을 메시아로 이해됐고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지목됐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외세의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만 믿어라. 외세 즉 로마 제국이 너희의 구원자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탄생은 종교를 넘어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정치는 만능이 아닙니다. 선출된 대통령은 권력이 많지만, 세상을 온전히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혁명은 정신적 변화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복음 1장 21절)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원래 이사야 말씀은 아하스 왕에게 주는 일종의 경고예요.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고 앞으로 ’임마누엘’을 보내주실 텐데 넌 왜 계속 그렇게 아시리아에 기대고 있느냐’라는 메시지입니다. 당시 아하스에게 외세가 하나님이었던 것이죠. 이게 그 시절 이야기이기만 할까요?

미국이 아무리 강성하고 또 기독교 문화권이라고 해도 미국이 하나님은 아니잖아요. “임마누엘 하나님의 너희와 함께하실 것”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서 앞뒤를 감싸요.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서도 그랬지만 맨 마지막에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해준 말씀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28장 20절)이 그렇잖아요. 결국 예수님 탄생 이야기가 굳이 나오는 것은 ‘너희와 함께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다’라고 하는 경험의 총체였어요.

예수님 족보 vs 로마 황제 족보

당시 로마 황제였던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도 족보가 있어요. 자기는 천년을 이어오는 로물루스 가문이라는 건데 최초의 할머니가 주피터의 딸 비너스라는 것이지요. 근데 비너스가 금성이지요? 별 이야기는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별 따라 동방박사가 예수님 태어나신 장소로 오잖아요. 그런데 같은 영웅 탄생 서사라고 해도 신화와 예수님 탄생 이야기는 조금 달라요. 모든 영웅은 신과 여성 또는 여신의 육체관계를 통해 태어나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게 아니지요. 신이누구와 성교해서 낳은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영이 가장 미천하고 낮은 어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는 형식을 취한 것이에요.

구약도 소중합니다. 

유대교인은 신약이 없어요. 다만 히브리 성서 타나크( תַּ נַ" ךְ )가 있는데 구약인 셈이지요. 그러나 이걸 ‘옛날 약속’이라고 무시하고 헐뜯으면 안 됩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챙겨라’라고 말하며 약자를 배려했던 정신이 얼마나 빛납니까? 복음의 정수이기도 하고요. 새로운 진리는 구약에 있고 신약에도 있습니다. 구약을 두고 유대 민족주의의 ‘국뽕’의 향연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국수주의로 빠질 수 있는 민족주의가 있는가 하면 저항적 민족주의도 빠트릴 수 없습니다. 유대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신약 성경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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