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탄생 이야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마태복음에서는 누가복음과 달리 목자 아닌 동방박사가 찾아온다. 누가복음에서는 마구간 구유가 언급되는데 마태복음에는 없다. 크게 다른 것 중 핵심은 마태복음에서는 천사가 주로 남자들에 나타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여자들이 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누가복음 앞부분의 주역이다.

목자의 방문

마태는 출애굽을 해준 모세보다 더 위대한 분의 탄생으로 예수님 이야기를 그린다. 따라서 급에 맞게 다윗왕 같은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며 제국의 왕 옆에 있던 고급 엘리트(동방박사)가 와서 경배했다고 묘사한다. 반면, 누가복음은 목자 즉 사회 주변부 인생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찾아온다고 이야기한다. 벌써 누가복음이 가난하고 소외되며 힘든 사람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한밤중에’ 목자가 찾아온다는 것의 의미도 짚어야 한다. 목자는 양 떼를 지켜야 하기에 밤에 깨어 있다. 이는 매우 상당한 의미가 있다. 밤에 깨어 있는 사람에게 예수님 탄생 소식이 들려준다는 것이기에 그렇다. 생각해보라. 다윗도 목자였다. 원래 신분이 좋고 뼈대 있는 집안이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다. 예언자 아모스 같은 경우도 보라. 학자, 관료 등 엘리트 출신이 아니라 드고아의 목자였을 뿐이다. 아모스는 “근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을 주셔서 내가 이제 예언 역할을 한다”라고 했다.
누가복음에 나온 천사는 “오늘 온 세상에 미칠 기쁨의 소식을 주겠다”라고 했다. 이게 무엇인가? 바로 복음, 유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이다. 그러면서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태어나셨는데 그를 알아보는 표시로 ‘강보에 싸여 있는 아기’라고 했다. 그렇다면 구유 안에 누인 아기가 바로 구주를 표시한다는 뜻이다. 이 또한 누가복음의 핵심점이다. 새로운 세상에 미칠 진짜 기쁨의 구주는 무력한 존재라는 이야기이다. 엄청난 역설이다. 예수님이 태어나 누인 곳이 구유이다. 구유는 말 먹이를 담을 수 있는 통이다. 그런데 말은 로마를 표징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훨씬 더 큰 상징이 된다. 로마의 말 밥통에 누인 아기, 그는 로마의 밥이 된다는 말이다. 십자가에서 로마에 의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직시하면 된다.

가짜 평화 진짜 평화

그런데 천사가 무력한 예수 오히려 아무런 힘이 없는 갓난아기가 오히려 구원자라고 하는 것이 누가복음의 서사이다. 힘의 구도 아니 힘의 의미를 완전히 역전시키는 셈이다. 그래서 일까? 천사가 하는 말이 “하늘에서 영광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은 구원자 예수를 이야기하면서 평화와 연관시킨다. 그때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즉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됐다. 아구스도는 내전을 종식하고 최초의 로마 황제 됐다. 그래서 당시 로마 제국의 시민에게 칭송받았다. 이미지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말한다. “그것은 가짜 평화”라고.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 소식이 진짜 평화라고 말한다. 그런데 ‘온 세계에 미칠 소식’이라고 해놓고는 뒤에 가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만 평화’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말은 승리자에게만 미친 평화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정복 전쟁을 통한 평화는 정복 당한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로마에 평화는 피지배자의 평화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예수 태어난 곳이 동굴이다?

‘예수님 태어난 곳이 또 동굴’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마구간이든 동굴(사람의 안정적 거처)이든 본질은 다르지 않다.  당시 동물은 추운 겨울에는 집 안에 데려온다. 물론 안방은 아니다. 부엌에서 함께 생활하게 했다. 그래서 그곳에 구유가 있었다. 환영받지 못하는 이들, 짐승 취급받는 이들의 신세로 오신 예수님이다. 예수님 탄생 이야기에는 동물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은 이사야 1장 3절(“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 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다. ‘황소도 알고 나귀도 아는데 너희는 왜 저 로마 황제를 세상의 구주로 잘못 알고 있느냐’이다. 지금 로마의 피지배자는 호적 등록 중이다. 세금 더 뜯어갈 목적임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 태어난 시기는 아마 BC 4년일 것이다. 헤롯 왕이 죽었을 그 무렵 아들들은 저마다 땅을 얻었다. 그리고 바로 유대 베들레헴 그 땅은 헤롯 아들 중의 한 명인 아켈라오 아켈라우스한테 남겨준다. 그러나 통치를 너무 못하는 데다 포악하기까지 했다. 

헤롯 아들 아켈라오는 10년 동안 유대 베들레헴을 가혹하다 통치하다가 끝내 민중의 폭동을 자초한다. 로마는 이때 인구 조사령을 내린다. 이때는 AD 6년경. 그렇다면 누가복음이 말하는 예수님 탄생 시기는 마태복음(AD 4년)과 다르다. 그러니까 예수님 탄생 연도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당시의 분위기에 주목해야 한다. 곧 ‘착취하던 로마’의 실상이다.

탄생 시기, 지역 모두 다른 마태·누가복음

탄생 시기만 다른 게 아니다. 지역도 다르다. 마태복음에서 예수 부모는 본래 베들레헴에 살았다. 그런데 별이 베들레헴으로 왔고 이를 따라왔던 동방박사가 헤롯에게 찾아와 메시아를 물었으며 왕권 위협을 느낀 헤롯이 두 살 아래 남자아이를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예수 부모는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꿈이 지령하는 대로 나사렛으로 갔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반대이다. 원래 나사렛에서 살았다가 인구 조사 때문에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갔고 거기서 일을 마친 다음, 다시 원래 살던 나사렛으로 돌아왔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를 통해 로마가 제국을 지배하기 위해 권력을 행사할 때 예수님이 탄생하신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예수 가족을 보면서 살던 곳을 떠나 옮겨 다니는 모습은 오늘 우리 시대에 누구를 연상하게 하는가? 바로 난민이다. 예수도 떠돌이 신세였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성경 읽기의 기본자세 : 시대 배경 알기

우리가 아구스도보다 훌륭한 예수님이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니 다시 시대 배경 즉 사회적 맥락을 간과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된다. 우리의 믿음이 전인적으로 되려면 개인의 실존적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예수를 만나 스스로 죄인임을 자각하고, 내 죄를 사해주신 은총을 경험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성경의 교훈을 낳은 당시 역사와 사회 구조를 성찰해 오늘과 대조하는 것도 절실하다. 게다가 성경이 쓰였던 시절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던 시절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일례로 어린이 학살은 예수 시대 헤롯 때만이 아니라 모세 태어날 시기의 파라오(바로)의 악행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제노사이드가 있는가? 성경에서의 무차별적 살해에서 오늘의 고통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마태복음은 정치적 메시아를 갈망했던 유대민족의 여망에 초점을 맞췄다. 출애굽 시켜준 모세를 기억하고 확고한 독립국을 마련했던 다윗과 솔로몬을 기억한다. 

‘무력에 의한 정복’ 로마와 다른 하늘 권세 

그래서 예수 족보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뿌리로 거론한다. 누가복음은 어떤가? 제국주의 시대의 절대 권력인 로마의 실존을 부각한다. 그래서 족보가 아담까지 올라간다. 그래서 인류를 새롭게 하는 첫 번째 아들은 무력에 의한 정복이 아니라 그런 정의와 사랑에 의한 평화를 줄 주인공임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그러면서 세례 요한을 주목하라고 한다.

누가복음에서 묘사하는 세례 요한의 부모는 제사장 가문이다. 세례 요한의 모친인 엘리사벳은 임신을 못 한 여자였다. 게다가 나이도 많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하나 주의 천사가 나타나 부친 사가리한테 나타나서 애를 낳을 것이라고 한다. 흡사 아브라함 아내 사라와, 사무엘 모친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했다가 잉태한 것처럼. 이 두 개의 사건을 합한 게 세례 요한 탄생의 서사이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위대한 탄생이 있었으니 그것은 무명의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한 탄생이다. 구약에 한 번도 안 나왔던 무명의 동네에서의 탄생, 대단한 역설이다. 이것이야말로 성령의 개입이다. 

무명 동네 무명 여인으로부터 비롯된 혁명

게다가 마리아는 세례 요한의 부친과 달리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남자를 몰랐던 여인의 잉태는 무수한 고난을 예상하게 하는 일이었다. 고난 정도가 아니라 돌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을 믿고 그 일이 내게 될 줄로 믿는다고 했다. 이로써 아구스도보다 위대하고 세례 요한보다 훌륭한 존재인 예수는 이런 무명 동네의 무명 여인의 작은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천한 몸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희망하면서 순종하는 자에게는 기쁜 소식이 들릴 것이다, 그것은 하늘의 평화이고 정말 하늘의 영광을 받는 것이며 하늘 군대가 나타나서 (전쟁 아닌) 찬양하는 상황을 보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름 없는 여성의 몸에서 태어나셔서 아구수도에 비해서 너무나 초라한 예수님, 예수님의 탄생 자체가 전복적 혁명적 사건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찬사도 중요하다. 마리아와 시몬, 안나의 찬가를 보면 세상에 교만한 사람은 흩으셨고 낮고 천한 사람을 높이 세우셨다는 ‘전복적 개념’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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