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음식 먹었던 세례요한

그리스도교는 당연히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강조하지만 유대교는 그러하지 않았다.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 중에 어떤 부류는 요한이 메시아였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럴 수 없었다. 물론 여태 세례요한을 믿는 분파가 있다. 중동의 소수 종파로 남아 있다. 역사 기록자 요세푸스가 말하는 역사적인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예비하는 사람이라고 보는 상황 즉 성경에 기초한 세례 요한은 다르다.

마태복음 3장에는 요한의 옷을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낙타 털과 허리에는 가죽 띠라고 했다. 음식은? 메뚜기와 들 꿀이다. 이 내용은 마가복음에도 있다. 이건 세례 요한이 가난한 유목민들의 음식을 먹었다는 말이다. 고급 음식은 아니다. 세례요한을 가난한 자의 자리에 놓은 것이다. 근데 이는 명확하게 엘리아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언자라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예언자 계열 사람이고 그리고 시대의 지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소박하게 살았다는 것을 마가는 일깨워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누가복음에는 없다. 누가는 세례요한이 제사장 계열에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가난하고 소박한 음식 먹으면 안 된다고 봤던 것 같다. 이상하다. 누가복음이 가난한 자의 복음서로 정평이 나 있는데 왜 세례요한을 특권층으로 분칠하려는 것일까? 아니다. 누가복음에 나온 족보에서 예수님의 할아버지는 엘리였다. 즉 제사장이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자리를 제사장 가문 쪽으로 연결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세례요한이 싼 음식을 먹는 순간, 예수님도 낮출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누가는 세례요한을 뺄 수는 없기 때문에 오히려 예수님과 밀접하게 연결했다. 제사장 가문인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한 친척으로 말하고 싶었다. 만약에 우리에게 마가복음서와 마태복음서가 없고 누가복음서만 있었다면 세례요한이 뭘 먹고 살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주청취층이 달랐던 마태·누가복음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 주 청취자가 누구인지도 감별해 봐야 한다. 마태복음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에게 말한 것이다. 누가는 무리에게 하는 것이다. 마태는 잘 보면 상대가 있다. 그들은 설득 대상이다. 그러나 누가는 누구에게나 전하는 것으로써 보편적이다.

마태복음 3장 7절을 보면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나?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지 않나? 마태는 욕 먹을 놈에게는 확실하게 듣게 했다. 속으로는 온갖 나쁜 짓 하고는 아닌 척하면서 오히려 민중들을 착취하는 마당이었다. 이때 가난하고 소박한 자의 자리에 섰던 재야 지도자는 그들에게 돌직구를 날렸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너희가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혈연이라든가 지연이라든가 그게 같다고 패거리 안에 있다 해서 아브라함 자손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로 세례 주는 요한 VS 불로주는 예수님

그리고 다음이 중요하다. 불이다.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세례 요한이다. 그에 상대되는 개념, 불, 불은 예수님이다. 그리스도인은 지도자로서 세례요한의 위치를 존중하지만 그저 오실 메시아 즉 하나님을 준비하는 자이지 하나님의 영이 직접 와서 활약한 건 아니라고 봤다. 진짜 하나님의 영이 오셔서 활약했던 분은 바로 예수님이다. 근데 마가복음에 없는 불이 누가와 마테에는 있다. 마가복음에 없는데, 마태 누가복음에 있는 Q자로라고 우리는 이야기란다.

이 불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 불은 물보다 훨씬 세다. 세례요한은 ‘나는 물로 주는데 근데 그분은 너희에게 성령(즉 불)을 준다’라고 말했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를 안 받으면 나중에 불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불세례는 곧 심판인데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다.

근데 당시는 로마 지배했다. 압제당하고 사는 사람에게 무슨 회개할 거리가 있을까? 회개는 사실 개인적인 죄를 연상하게 한다. 친구를 미워하는 것 등.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는 한마디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이었다. 즉, 포로 상황에서 다시 원래 상황으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회개가 시급한 이스라엘 백성

왜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끌려갔을까? 그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사실 바벨론으로부터 예수까지가 14대가 지난 시점이다. 지금은 로마에 지배받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했기 때문에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벌로 강대국의 지배 상황에 놓은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세례를 두고 마가복음서은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고 표현한다. 누가복음서에도 보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언급된다. 그런데 마태복음서는 빼버려 없앴다. 그냥 회개하라는 말만 넣었을 뿐이다. 이는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님이 여기서 세례를 받는데 그렇다면 예수님도 죄가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래서 세례 요한이 자신에게 세례받으러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안 된다고 그랬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이나 누구든 자기들 대신 회개를 운운했다는 점에서 성전 기득권자는 불편하다. 성전에서는 속죄가 성전의 권한인데 세례 요한 등은 이 질서에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생각했던 회개는 매년 똑같이 하는 반복적인 정결 의식을 행하는 게 아니라 한번에 전적으로 모든 걸 회개하는 것이었다.

성전에서 나와 각 세우는 제사장 계열

세례요한이 제사장 계열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원래 성전에서 일해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현재 성전은 썩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썩은 자들의 반대편에 섰다. 세례요한이 성전의 기득권에 맞서 회개 운동을 펼쳐 질서를 바꾸려 했던 것도 그 이유이다. 그것도 매년 똑같이 하는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정결 의식이 아니라 한 번에 빠르게 모든 게 모든 걸 회개하게 하는 것. 메시아 출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라는 말을 음미해보자.

하늘나라와 하나님 나라

그런데 마가복음에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예수가 말한다. 이는 마태복음의 ‘하늘나라’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유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망령되이 일컫지 못하는 십계명 중 제4계명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인 땅에 있다는 전도서 말씀을 따라 유대교 전통을 존중하는 마태복음은 ‘하늘나라’로 바꿔 부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냐? 기본적으로 ‘하늘나라’와 같다. 다만 공간을 상징하는 ‘하늘나라’와 다른 점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점이다. ‘이 땅 위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으로 보는 게 옳다.

이런 메시지다. ‘지금은 로마 황제의 지배 아래에 있다. 근데 이제 곧 하나님이 다스릴 나라가 올 것이다’ 근데 ‘그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라고 물었을 때 세례요한은 ‘당장 온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예수님이 동의했다. 다만 ‘오시는 하나님’이 불로 심판 내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서둘러 회개 받아라’라는 세례요한

반면 세례요한은 ‘불로 심판하는 메시아가 곧 오시기 때문에 빨리 회개하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작마당’ 이야기가 있다. 선을 상징하는 알곡을 곡간에 쌓고 악을 뜻하는 쭉정이는 태우거나 썩혀 거름으로 쓴다. 결국 종말의 때에 심판을 뜻하는 서사이다. 세례요한은 이 시기가 임박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은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이제 어떡하나? 서둘러 회개하고 세례받자’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회개의 구체 방법을 일러준다. 속옷을 여벌 가진 사람은 그 속옷을, 또 먹을 것을 이웃과 나누라고 이야기한다. 로마에 보낼 돈보다 더 많이 걷어가는 세리에게, 또 무력 등 권력을 앞세운 군인에게 억지로 뺏지 말라고 강조한다.

잘못된 이단이 시한부 종말론으로 많은 사람을 현혹한다. 잘못된 종교적 욕망을 건드리면 일상생활을 파괴한다. 예수님의 종말론은 ‘사랑의 하나님이 오신다’라고 하면서도 일상생활 파괴에 선을 긋는다. ‘사랑의 하나님이 오시면 거꾸로 일상을 더 풍요롭게 살게 만든다’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리고 강자의 권력남용을 경계하며 정의와 평화,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세례요한, 예비자에서 증언자로

가장 이른 시기에 비교적 민낯 그대로 예수 전기를 기록한 마가복음서는 세례요한을 예수님의 예언자적 선구자로 그린다. 정말 세례요한이 한 그대로 예수님도 한다. 권력에 의해서 죽임당하는 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시간이 지난 뒤,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이 커져 그리스도 메시아의 정체성을 불어넣을 땐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배한 존재가 된다. 결국 세례요한이 예비한 것은 예수님이 된다. 제4 복음서인 요한복음서는 세례요한을 예비하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야말로 진짜 성령이 임하셔서 활동하신 하나님이라는 것,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증언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해 준 것이다.

신발 끈도 못 매는 이유

마가복음서에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세례요한이 거론된다. ‘몸을 굽혀서 신발 끈을 풀어주는 일’은 종이 한다.

당시 신발은 가죽을 오려서 구멍을 뚫고는 끈을 연결하는 것으로써 샌들 같은 모양새다. 한마디로 밑창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비스듬히 누워 식사하는 이스라엘 문화에서는 반드시 발을 씻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겼다. 종이 주인에게 할 일이다. 그 일을 예수님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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