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복음서 마태 마가 누가 모두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받는 장면들이 나온다. (마태 3장 13절, 마가 1장 9~11절, 누가 3장 21~22절) 마태복음에는 세례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실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라고 했다. 여기서 ‘성령’에 주목하자. 세례요한 시대에 언급된 성령은 사도행전 당시 승천 이후 열흘 뒤, 즉 오순절 때 임재하시기 전 상황이다. 세례요한이 언급한 ‘성령’과 같을까?

세례요한의 성령 vs 사도행전의 성령

‘하나님의 영’은 구약에서도 언급된다. ‘하나님의 활동’, ‘하나님의 입김’, ‘하나님의 바람(風)’이 그렇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거룩한 영’인데 그리스어로 하기오스 프뉴마(αγιος πνυμα)라고 읽는다. 구약시대 문헌을 보자. 삼손은 평범한 사람인데 하나님의 영이 임해 힘센 장군이 된다는 대목이 나온다. 다윗은 평범한 양치는 소년인데 하나님의 영이 임해 예언자가 된다. 바벨론 포로로 갔다가 돌아와 성전을 재건했을 때의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사람에게 임했음을 보여준다. 그 영은 하나님과 일체화된 것이다. 그런데 삼위일체 신학이 생기면서 그 성령에 인격적 개념이 들어갔다.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에 성령은 하나님이 임재해서 거룩한 영이 임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세례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라고 한다. 즉 세례요한 자신이 하는 물로 하는 정결 의식과 달리, 성령 세례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을 입은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존재론적 변화를 선포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예수를 만나 완전히 변했다, 육신의 욕망으로 살던 우리가 성령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덧입혀져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영을 입은 사람으로 바뀐다는 신앙고백이 성립된다.

복음서는 어떻게 쓰였나

예수님이 태어난 시기는 마태와 누가복음서를 근거로 해서 추정할 수 있는데 마태복음으로는 헤롯 대왕이 죽었을 때를 가늠할 때 BC 4년이다. 그렇다면 세례받을 때는 31세가 된다. 반면 누가복음 호적 조사로 하면 AD 6년이다. 그렇다면 예수님 나이 21살이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이 있다. 이것이 기록이 아닌 (구전) 전승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마가복음서는 AD 70년 초에 쓰였을 거라고 예상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31세에 지구에서의 사역을 마치셨다고 할 때 활약하시다 돌아가셨으면 40년이 지났잖아요. 그러니까 40년 동안 이 사람 저 사람 입에서 떠돌다가 어느 시점에 글로 기록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풍문’을 적은 성경? 결코 아닌데

그렇다고 ‘풍문으로 들었소’로 보면 안 된다. 자기 나름의 신학적 사유와 방향을 가지고 쓴다. 게다가 기록 주체가 어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인 것이다. 그 공동체가 수십 년 뒤, 당장에 처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 말씀을 재해석하면서 기록하고 편집한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전달했을 것이다. 다만 각각의 공동체(마태 마가 누가)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차이가 있다. 로버트 W. 펑크와 존 도미니크 크로산에 의해 1985년에 설립된 ‘예수 세미나’는 200명의 성서비평학자가 복음서를 기존 네 개에서 하나를 더해 ‘파이브(5) 가스펠’로 보고는 구절마다 색깔별로 분류했다. 그랬더니 전체 연구 대상 중 1.6%가 ‘예수가 실제 했었을 말’ 빨간색으로 분류했고, ‘그랬을 가능성이 있는 말’ 분홍색은 12.2%로 분류했다. 회색은 제자의 재해석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검은색은 완전한 허구로 본 것이다. 이 빨간색에 있는 것이 바로 이 세례요한 세례였다. 진보적인 성서학자가 봐도 세례요한 세례는 사실로 규정된 것이다. 참고로 빨간색 중에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대목이 나온다.

확실한 사실로 보이는 예수님의 세례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오셔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다”라는 말이 나온다. 마태복음에는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으로”라고 돼 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람이고, 세례요한은 요단강에 있다. 요단은 유대 예루살렘 근처에 있다. 사해 동쪽 부분인데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대다수가 거기 산다. 예수님이 살았던 갈릴리는 시골이고 촌이다. 요한은 확실히 이 대도시 언저리에서 있다가 광야로 나간 경우로 보인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그 구도 즉 시골 대 도시의 구도가 사라진다. 지역적 편견을 줄 만한 것을 싹 뺀다. 세계사 속에 예수를 조명하면서 예수님은 어느 지역에 국한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받은 것이 사실임을 ‘예수 세미나’도 동의한다. 자,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받은 것,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는 새로운 의제이다.

세례요한의 창안품 ‘세례’

세례는 정결 의식이다. 당시 세례요한에게 온 사람들은 세례에 앞서 요단강에 몸을 반쯤 담근 상태에서 ‘나 이런저런 죄를 지었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물속으로 그냥 푹 잠긴다. 하긴 죄가 없으신 분 아닌가? 그리고 물 위로 올라오신다. 그러자 성령이 내려온다. 이렇게 세례받은 것을 복음서 저자 중 맏형격인 마가는 어떻게 해석했을까?

세례는 세례요한의 창안품이다. 그런데 속죄의 장인 세례를 기독교는 내용을 바꿔서 새로운 의례로 승화시켰다. 바울은 로마서 6장 3~4절에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라고 했다. 세례를 예수님의 죽음하고 연결했다. 결국 새 기독교 공동체는 세례는 회개 정도가 아니라 이전의 내가 죽고 새 완전히 새사람이 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존재론적 변화의 징표로 해석했다.

‘세례받으면 존재 변한다’ 믿었는데

과학 문명에 익숙한 현대인에게 이 말은 와닿기 쉽지 않다. 그러나 2000년 전 사람들은 물세례를 통해 성령 세례를 받고 이로써 내 존재가 확 바뀐다고 생각했다. 문화인류학적으로 연구해 보면 아프리카 토착민들은 축제할 때 사자탈을 쓸 때 진심으로 자신이 그 동물로 변한다고 믿는다고 한다. 당연히 물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내 본질이 바뀐다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요한의 세례 형식을 자기네 종교의 개종 또는 입교 형식으로 가져갔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했을 때 삶의 전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실제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를 ‘성령 하나님의 영으로 완전히 바뀌었다’라고 고백한다.

왜 이렇게 하는 것일까? 유대교와의 차별화 때문이다. 유대교는 정결례와 유월절 희생 제사가 대표적 제의이다. 이에 기독교 공동체는 한 번의 세례로 입교하고 예수님과 함께했던 공동의 식사를 기념하는 성만찬을 앞세웠다. 이렇게 기독교는 유대교의 아류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종교, 형식적 의례적으로도 구분 선을 둔 새 종교가 된 것이다.

회개할 일 없는 예수의 세례

한편 마태는 세례요한이 세례를 안 주려고 한 점을 거론했다. 예수님은 이에 “그렇게 하라. 이러므로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룬다”라고 했다. 예수님은 회개할 아무런 잘못이 없어 세례를 받을 이유가 없는데 자기 의를 실현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은 것처럼 자기도 똑같이  그리고 겸손하게 백성과 함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예수님이 세례받고 마가와 누가는 “하늘이 열렸다”라고 기록했다. 정확하게는 하늘이 찢어졌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따르면 세상의 맨 처음엔 하늘은 물로 가득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궁창을 찢어 위와 아래의 물로 나누셨다. 새로운 세계를 여신 것이다. 그런데 마가는 예수님이 요단강 수면 아래에서 물을 찢으며 올라오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을 찢으면서 성령이 내려오신다고 했다. 예수님이 세례를 통해 새 시대를 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온다. 성경에서 비둘기가 등장하는 장면으로 홍수가 끝나고 돌아오지 않는 까마귀와 달리 두 번째 비둘기가 올리브 잎을 물고 돌아온다. 이로써 비둘기는 새로운 이상적 세계의 문을 여는 평화의 상징이 됐다.

비둘기는 왜 ‘평화의 상징’됐나

볼트만이라는 신학자에 의하면 고대 이집트하고 페르시아에서는 이 비둘기가 신의 능력을 상징하는 새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그다음에 또 그 노아의 새 시대를 여는 동물로서 그다음에 고대 신의 능력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비둘기는 대단히 영험한 존재이다. 그리고 이제 소리가 난다. “내가 하나님이다. 너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이사야 42장의 서사를 호출한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가 뭇 민족에게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소리치거나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거리에서는 그 목소리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할 것이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며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그는 쇠하지 않으며 낙담하지 않으며 끝내 세상에 공의를 세울 것이니 먼 나라에서도 그의 가르침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릴 것이다.“ (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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