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귀(逐鬼)를 앞세우는 공생애

마가복음 1장 21~28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앞부분에 왜 항상 귀신 쫓는 얘기가 나오나 하는 점이다. 예수님 기적의 종류가 크게 세 가지인데 하나는 병자를 치유하는 것이다. 다음은 귀신을 축출하는 것이다.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 다음은 자연 이적이다. 풍랑을 잠잠하게 한다든지 물 위를 걸어간다든지 오병이어의 기적이 대표적이다.
이 기적이 모두 역사적 사실일까? 자연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기에 의심하는 것이다.  18세기 영국 철학자 흄David Hume이 예수의 자연 이적을 연구했다.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이 임해도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무지성으로 믿어버리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면 성경이 ‘예수님은 초능력자’라는 것만 보여주는 셈이 되니까. ‘코로나에 걸려도 죽지 않고 하나님이 고쳐주신다’라는 믿음이 왜 나왔겠나?

예수 초자연적 행동의 배경

예수님의 기적은 초자연적 현상이 맞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를 어떻게 조화롭게 해석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기적을 은유로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자연과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 1세기 같이 지식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여러 사역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을 사실과 혼동하면 안 된다. 그런 식의 성경 공부로는 한국교회의 미래가 없다고 말하는 이들을 주목해야 한다.
구원을 경험하는 놀라운 체험이 은유로 표시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 이적이 됐든 병자 치유가 됐든 예수님의 기적을 전부 다 문자적 사실로만 이해해 버리면 예수님은 초능력자, 마술사 그 외에 아무것도 아닌 거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만나 경험했던 각각 사람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됐는지 그 상황이 새카맣게 빠지는 것이다. 
잘 보자. 성경에 나오는 기적 중에 예를 들어 하반신 장애를 가지고 계시는 분이 장애를 극복한 건 나오지만 예를 들어서 다리가 잘렸는데 예수님이 주문을 외고 다리가 늘어나는 그런 기적은 없다. 자연과학적인 것을 통째로 부정하는 기적은 거론되지 않는다. 

기적 이야기를 은유로 해석한다면?

따라서 성경에 있는 기적 이야기를 은유로 보고 이 안의 메시지는 무엇인지 주목해야 한다. 귀신 축출만 봐도 그렇다. 1세기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 회당이라고 하면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이 이야기는 보여준다. 예수님은 그런데 그것을 깨끗게 하시지 않았나? 더러운 영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는 영을 뜻한다. 그런데 유대교 회당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곳으로 통한다. 
당시에서는 회당에서 가르치는 것을 올바르다고 했고 그대로 안 하면 죄인으로 낙인찍혔다. 그런데 가만히 봤더니 그 유대교 회당에 있는 놈들이 더러운 영에 들렸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전이된 마귀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에게서 더러운 영을 몸 밖으로 내보낸 것이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제 영을 쫓아내고 나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기적은 가르침이 아닌 효능감

마가의 놀라운 점은 말로만 가르치는 건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질적인 효과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거야말로 행위와 가르침이 분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늘날 교회가 자본주의 영에, 권력의 영에, 개인의 탐욕과 시기와 질투, 거짓 뉴스의 영에 왜 물들었는가 그럼 이걸 쫓아내는 일을 우리가 하면 예수님 제자가 되는 것이 된다. 우리도 똑같이 귀신 쫓아내고 병자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이를 실행할 때 살아있는 믿음이 되는 것이다. 
기적이 어떤 종교 지도자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우리 사회 공동체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서로 취약한 이웃을 돌보면서 악한 기운을 떨쳐내는 그런 위대한 기적을 현세에서 펼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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