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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 1~16절에서 하나의 열쇠 말을 꼽으라면 ‘품삯’이다. 본문을 보면 아침 9시, 오후 3시, 5시에 포도원에 나와서 일한 사람 모두 품삯이 같다고 나온다. 이것이 문제였다. 아침 9시에 나와 제일 많이 일한 사람에게 더 챙겨주는 게 없었다. 이게 정의일 수 있을까 묻는다. 아마 본문을 읽자마자 한 100명 중 99명은 이런 마음일 것이다. 근데 성경을 쓴 저자는 예수님 즉 주인의 입장에 서 있다.

포도원 주인은 세 가지로 변명한다. 첫째, 합의를 봤기 때문이다. 13절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이것이다. 실제 이른 아침에 간 사람은 분명히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했다. 여기서 주인이 잘못한 거 없다.

두 번째, 주인 마음대로라는 것이다. 14절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오전 6시에 온 사람은 12시간 일했고 오후 5시에 온 사람은 한 시간 일했다. 이 역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주인 마음대로라니까. 주인은 그렇다면 왜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12(시간)분의 12를 줬을까? 이유는 한 가지다. 그가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서다. 그러나 품꾼은 그게 정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정의는 돈에 국한됐다. 잘못됐나? 아침에 인력 시장에 가면 나이 어리고 힘쓸 것 같다 싶은 사람이 1순위로 꼽히는 것은? 지금 우리의 기준이 자본화됐다. 그리고 그렇게 넋 놓고 자본화되는 순간 사람은 상품이 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이 포도원 주인을 두고 ‘일머리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주인은 그때 당시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돈 벌려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5시에 나온 품꾼의 생계를 위하는 것이었다. 복음서의 교훈은 이렇듯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역설의 기록이다.

3절을 읽어보자. ‘아고라’라고 하는 장터가 나온다. 토론하는 공간으로 이해하겠지만 실은 사고파는 시장이었다. 그보다 이곳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어떤 양파 파는 할머니가 장터에 나갔더니 부자로 보이는 사람이 모두 사겠다고 했다. 게다가 거스름돈을 받지 않고. 그러나 할머니는 사양했다. “나 팔고 나면 나 여기서 할 일이 없는데…. 나는 돈만 벌려고만 나온 게 아니라 사람들과 오순도순 대화도 나누러 왔어”라고 하며.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자본은 우리의 삶의 양식을 조작했다. 자본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지만 자본만으로 얻을 수 없는 게 많다. 할머니가 자본만 취득하려 했다면 외로운 삶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칼 폴라니는 ‘거대한 변환’이라는 책에서, “상당히 오래도록 인류는 자본을 통제해 왔는데 어느 순간 이것이 갑자기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그래서 인간마저 상품화됐다”라고 지적했다.

하나님 사랑은 능력이 없는 자에게도 베푸는 것이지 효능감만 봐서 있는 자에게만 불균등하게 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상한 갈대는 꺾어져야 하고 꺼져가는 심지는 다 꺼버려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적 삶이 아니다. 우리가 애를 낳았다. 큰아이는 능력이 있고 둘째 아이는 없다. 그러면 부모가 둘째 아이를 버려야 하나? 아니다.

오늘 제목은 ‘너의 정의는 자비로운가?’이다. 그 정의감이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인가, 자문해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이기심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자극해서 함께 사는 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 포도원 주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한한 재화를 갖고 가능한 많은 사람의 최저 생계비를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낙오된 사람들을 살게 해 줬다. 이게 왜 오늘날 중요하다고 하냐 하면 지구라는 생태계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욕망을 무한대로 자극해서는 안 된다. 지구 생명체가 함께 행복하게 살려면 인간이 그렇게 무한한 욕망을 추구하면 안 된다.

존 롤스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하버드대 교수였고 1971년에 ‘정의론’이라는 책을 썼다. 그의 주장은 단출하다. 1안은 포도원 품꾼 주장처럼 공로에 따라 차등화하는 것, 2안은 공평하게 똑같이 나눠주는 것이다. 앞선 것은 자유주의적 정의, 후자의 경우 평등주의적 정의라고 부른다. 이제 시대는 1안만을 이야기한다. 2안은 공산주의와 많이 닮았는데 소련과 동유럽 몰락으로 설 기반이 사라졌다. 기회를 균등하게 주고 똑같이 능력대로 일하고 그것대로 주는 것이 정말 평등한가? 정의인가? 자문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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