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세계의 위대한 성인은 책을 안 쓴다. 말만 한다.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가 그랬다. 대개 제자가 기억했다가 기록한다. 예수님도 그랬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다룬 복음서를 쓴 사람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예수님의 복음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여러 자료를 수집해 만들었다. 그다음 마태와 누가가 마가복음서를 보고 또 자신만의 복음서 자료(Q자료)를 모아 쓴다. 그리고 한참 후에 요한복음서 저자가 요한복음서를 만들어 작성했다. 다만 작성할 때는 각 복음서 저자가 속한 공동체가 처한 상황에 맞게 한다.
하버드대 하비 콕스 교수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책을 썼다. 그러면서 자신이 성경을 읽어온 역사를 이야기했는데, 그도 처음에는 문자적으로 읽었다고 한다. 그런데 학문적으로 다가가는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성경을 읽으려고 했다. 그랬더니 문자가 기록된 역사적 현장을 다 싸안으면서 그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뜻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사실 성경은 인간이 기록한 것이라 기억의 왜곡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문자적 읽기는 바람직하지 않다. 바울 사도도 문자에 얽매이는 사람이 아니라 문자를 넘어서 하나님의 영과 마주하는 경험 그래서 그 사이에서 하나님의 불꽃과 내 내면의 불꽃이 함께 만나는 경험을 하라고 말한다.

율법 교사의 예의를 가장한 도발

누가복음서 10장 25~37절은 성경을 읽는 훈련용으로 매우 유용하다.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나서 예수님께 질문할 때 시험했다고 했다.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것은 ‘네가 (율법을) 잘 아는지 내가 잘 아는지 한번 해보자’라는 뜻이다. 헬라어로 선생님(”(διδάσκαλε 디다스칼레)이라고 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영생은 ‘시간을 초월해서 사는 삶’이다. 결국 ‘하나님과 함께하며 절대 사라지지 않는 진짜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물어본 것이다. 이때 예수님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신명기 6장 5절을 인용해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힘을 다하고 내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라고 답한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바로 말씀하신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예수님은 교사에게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을 잘 기억하고 있으니 훌륭하다, 이대로 살라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 앎을 삶으로 승화해 나가야 한다. 신영복 선생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제일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 가슴에서 발로 가는 여행이라고 했다. 머리로만 알고 발로 안 살면 아무 소용 없다.

마태복음에 빠진 “네 힘을 다하여...”

교사의 이 답을 이미 예수도 언급한 바 있다. 마태복음 22장 34절을 보면 “내 마음을 다하고 내 목숨을 다하고 내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였으니”라고 했다. 그런데 신명기 원문과 무엇이 다른가? ‘힘’(내 힘을 대하고)가 빠졌다. 마태는 왜 힘을 뺐을까? 유대 로마 전쟁으로 힘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겼기 때문이다. 누가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교사에게 하게끔 했다. 
율법의 가장 큰 계명인 이웃 사랑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유대인에게 이웃은 오로지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교사는 ‘나는 이웃인 유대인을 어릴 때부터 내 몸처럼 사랑했다’라고 예수님에게 자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유대인에게 동족은 이웃이었어도 이방인은 아니었다. 에세네파는 자기 종파 외에 나머지 모두를 어둠의 자식이라고 했다. 

동족만 ‘이웃’으로 여기는 유대인들

이때 예수님은 유명한 비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한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 성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는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했다. 옷을 벗겼다는 것은 이 사람의 신분이 누구인지 모르게 한다는 뜻이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이었다 하더라도 옷 벗기면 못 알아보게 된다. 그래서일까? 유대인으로 식별하기 어려워서였는지 제사장, 레위인 등 유대인은 이 사람을 보고 모두 지나쳤다.

사마리아인의 선행 

다음은 유대인이 경멸해 마지않는 사마리아인이 나타난다. 왜 경멸하느냐? 북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었다. 그런데 점령자 아수르(아시리아)가 식민 정책을 쓰면서 유대인 여성을 강제 성폭행하고는 아이를 갖게 한다. 그들이 바로 사마리아인이다. 이후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경멸했다. 지금 예수님은 교사에게 누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쓰러진 사람을 구조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하며 교사에게 이것이 진짜 이웃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진짜 이웃이고, 그 이웃이 베푼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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