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 ‘큰아들’에 초점을 맞추자면

누가복음 15장 24~32절은 탕자가 돌아와 그를 위해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상황을 서술하며 화가 난 큰아들에 초점을 맞춘다. 일단 이 아버지는 부자가 아니다. 그러나 인격적으로 훌륭하다. 그래서 품꾼에게도 넉넉히 보상해 준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서 어떻게 탕자가 나왔을까?
살진 송아지를 잡으면 대략 200명이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명절이나 결혼 등 좋은 일이 있을 때를 위해 챙겨둔다. 그런데 탕자가 돌아오자, 아버지는 이 송아지를 잡았다. 이에 아버지 곁에서 성실히 일하던 큰아들이 화를 낸다. 아버지처럼 돌아온 동생을 환영하지 않았다.
아마 큰아들은 자신의 결혼식에 쓰일 송아지를 썼다는 점에서 화를 낸 게 아닌가 싶었다. 애초부터 형은 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우가 재산을 나눠서 집을 나가려고 할 때 붙잡지 않았다. 따라서 형제의 관계는 이미 틀어져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잔치 자리에서 큰아들은 초대받은 이웃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건 아버지를 모욕하는 행위이다. 신명기 21장 18~21절에는 “어떤 사람에게 아버지의 말이나 어머니의 말을 전혀 듣지 않고 반항만 하며 고집이 세어서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는 아들이 있거든 그 부모는 그 아들을 붙잡아 그 성읍의 장로들이 있는 성문 위에 회관으로 데리고 가서 그 성읍의 장로들에게 우리의 아들이 반항만 하고 고집이 세어서 우리의 말을 전혀 듣지 않습니다. (...) 호소하십시오. 그러면 성읍의 모든 사람이 그를 돌로 쳐서 죽일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서 당신들 가운데서 악을 뿌리 뽑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온 이스라엘이 그 일을 듣고 두려워할 것입니다”라고 돼 있다. ‘죽을죄’인 것이다.

아버지에게 ‘당신’ 운운하는 큰아들

아버지는 신명기식 해법 대신 타이른다. 큰아들은 “나는 이렇게 여러 애를 두고 당신을 섬기고 있고 당신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신 일이 없다”라며 섭섭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창녀들과 어울려서 당신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라고 원망했다. 그런데 원문을 보면 ‘아버지’가 아니라 ‘당신’이라고 했다. 이것 또한 둘째 아들 버금가는 아버지에 대한 완벽한 모욕이다. 스스로 주인과 종의 관계, 일 시키는 사람과 일하는 품꾼의 관계로 자신을 전락시키는 것이다. 즉 아버지는 자기를 큰아들로 예우하는데 말이다. 더 놀라운 게 있다. 
30절에 “(작은아들이)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이라고 한 부분도 보자. 작은아들이 어떻게 성매매했는지 큰아들이 알 수 있었을까? 게다가 먼 나라로 갔던 동생 아닌가? 이것은 ‘내면 욕망의 투사’라 하겠다. 이는 본인이 동생처럼 아버지가 미리 유산을 상속하면 부자 관계를 끊고 그 돈 받고 나가서 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러면 아버지와 함께하는 노동이 기쁨이 아니었다는 방증이다.

아들 지위 포기하려는 큰아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러나 아버지는 “얘야”라고 했다. 그러나 원문에는 “아들아”라고 돼 있다. 스스로 품꾼이 되겠다는 놈인데 아버지는 다시 그에게 아들의 지위를 확인시켜 준다. 당시엔 장자의 권위와 복도 상당했지만, 의무도 무거웠을 것이다. 큰아들을 매도할 일만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청중이었던 바리새인 너희는 지금 큰아들 처지에 있지만, 사실은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자일 수 있다. 근데 하나는 회개하고 돌아왔는데 지금 너희가 큰아들처럼 오히려 이탈하려는 것은 아니냐. 하나님은 당시 세리 등 약한 사람을 사랑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도 사랑한다”가 아닐까?
유튜브에 영화 ‘이집트 왕자’의 영상을 따온 ‘요게벳의 노래’라는 뮤직비디오가 있다. 여기에는 노래도 노래지만 댓글이 심금을 울린다. 아이가 자폐나 장애가 있는 상황에서 자식을 위해 애쓰는 부모님의 사연이 눈에 띈다. 힘든 삶의 구조에서도 부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어머니 아버지들에게 응원한다.

우리를 포기 안 하는 하나님

이 이야기를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엄청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했다. 일본 학자 미야타 미츠오의 ‘탕자의 정신사’를 보면 이사야 42장을 옮긴 마태복음 12장에 나오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비유한 것이라고 본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을 “어떤 경험도 상실하지 않으려는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배려의 이미지”로 기억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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