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처음’이 주는 의미는 항상 각별하다. 첫걸음은 늘 감동적이고, 첫사랑은 늘 아름답다.

‘마지막’이 주는 의미도 항상 소중하다. 마지막 한 걸음은 늘 감격적이고, 생의 마지막 순간은 늘 아련하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궁금한 점이 생긴다. 처음과 끝은 이처럼 각별한데 왜 ‘중간’은 각별하지 않았을까? 모두 똑같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 아닌가? 처음이건 마지막이건, 아니면 중간이건 모두 나에게 똑같이 소중한 것이다. 내가 처음과 마지막을 유난히 각별히 생각해서 그렇지 나는 늘 그런 소중한 시간을 살고 있다.

2002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은 처음과 마지막을 유난히 각별히 생각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가능성 효과(possibility effect)와 확실성 효과(certainty effect)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주류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은 처음이건 마지막이건 중간이건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월급이 100만 원이라면 그게 첫 월급이건, 중간 월급이건, 마지막 월급이건 똑같이 100만 원의 가치를 지닐 뿐이다.

하지만 실제 인간은 그렇게 살지 않는다. 우리는 첫 월급을 받으면 키워주신 부모님께 선물을 하고, 마지막 월급을 받으면 그날을 기념할 무언가를 남긴다. 인간은 주류경제학이 강조하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절대 아니라는 이야기다.

첫 걸음의 중요성 : 가능성 효과

도박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승률이 1% 높아질 때마다 1,000원을 더 걸 용의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 규칙을 항상 지켜야 한다. 1%의 가치는 늘 1,000원이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 도박을 해보면 사람들의 행동은 그렇지 않다. 갑순이는 평균적으로 승률 1%의 가치를 1,000원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갑순이는 모든 승률 1%의 가치를 다 1,000원으로 환산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도박의 승률이 0%에서 1%로 올라가는 순간 갑순이는 이 최초의 1%를 매우 높게 평가한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이 ‘내가 이길 수도 있는 게임’으로 바뀐 것에 감동해 3,000원 혹은 4,000원을 베팅한다. 
반면 승률이 40%에서 41%로 높아지면 어떨까? 이때에도 갑순이는 높아진 승률 1%에 감동할까? 갑순이에게 물어보라. “승률이 40%에서 41%로 높아졌다고? 그게 뭐 어쨌다고?”라며 짜증부터 낼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을돌이가 불치병에 걸렸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약이 개발됐다. 의사가 을돌이에게 “새 약을 쓰시면 아주 조금이지만 살아날 확률이 1% 생깁니다. 하지만 약값이 좀 비싸서 1,000만 원입니다. 해보시겠어요?”라고 권한다. 

대부분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단 1%라도 살아날 확률이 생겼다는 것은 “당신은 무조건 죽어요”라는 말을 듣는 것과 완전히 다른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을돌이는 생존확률 1%의 가치를 1,000만 원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인가? 이것도 그렇지 않다. 

을돌이가 불치병이 아니라 그냥 좀 위중한 병에 걸렸다고 가정해보자. 기존 약을 쓰면 치료 확률이 60%다. 그리고 이 약에는 건강보험이 적용돼 비용이 들지 않는다.
그런데 치료 확률을 60%에서 61%로 높이는 약이 개발됐다. 의사가 “을돌님. 기뻐하세요! 치료 확률을 무려 1%나 높이는 신약이 개발됐습니다. 1,000만 원만 더 내면 치료 확률이 61%로 높아진다고요!”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때 예상되는 을돌이의 반응은 “꺼져, 이 사기꾼아!”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처음’의 확률을 그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게임이 내가 이길 수도 있는 게임으로 변한 것에 감동하는 인간의 심리, 이게 바로 가능성 효과다.

마지막 걸음의 중요성 : 확실성 효과

그렇다면 확률 99%를 100%로 높여주는 마지막 1%는 어떨까? 사람들은 이 마지막 1% 역시 매우 중시한다. 마지막 1%는 ‘내가 질 수도 있는 게임’을 ‘무조건 이기는 게임’으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형제끼리 10억 원짜리 상속 분쟁이 붙었다. 갑돌이가 A변호사를 찾았더니 “저한테 맡기시면 99%의 승산이 있습니다. 비용은 1억 원입니다”라고 말한다. 반면 B변호사는 “저한테 맡기시면 승산 100%입니다. 대신 비용은 2억 원입니다”라고 권한다.
어느 쪽이 솔깃한가? 갑돌이는 변호사B를 선택했다(대부분 사람이 이런 선택을 한다). 99%도 높은 확률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100% 보장된 승리를 더 선호한다. 즉 갑돌이는 승률 1%에 1억 원의 추가 비용을 낸 셈이다.

그런데 갑돌이에게 어떤 변호사가 “1억 원 내시면 승률 40%를 보장해드리는데, 5억 원 내시면 승률을 41%로 높여드립니다”라며 접근했다고 가정해보라. 당장 “이 새끼가 장난하나? 승률 고작 1% 높이면서 1억 원이나 더 받아 처먹어?”라며 주먹부터 날릴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질 수도 있는 게임이 반드시 이기는 게임으로 변하는 마지막 1%에 유난히 감동한다. 카너먼이 말하는 확실성 효과라는 것이다.

권태기를 넘어서는 일상의 한 걸음

나는 “투쟁에도 권태기가 있다”는 말을 종종 한다. 세상은 민중들의 뜨거움을 연료로 변화한다. 문제는 우리의 변화에 대한 열망이 늘 일정하지 않다는 데 있다. 

우리는 언제 가장 뜨거워질까? 도저히 변할 것 같지 않은 세상에서 변화의 아주 작은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그 시점에 뜨거워진다. 이명박 박근혜가 집권한 절망의 9년을 지나 촛불집회가 시작되고 위대한 변화의 가능성이 느껴진 그 순간 우리는 광장에 모였다. 가능성 효과다. 

우리는 또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완성하는 마지막 순간에 뜨거워질 것이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마침내 우리가 꿈꾸는 공동체에 도달할 수 있을 때, 정상을 향한 마지막 한 걸음을 위해 우리의 심장은 다시 빨라진다. 확실성 효과다.

하지만 우리도 사람인 한, 이 뜨거움이 항상 유지되지 않는다. 첫걸음과 마지막 걸음 사이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안이해지고 둔감해진다. 세상은 분명 40%에서 41%로 변했는데, ‘그깟 1% 변한 게 뭐 대수라고’라며 코웃음을 친다. “42%를 향해 나아가자!”는 독려도 먹히지 않는다.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열정이 식으면 변화는 더뎌지고, 진보를 향한 연료는 고갈된다. 상상하기도 싫지만, 그들이 다시 세상을 장악할 수도 있다. 투쟁의 권태기는 이처럼 위험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심리를 극복해야 한다. 매순간 변화를 소중히 여기며 40%에서 41%를 향해, 41%에서 42%를 향해 끊임없이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 물론 우리도 사람이기에 그게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어렵더라도 해내야 한다.

거대한 역사 속에 우리는 이제 겨우 첫걸음 내디뎠을 뿐이다. 마지막 한 걸음까지 아직도 아주 먼 길이 남아있다. 2016년 겨울, 전국을 함께 누볐던 열정이 식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기까지 권태기를 이겨내고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싸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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