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종합일간지 기자 시절의 일화. 2년차 막내였을 때 신임 편집국장이 “각 부서별로 주니어 한 명, 시니어 한 명씩 국장이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들 가기 싫어하고 미루는 분위기에서 나는 막내라는 이유로 ‘사회부 주니어 대표’로 호출됐다.

대략 스무 명 정도 기자가 똥 씹은 표정으로 앉아있는데 신임 편집국장은 “허심탄회한 대화를 원한다”며 말문을 열었다. 자기가 편집국장이 됐으니 기자들이 뭘 원하는지 솔직하게 듣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허심탄회하게 말 해보라”는 국장의 독촉에도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국장이 답답했던지 “거기 맨 구석에 불쌍하게 생긴 애, 너부터 말해봐”라며 나를 첫 발표자로 지목했다.(국장님, 제 이름은 ‘불쌍하게 생긴 애’가 아니라 이완배입니다만?)
 아무튼, 나는 그때 “요즘 분위기를 보면 선배들이 다들 동아일보 기자로서 자부심이 떨어진다고 느끼는 것 같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짧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다음날 오전, 한 선배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했다. 

"야, 회장이 너를 보잔다. 점심시간에 OO식당으로 와"가 선배의 명령이었다. ‘아니, 그 높으신 회장님이 말단인 나를 왜 보자는 거야?’라는 의아한 생각으로 식당에 갔더니, 회장이 가운데에 앉아있었고 기라성 같은 선배 10여 명이 그 주위에 쭉 둘러있었다. 놀라운 것은 회장 바로 옆자리가 비어있었다는 사실! 즉, 그 옆자리는 내 자리였던 것이다. 당황한 표정으로 회장 옆에 앉았는데 회장이 대뜸 하는 이야기가 이랬다. 

“야, 네가 어제 회의에서 동아일보 기자로서 자부심이 떨어진다고 그랬냐?”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회사 분위기가 그렇다는…”
“너 오늘 당장 사표 쓰고 때려치워.”

와, 뭔 해고가 이렇게 앞뒤 맥락이 없냐? 국장이 불러서 회의에 참석했고,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래서 했을 뿐이다. 심지어 별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분위기가 그렇다는 이야기를 넌지시 했을 뿐인데 다음날 들려오는 게 회장의 해고 통보라니! 

순간 열이 확 뻗쳤던 또 다른 이유는 편집국장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었다.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래서 했으면 그걸 비밀로 해줘야지! 뭐 중요한 소식이라고 그걸 그대로 회장한테 일러바친단 말인가? 아무튼, 나는 그날 소중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누군가가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자”라고 권했을 때 절대 허심탄회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견제가 있던 시절과 그렇지 않은 시절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그 이야기를 듣던 선배 몇몇이 회장에게 거칠게 항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2년 차 막내한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느냐?”, “발행인이 지금 기자를 협박하는 거냐?”라는 목소리가 여기저기 터졌다. 

선배들의 분위기가 거칠어지자 회장도 “웃기려고 한 이야기야”라며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내가 장담하는데, 회장은 절대 웃기려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의 광기에 찬 눈빛(너 같은 새끼는 당장 해고해야 돼!)을 분명히 봤기 때문이다. 

이 일은 내가 그 종합일간지에 무한한 애정을 갖는 계기가 됐다. 회장 면전에서 당당하게 대들 줄 아는 선배들의 패기야말로 바로 내가 바라던 기자의 모습이었다. 그 어떤 권력에도 굴하지 않아야 하는 기자의 기개는 사주에게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물론 이후 그 선배들은 하나, 둘씩 숙청되거나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사주는 거의 절대권력을 가진 인물이 됐다. “사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기자들의 단결된 목소리”라던 동아일보의 전통은 삽시간에 사라졌다. 6년 차쯤 됐을 때 사주도 아니고 부장쯤 되는 사람이 나에게 대놓고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라고 면박을 주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그때 절감했다. 사주를 견제하는 선배들이 회사에 남아있었다면 이들이 절대 이렇게 오만방자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배들은 떠났고, 그 종합일간지는 역사에 죄를 짓는 보수화의 길을 걸었다. 누군가가 권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사실은 이토록 중요하다.

언론 권력에 대한 견제

"민주주의 국가는 단 한 번의 기근도 겪은 적이 없다."
 1998년 아시아 출신으로는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인도 출신의 위대한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Amartya Sen)의 유명한 명제다. 후생경제학의 대가(大家)로 불리는 센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과 ‘견제받는 권력’의 차이를 이 명쾌한 한 문장으로 설명했다. 

독재 국가에서는 독재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따라서 독재자는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다. 권력이 견제를 받지 않으니 독재자는 국민들의 삶을 걱정하지 않는다. 권력자는 원래 ‘다음 선거에서 내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어야 굶주린 국민을 돌보는 법이다.

반면 여당과 야당이 적절히 힘을 나누고 경쟁하는 나라에서는 국민이 굶어죽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 권력이 견제받기 때문에 권력자는 언제나 견제세력의 눈치를 본다. 권력자가 무소불위로 권력을 휘두르는 사태도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을 보자. 지금 한국 사회에서 견제를 받지 않는 대표적인 권력이 어디일까? 바로 언론이다. 그들이 휘두르는 권력은 외견상 다양한 형태를 띠지만 본질은 동일하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이라는 점, 그래서 그들은 그 권력을 마구잡이로 휘두른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언론이 독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눈치를 봐야 할 곳은 오직 광고주뿐이다. 광고주의 비위만 맞추면 그들에게는 독자도, 정의도, 언론의 사명도, 개뿔도 필요가 없다. 

이 폭주를 막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절실하다. 이미 수많은 시민이 언론 권력 견제에 나선 지 오래고, 또 그 힘이 모이고 있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시대가 바뀌고 있음을 절감한다. 언론만 이 변화를 모를 뿐이다. 

이 와중에 미디어 비평언론 『쩌날리즘』이 출간 소식을 알렸다. 사명감으로 무장한 신실한 이들이 이 일에 나섰다. 부디 이들의 노력이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향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뜨겁게 대변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가 아는 한, 이들은 반드시 이 일을 해낼 것이다. 이 담대한 도전에 진심을 담은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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