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나는 한때 기독교인이었다. 그것도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하지만 1991년 봄, 평생을 의지했던 종교를 떠났다. 강경대 열사가 목숨을 잃은 뒤 수 많은 민주시민이 스스로를 불태웠던 그 해였다. 내가 아둔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그것이 신의 뜻이라면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내 기억에 한 사흘쯤 방구석에 처박혀서 쉴 새 없이 기도했던 것 같다. 
"주님께서 이 무고한 사람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답해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정말로 주님을 따를 용기가 없습니다"라고 기도했다. 기도하면서 많이 울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비종교인으로 살았다. 오랫동안 기독교에 대한 관심도 갖지 않았다. 하지만 50세의 성탄절을 맞은 지금, 실로 오랜만에 기독교에 대해 짧은 생각에 빠졌다. 

 

호감은 경제적 자산이다

호감 경제학, 혹은 라이코노믹스(Likeonomics)로 불리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조지타운 대학교 경영학과 교수인 로히트 바르가바(Rohit Bhargava)가 만든 용어다. 바르가바에 따르면 호감은 건강이나 지식 못지않은 훌륭한 경제적 자산이다. 더 쉽게 말하면 호감은 돈이 된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어느 회사가 기부도 많이 하고 이타적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하자. 이기적 인간을 전제로 하는 주류 경제학 관점에서는 “아니, 왜 돈을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해 쓰는 거야?”라며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짧은 생각이다. 기부는 주류 경제학 관점에서도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부를 많이 하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명성은 소비자들에게 호감을 준다. 그리고 그 호감은 더 많은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동력이 된다. 그래서 바르가바는 이타성을 진실성과 함께 호감 경제학의 핵심 요소로 꼽는다. 

이런 사례도 있다. 우리나라와 달리 서구 사회에서는 의료 소송이 매우 일반적이다. 특히 환자의 생명이 걸린 사건일수록 소송 규모도 천문학적이다. 병원 입장에서는 소송을 당하느냐 안 당하느냐가 병원의 사활을 건 중요한 과제가 되기도 한다. 

1990년대 중반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한 번도 소송을 당하지 않은 의사들과, 소송을 당한 의사들의 특징을 비교하는 연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소송을 당한 적이 없는 의사들은 소송을 당한 의사에 비해 평균 3분 정도의 시간을 환자들에게 더 사용했다. 그리고 이들은 습관적으로 환자들을 향해 더 잘 웃고, 더 적극적으로 환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이 환자에게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우선 이렇게 해 보고, 다음에 그렇게 해 봅시다”였다. 환자들에게 습관적으로 따뜻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애걔? 고작 그런 이유로 소송을 덜 당했다고?’라고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의사가 단지 따뜻하게 웃고, 환자에게 관심을 보이고, 3분 정도를 더 쓰면 어마어마한 소송비용이 절약된다. 실제 미국 시카고 대학교 산하 벅스바움 연구소에 따르면 의사가 친절하고 더 꼼꼼히 처방전을 쓸 때 드는 시간과 비용에 비해, 그런 행동으로 얻게 될 이익(소송 회피)이 압도적으로 큰 것으로 나타났다. 호감이 곧 경제적 이익이라는 바르가바의 주장은 이렇게 입증된다. 

의인의 길을 사랑하시며,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시는

1991년 종교와 멀어진 이후 나는 한 번도 좋은 기독교인들과 친분을 나눌 기회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독교는 나에게 다소 비호감인 종교였다. 굴곡진 역사 곳곳에서 기독교는 독재와 타협했고 자본주의에 순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헌신적이고 정의로운 기독교인들의 뜨거운 투쟁이 셀 수 없이 많았음을 잘 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그런 분들과 가까워질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리고 이명박이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발언을 했을 때 나는 기독교에 남았던 희미한 미련마저 주저 없이 끊어버렸다. 

그런 내가 오랜만에 기독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하나다. 40대 중반부터 좋은 기독교인들을 가까이서 만났기 때문이다. 평화나무를 통해 알게 된 정의로운 기독교인들의 정의로운 투쟁은 30년 전 기억에서 지웠던 신의 모습을 다시 그려보는 상상으로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바르가바의 말이 실로 옳다. 호감은 진정 사람을 끌어들이는 훌륭한 자산이다. 똑같은 성경 구절을 읽고 똑같은 내용을 이야기한다 해도, 장로 이명박이 말하는 기독교와 전도사 김용민이 말하는 기독교는 나에게 완전히 다른 세계다.

상상해보라. 김용민 전도사가 “하나님은 이완배 기자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참 은혜로울 것 같은데, 이명박 장로가 “하나님은 이완배 기자를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됐거등여. 좀 떨어져서 이야기하시면 좋겠거등여” 이럴 것 같지 않나? 은혜는커녕 기분이 엿 같아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기독교가 더 민중 속으로 들어가기를 소망한다. 주제 넘는 이야기라 글로 쓰기가 망설여지지만, 내 짧은 생각에 가장 좋은 전도 방법은 종교가 민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민중들과 함께 호흡한다면 그 종교는 호소력을 갖는다. 그게 강남에 수백억짜리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는 것보다 훨씬 더 종교를 호감으로 만든다. 

거의 30년 만에 성경을 펼쳤다. 청년 시절 마지막까지 놓지 못하고 붙들었던 시편 146편을 다시 읽었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기억이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내 기억에 하나님은 분명 악인의 길을 굽게 하시고, 의인을 사랑하시며,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는 분이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하나님을 닮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한국 기독교의 운명을 가를지도 모른다. 성탄절을 맞아 이 땅의 모든 민중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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