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기본소득의 지지자로서 요즘처럼 행복한 나날들이 없다. 무려(!) 대권주자들 사이에서 기본소득에 대해 수준 높은 논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호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내 살아생전에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그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기본소득은 포퓰리즘이다!” 류의 조중동식 유치한 논리만 보다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진보적인 이견과 반론을 보니 우리 사회가 촛불혁명 이후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실감한다.

먼저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은, 나는 기본소득에 반대하는 진보적 대권주자들의 말도 충분히 경청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역시 지난 호 칼럼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나는 기본소득이 불변의 진리이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지 않는다.  또한 다름은 다름일 뿐 틀림이 아니다. 우리 모두 서로 조금씩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모두가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벗이라는 점을 수긍한 채 이 논쟁이 진행되기를 소망한다.
워낙 다양한 논쟁들이 높은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기에 내가 딱히 덧붙일 대목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최근 재난지원금을 보편적으로 지급할 것이냐, 선별적으로 지급할 것이냐에 관한 논쟁이 불붙으면서 가난을 선별하는 문제에 관한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는데 이에 관해 소견을 덧붙이고자 한다. 

가난의 원인이 무엇인가?

가난을 선별한다는 발상은, 그 선별을 통해 가난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도우면 가난을 치유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이어진다. 이 신념이 없다면 가난을 선별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이 말은 가난한 자가 가난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과 다시 일맥상통한다. 치유한다는 말 자체에는 가난을 질병과 비슷한 것으로 취급하는 사고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교육을 통해 가난을 치유하자”고 주장한다면 그 말은 “가난한 사람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이건 매우 진지하게 고민을 해봐야 할 문제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의 이유를 분석하고 가난을 치유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 대부분은 당연히 가난하지 않다. 그러면 가난하지 않은 그 사람들은 왜 지금 가난하지 않은가? 교육을 잘 받아서? 공부를 열심히 해서? 과연 그런가?

내가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서울대를 졸업해 재경행시를 패스하고 경제부처 고위 공무원이 된 사람이 복지정책을 짠다며 가난에 대해 열심히 분석한다고 치자. 그들은 자신을 ‘가난의 치유자’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만약 당신이 소말리아나 시리아에서 태어났으면 명문대를 졸업해 고위 공무원이 돼서 지금처럼 가난을 책상에서 분석하고 앉아있을 수 있었을까요?”라고 말이다. 장담하는데 그들 중 99% 이상은 서울대 졸업장을 따지 못한다. 명문대는커녕 지금도 하루하루 끼니를 위해 살인적인 노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무슨 말이냐면, 이 세상 그 누구도 가난의 원인을 제대로 분석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들은 왜 가난한가? 게을러서? 천만의 말씀이다. 내가 만난 가난한 민중들 대부분은 세상에서 제일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산업혁명 시기 하루 14~16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을 견디며 생계를 이어간 사람들보고 “너는 게을러서 가난하다”고 말한다면 여기서부터는 개그콘서트가 된다. 
 인격이 후져서? 이런 견해는 신자유주의라는 지옥문을 연 영국 총리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의 철학이었다. 40여 년 동안 극악의 빈부격차를 유발한 신자유주의의 출발은 “가난은 인격의 결함이다(poverty is a personality defect)”라는 대처의 한 마디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그런가? 자본주의 세상 어떤 곳에서도 제일 지독한 도둑놈은 자본가 계급에서 나왔다. 인격이 개판인데도 그들은 부자다. 아니, 오히려 인격이 개판일수록 부자가 되기 쉽다. 그래서 대처의 말은 멍멍이 소리다. 인격의 부족은 결코 가난의 원인이 아니다.

머리가 나빠서? 이게 가난에 대해 자본주의가 내리는 가장 그럴싸한 설명인데, 사실 이조차도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오류다. 프린스턴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인 엘다 샤퍼(Eldar Shafir)는 “머리가 나빠서 가난한 게 아니라 가난하기 때문에 머리가 나빠진다”고 질타한다. 
사람은 가난이라는 극한 상황에 빠지면 “먹고 살아야 돼” “내일을 뭘 먹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남지?” 같은 생존문제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다. 오로지 생존에만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뇌가 다른 지적 영역에서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다. 머리가 나빠서 가난한 게 아니라 사람을 가난의 울타리에 가둬놓으니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다”는 말은 실로 공허하다. 샤퍼 교수는 “교육을 안 시키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빈곤이라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교육만 바꾸는 것은 사람들한테 수영하는 방법만 가르쳐주고 망망대해에 던져버리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했다. 

“가난에 대한 아는 척을 멈춰라”

내가 제일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게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심리치료를 하는 것이다. 마음이 불안정해서 가난한 게 아니라 가난해서 마음이 불안정한 거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놓고 “아프니까 청춘이에요.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라고 백날 떠들면 문제가 해결이 되나? 명언 몇 마디 듣고 잠시 잠깐 마음이 위안을 얻을 수는 있어도, 다시 지독한 가난의 현실에 직면하면 마음은 5초 만에 피폐해진다.

이 긴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누군가가 가난을 선별해서 치유하려는 시도는 실로 무의미하다는 이야기다. 가난의 원인이 절대 제대로 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난을 선별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가 가난한 데에는 이유가 있구나”라며 자기를 탓하게 된다. 실업급여를 지급하면(물론 지급하지 않는 것보다 당연히 낫다. 실업급여를 지급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무능력해 일자리를 잃어서 가난하구나’라는 생각을 갖는다. 노인에게 연금을 지급하면(이것도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안 하는 것보다야 당연히 낫다) ‘내가 늙어서 가난하구나’라는 생각을 갖는다. 

하지만 실업은 개인의 무능함 때문에 생긴 사태가 아니다. 해고 노동자들이 무능해서 실직을 당한 게 아니지 않나? 늙어서 가난한 것도 아니다. 정몽구는 늙고 병들어 몇 년째 일을 하나도 안 하는데 매년 수십억씩 연봉을 받아가던데?

결국 이 문제의 본질적 해결책은 하나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그 누구도 가난하지 않게 만드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에 있다. 이유여하를 묻지 않아야 가난의 원인을 어설프게 분석하는 짓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을 선별하지 않아야 진정으로 가난을 해결할 길이 보인다. 
 그래서 기본소득의 지지자이며 유럽 사상계의 떠오르는 신성(新星)으로 불리는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의 일갈은 우리가 실로 깊이 새겨들을 만하다. 그는 말한다. “가난에 대해 아는 척 하는 짓을 제발 멈춰라”라고 말이다. 

지금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똑똑한 내가 나서면 가난을 선별해 치유할 수 있어”라는 오만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그 누구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답게 살아있을 권리를 갖도록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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