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기본소득 지지자로서 내가 주위 사람들에게 몇 년 전부터 강조했던 부분은 기본소득이 진보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기본소득으로 다른 다양한 복지제도를 축소할 수 있기에 보수 시장주의 경제학자 중에서도 이 제도를 지지하는 이들이 꽤 있다. 

이런 이유로 기본소득은 진보·보수 양쪽으로부터 환영받기도 하지만, 거꾸로 진보·보수 양쪽 모두로부터 욕을 먹기도 한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나는 ‘기본소득 지지자는 보수로부터는 빨갱이, 진보로부터는 시장주의자 소리를 듣는 일이 언젠가 생기겠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근 이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기본소득이 진보적 대권 주자와 보수적 대권 주자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 협공이 불편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답한다. 몇 년 전만 해도 기본소득은 협공을 당하기는커녕 사람들의 관심사에 아예 오르내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최근 이 협공이 시작됐다는 것은 그만큼 기본소득이 사람들의 관심사에 올랐다는 뜻이다. 나는 진심으로 이 기회가 반갑다. 

이 칼럼을 통해 누차 강조했지만 나는 기본소득을 맹신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본소득 또한 얼마든지 토론을 통해 보완, 발전할 수 있는 제도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은 왜 기본소득이 진보·보수 양쪽으로부터 모두 비판(혹은 지지)을 받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기본소득’ 진영 논리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이유
“기본소득은 사회주의 배급제도”라는 홍준표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 속임수”라는 최문순 

보수 쪽의 가장 무식한 공격은 예상대로(응?) 홍준표 의원으로부터 나왔다. 홍 의원은 지난해 6월 페이스북을 통해 “기본소득은 사회주의 배급 제도를 실시하자는 것과 다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건 실로 무식한 이야기다. 기본소득 지지자 중에는 신자유주의의 우두머리 격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가 있기 때문이다. 
 홍준표 씨야 무식해서 잘 모를 수 있지만,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는 보수가 물고 빠는 원조 보수 경제학자들이다. 홍준표 씨, 제발 어디 가서 “프리드먼이나 하이에크도 빨갱이다” 이런 소리는 하지 마시라. 진심으로 미친놈 취급을 받는다. 이거 다 당신 생각해서 해 주는 조언이다.

진보 쪽에서는 최근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이 논쟁에 가세했다. 최 지사는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기본소득은 우파의 정책이고 신자유주의의 거대한 속임수라고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이것도 이렇게 간단하게 이야기해서는 곤란하다. 최 지사의 말이 맞는다면 네덜란드의 신성(新星)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이나 벨기에의 석학 필리페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는 보수이거나, 신자유의주의의 농간에 속아난 학자들이 된다. 
그런데 그럴 리가 없는 거다. 인간의 협동적 본성에 천착해 지난해 다보스세계포럼에서 진보를 대표하는 학자로 슈퍼스타 반열에 오른 브레흐만이나, 자본주의 세상에서 인간의 자유와 삶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친 판 파레이스보고 “너 보수지? 그게 아니면 머리가 나빠서 신자유주의에 속은 멍청이인가?”라고 말하면 여기서부터는 코미디가 된다.

즉 기본소득을 두고 “저 자식은 빨갱이다”, 혹은 “저 자식은 신자유주의자다”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하등 쓸데없는 소리라는 이야기다. 보수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이유가 있고, 진보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이유가 있다. 또 보수가 기본소득을 싫어하는 이유도 있고, 진보가 기본소득을 싫어하는 이유도 있다. 

이 사실을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기본소득에 대한 진실이 보인다. 그런데 이 사실을 무시하면 “기본소득은 빨갱이 정책”이라거나 “기본소득은 신자유주의자의 속임수” 같은 수준 낮은 선동만 난무한다. 기본소득에 관해 토론할 때 이런 단순한 진영 논리를 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철학의 깊이가 다르다

그렇다면 진보의 기본소득과 보수의 기본소득이 갖는 근본적인 차이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을 인간에 대한 관점과 철학의 차이라고 본다. 진보의 기본소득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자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반면 보수의 기본소득은 인간 세상을 운영하기 귀찮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의 우두머리 하이에크가 기본소득을 옹호한 이유는 “모든 국민이 일정 수준 이상의 생활을 누림으로써 정부에게 이것저것 요구할 필요가 없는 사회가 이상적이다”라는 소신 때문이었다. 즉 가난한 사람이 증가하면 사회가 불안해지므로 이것을 해결해야 하는데,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시장 개입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러다 보니 나온 아이디어가 기본소득이다. 복잡하게 복지제도 설계한답시고 정부가 이런저런 일에 개입하지 말고, 기본소득으로 한 번에 퉁 쳐 돈을 지급해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하이에크의 생각이었다. 

반면 진보의 기본소득은 민중들의 삶 그 자체의 해방을 위해 시작됐다. 예를 들어 판 파레이스는 기본소득의 철학을 ‘인간의 자유’로부터 찾았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사람이 인생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권리를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민중들은 대부분 이 권리를 박탈당했다. 생각해보라. 지금 하는 일을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우리는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일을 하고,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정년퇴직 뒤에도 일거리를 찾는다. 이것을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있나? 내가 보기에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버티는 것’이다. 

그래서 판 파레이스는 자본주의 300년의 역사를 민중들로부터 자유를 박탈하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물론 자본주의도 말로는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그 자유는 기업이 돈을 벌 자유일 뿐, 민중들이 실질적으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자유가 아니다. 판 파레이스가 1995년 출판한 책의 제목이 <Freedom for All(모두에게 자유를)>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실시되면 민중들은 ‘자본주의가 나에게 강요한 삶을 거부해도 나는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갖는다. 이 보장이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40세에도 인생 2막을 설계할 수 있다. 우리의 아이들은 그 빛나는 청춘을 영어와 수학 공부로 낭비할 필요가 없다. 즉 기본소득은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자유를 보장한다. 이게 바로 진보가 꿈꾸는 기본소득이다. 

이처럼 보수의 기본소득과 진보의 기본소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게 똑같이 보여서 “기본소득은 우파의 속임수”라고 말하면 건강한 논쟁은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이 문제를 검토할 때 “너는 빨갱이다”라거나 “너는 신자유주의자에 속았다”는 식의 낮은 수준의 이야기는 제발 멈췄으면 좋겠다. 우리의 지성이 이 정도에 머무른다면, 기본소득이고 뭐고 한국 사회는 그 어떤 지적인 발전도 이뤄낼 수 없다. 물론 나는 우리 사회의 지성이 이것보다는 훨씬 뛰어나다고 믿는다. 부디 이런 단순한 진영 논리를 극복하고 기본소득 논의가 더 발전적으로 진행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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