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중앙노동위원회 부당해고 판정을 앞두고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가 상암 MBC 앞 광장에서 ‘MBC 방송작가 부당해고 구제 및 근로자성 인정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사진=평화나무)
지난 19일 중앙노동위원회 부당해고 판정을 앞두고 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가 상암 MBC 앞 광장에서 ‘MBC 방송작가 부당해고 구제 및 근로자성 인정 촉구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사진=평화나무)

참 긴 세월이었다. 방송 제작 현장에서 늘 그림자처럼 보이지 않았던 방송작가들의 업무가 ‘노동’이라고 인정받기까지. 그동안 누구도 우리의 일을 노동이라 이야기하지 않았다. 방송국은 방송작가를 비롯해 차마 다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직군의 비정규 노동으로 굴러간다. 방송사의 긴 파업에도 방송이 별 탈 없이 나갈 수 있었던 이유다. 섭외와 촬영 준비 및 구성, 편집 구성, 내레이션 작성을 포함해 출연료 지급 관리나, 협찬 기획안까지, 방송을 만드는 데에 핵심적이고 반드시 필요한 일들이나 업무 영역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일들을 프리랜서인 작가가 도맡고 있다. 

방송작가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봤을 거다. 주말 휴일 없이 종일 일에 매달리면서 그 흔한 퇴직금 한 번 못 받는 게 과연 합당한 것인지. 매일 같이 고민했으나 쉽게 목소리내지 못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했으니까. 방송국은 그런 곳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비정규직의 노동을 주제로 한 방송을 수없이 만들면서 정작 스스로의 노동권에 대해 반문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가’, ‘프리랜서’라는 허울로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적인 노동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뒤통수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난해 6월, MBC의 <뉴스투데이>라는 프로그램에서 10년여간 일해온 작가 두 명이 전화 한 통으로 해고당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일 아침에 진행되는 생방송을 위해 새벽 3시에 방송국으로 출퇴근했던 작가들이었다. 개편을 이유로 해고를 당했지만, 개편은 없었다. 이름만 살짝 바꾼 동일한 포맷의 코너가 계속됐다.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었을 부당한 해고다. 그녀들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던 과거의 나, 동료 선후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기자와 동일한 업무를 수행한 작가가 계약 기간을 남겨놓고 부당하게 해고당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두 작가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냈다. 하지만 문전박대당한다. 당신들은 ‘근로자’가 아니기에 부당해고를 다툴 여지조차 없다는 것이다. 

김한별 방송작가유니온 지부장 (방송작가유니온 제공)

‘근로자’란 대체 뭘까? 근로기준법에는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에 관계없이,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라고 쓰여 있다. 우리가 임금을 목적으로 일한 것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지. 작가라는 타이틀에는 으레 ‘창작’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방송작가들의 업무에서 글 쓰는 일을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하지만 MBC는 그 일부분을 가지고 방송작가의 업무가 노동이 아닌 자유로운 창작이라 주장했다. 기자의 기사 작성은 노동이고, 방송작가의 원고 작성은 창작인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들의 업무가 ‘창작’이 아닌 ‘노동’이라는 것을 어떻게 더 증명해야 하는지 참담함과 억울함을 느꼈다. 더이상은 이렇게 억울한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0여일 간 상암 MBC 앞에서 ‘방송작가도 노동자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었다. 

우리보다 앞서 ‘방송작가도 노동자’ 임을 외쳤던 여성들이 있었다. 20년 전 대구와 마산의 MBC에서 일했던 방송작가들이다. 살인적인 노동강도, 저임금, 피디와의 차별 등이 극심했던 1999년에 그녀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방송사와의 교섭을 요청한다. 하지만 방송사는 응답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법상 ‘근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헌법으로 보장된 노동3권을 누리겠다는 소박하고도 담대한 의지였으나 법원에서도 가로막힌다. 결국 행정 항소심에서 방송작가의 노동자성과 단결권은 부정당하고 이후 대구 마산 MBC 방송작가 전원은 해고당한다. 세상이 언젠가는 변하리라는 믿음으로 대법원 판례를 남기는 것은 보류했다. 길고 지난한 과정을 감내하면서 선배들이 얼마나 뜨거운 눈물을 삼켰을지 생각하면 울컥 눈물이 났다.

10여일 간의 MBC 앞 1인 시위를 마치고 지난 19일 중앙노동위원회 심문 당일, 기자회견 후 중노위가 있는 세종시로 내려갔다. 1시간 30분여 심문 동안 MBC와 해고 작가의 공방이 이어졌다. MBC는 20년 전 대구 마산 MBC 작가들의 고등법원 판례 속 논거로 <뉴스투데이> 작가들의 근로자성을 부정했다. 20년 전 선배들의 바람대로 세상은 과연 바뀌었을까? MBC는 방송사의 업무지시는 없었고 작가 스스로 자유롭게 일 한 것이라고 했다. 정말? 우리가 출근 도중 차를 폐차해야만 하는 중대한 사고를 당해도, 아버지가 돌아가신 당일에도 진정 자유로운 의사로 바로 생방송 시간에 맞춰 출근한 것일까? MBC 주장을 듣고 있자니 세상은 전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심문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이기면 맥주 마시고 지면 소주 마시자는 농담도 던졌지만 마음은 내내 불안했다. 

서울에서 세종까지 왕복 300km. 몸과 마음이 탈탈 털린 채 결과를 기다렸다. 그러던 저녁 8시, 기적 같은 문자가 도착했다. 결과는 ‘초심 취소’. 이들의 근로자성을 부정했던 지노위 판정을 취소한다는 뜻이다. 네 글자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이 네 글자를 위해 그동안 얼마나 달려왔던가. 해고 당사자인 두 작가들과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두 작가는 당당하게 MBC로 돌아가 일주일에 하루는 유급으로 쉬면서 일을 하고, 한 달 꽉 채워 일하면 하루는 연차를 쓸 수 있다. 1년 이상 일을 하면 퇴직금을 받고 권고사직을 당하면 실업급여로 보호받을 수 있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할 대구 마산 선배들과 전국 2만여명의 방송작가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무늬만 프리랜서로, 창작이라는 허울에 가려져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우리들의 노동이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첫 단추를 꿴 것이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이 만들어진 이래로 방송작가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라는 행정 판정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작가는 “이번 사례를 시작으로 모든 방송작가에게 노동권이 보장되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제 두명의 작가들과 비슷하게 일하고 있는 모든 작가는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으며 일해야 한다. ‘방송작가도 노동자다’라는 이 당연한 명제를 인정받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작은 댐의 균열 하나다. 이 작은 균열로 만들어갈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한별 방송작가유니온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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