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어렸을 때 잠깐 부산에서 산 적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부산에 대한 별 추억이 없다. 5~6세 때 광안동에서 살았다고는 하는데 워낙 어렸을 때 일이어서 그런지 작은 마당이 있는 주택에서 살았다는 기억 외에 생각이 나는 게 거의 없다. 

일곱 살 때 서울로 올라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부산 사투리도 금세 고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내 말투, 억양에는 경상도 사투리가 전혀 없다. 물론 어려서 그곳에서 자란 ‘네이티브 스피커’인 덕에 영화나 드라마에서 억센 경상도 사투리가 나오면 다른 사람들보다 잘 알아듣기는 하는 편이다. 

성인이 돼서도 부산을 찾을 일이 많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것을 원체 싫어하는 데다 식성이 생선보다는 육고기파(삼겹살에 환장함)여서 해산물에 대한 로망이 별로 없었던 탓이다. 바다를 보고 “멋지다”를 남발할 정도로 낭만적인 성격도 못 된다. 수영을 못해서 그런지 바다를 보면 겁부터 집어먹는다. 

그런데 성인이 된 뒤 부산에 대해 놀라운 기억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경제의속살 상·하권’을 출간한 뒤 영광스럽게도 북 콘서트라는 것을 하게 됐는데, 방문한 첫 도시가 부산이었다. 

객석을 못 채우면 어쩌나 전전긍긍하면서 부산을 방문했을 때 나는 상상도 못 한 열기에 충격을 받았다. 객석을 가득 메운 부산 시민들의 열기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10만 배쯤 더 강했다. 더 놀라운 것은 시민들 간의 유대감이었다. 처음 본 사람들인데도 처음 보지 않은 사람들처럼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며 행복해했다. 

도통 분위기에 적응이 안 돼 북 콘서트를 마치고 술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이야기를 들은 이정무 민중의소리 경영기획실장이 피식 웃으면서 “네가 무식한 소리 하는 거지”라고 핀잔을 줬다. 

“왜? 부산이라고 열기가 유난히 뜨거울 이유가 뭐야? 사람들끼리 유대감은 왜 저렇게 강한 건데?”라고 묻는 나에게 이정무 실장은 이렇게 답했다.

“너, 부산에서 진보적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아?주변은 온통 보수고, 선거만 했다 하면 저쪽 당이 무조건 집권해. 그런 도시에서 진보적 삶을 살아간다는 건 한 마디로 지역사회에서 완벽하게 고독한 왕따가 되는 거야. 그거 엄청 외롭고 서글픈 일이다? 그런데 아까 모였던 그분들은 그 왕따의 삶을 각오하고 10여 년 넘게 싸운 투사들이라고.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안 열정적이고, 어떻게 안 끈끈할 수 있겠냐?”

외로움이란 무엇일까?

외로움은 학문적으로 절대 간단한 감정이 아니다. 사회신경과학의 창시자로 꼽히는 시카고대학교 존 카치오포(John Cacioppo) 교수는 “외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인간이 원래 함께 살도록 진화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인간을 비롯한 어떤 동물도 더 나은 생존과 더 나은 번성을 위해서 끊임없이 진화해왔다. 더 진화된 동물일수록 생존과 번성의 유전자가 몸에 더 완벽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사실은 포유류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수컷과 암컷이 성을 대하는 태도가 매우 다르다. 대체로 수컷은 성에 개방적이고 암컷은 보수적이다. 그런데 이것도 생존과 번성을 위한 유전자적 본능과 큰 관련이 있다. 수컷이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는 방법은 가능한 한 많은 암컷과 성관계를 맺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일에 별 시간과 노력이 안 들기 때문이다. 그냥 성관계를 갖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성관계 횟수가 많을수록 자신의 유전자가 생존할 확률이 높아진다. 반면 암컷은 아기를 임신하면 일단 몇 개월이 걸린다. 게다가 아기가 태어나면 그들을 돌보는 데에도 또 몇 년이 걸린다. 수컷에 비해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달하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러니 암컷은 수컷에 비해 성관계를 갖는 일에 훨씬 신중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수컷의 유전자를 신중하게 골라야 자신의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전달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왜 형성된 것일까? 인간은 협동을 통해 더 나은 생존과 번성을 허락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바나의 연약한 잡식동물 인류가 번성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협동하는 삶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협동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고립되면 인간은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 이때 뇌는 ‘지금 뭔가 네 생존에 심각한 위기가 닥쳤으니 빨리 대비하라’는 신호를 내린다. 이 신호가 바로 외로움이다. 외로움이 고통스러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외로움이 즐거운 감정이라면 인간은 외로움을 벗어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피가 나는데 고통스럽지 않으면 치료를 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죽음에 다다를 것이다. 하지만 상처가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그것을 치료한다. 외로움도 고통스럽기에 우리는 그것을 피하려 한다.

부산의 민주시민을 외롭게 만들지 말자

다시 북 콘서트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그때 이정무 실장의 이야기를 듣고 실로 큰 충격을 받았다. 날라리 운동권이기는 했어도 운동 진영 언저리에서 밍기적거렸던 덕에 나는 그런 외로움을 별로 느낀 적이 없었다. 주변에는 늘 나보다 뛰어난 운동가들이 차고 넘쳤다. 종합일간지에 다닐 때도 나를 절대 외롭게 만들지 않았던 수많은 동료들이 있었다. 그래서 삶이 좀 퍽퍽하긴 해도, 고립무원의 땅에 혼자 내버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부산의 민주시민들은 수십 년 동안 그 외로움을 견딘 것이다. 이 지면을 통해 그 사실을 몰랐던 철없던 나 자신에 대해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 
 부산의 민주시민들이 수십 년 동안 느꼈을 외로움에는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책임이 있다. 1990년 민주자유당 합당으로 부산이 보수화됐을 때부터, 그곳의 민주시민들은 그 외로운 싸움을 시작했다. 우리는 그들의 외로운 투쟁에 충분히 공감했는가? 주변으로부터 빨갱이 소리 들어가면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그 책임감을 충분히 나누었는가?  나는 이 질문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다시 또다시, 부산의 민주시민들을 향한 뜨거운 연대와 감사를 전한다. 당신들이 외롭지 않을 때까지 나는 연대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겠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외로움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그것을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협동과 연대로 그들의 외로운 손을 잡아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어떻게 회복한 땅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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