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장군 외조카의 신앙이야기

 

권지연 평화나무 기자(권지연) : 하나님의 공의를 바로 세우는 시간 카이로스 시작하겠습니다. 함께하실 분들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보이는 쪽에서 가장 왼쪽에서부터 소개하겠습니다. 평화나무 공명선거감시단장 김디모데 목사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김디모데 평화나무 공명선거감시단장(김디모데) : 예, 안녕하십니까.

권지연 : 점점 피곤해 보이세요.

김디모데 : 제보가 빗발쳐서

권지연 : 네. 면봉을 소지하고 다니신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웃음)

김디모데 : 제보가 많은 만큼 그만큼 불법 행위가 많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부끄러운 일이죠.

권지연 : 그렇죠, 평화나무 이사장 김용민 PD 오셨습니다.

김용민 평화나무 이사장(김용민) : 네, 안녕하세요.

권지연 : 홀쭉해지신 것 같아요. 

김용민 : 그래요? 다행입니다.

권지연 : 다시 (살을) 찌워드려야겠습니다. 오늘 또 특별한 손님 오셨습니다. 김성신 평론가님이신데요. 이력이 굉장히 다양하십니다. 일단 일산은혜교회 교인이시고요. 그리고 김재규 장군의 외조카십니다. 

김용민 : 아, 그러시군요. 아이고.

권지연 :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력 쩌날리즘 구독자입니다. 평화나무를 사랑해주시는 분이죠. 

김성신 평론가(김성신) : 그게 제일 자랑스럽습니다.

권지연 : 간단하게 이력 말씀드렸지만 직접 한번 좀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김성신 : 직업은 출판평론가입니다. 그래서 출판 쪽에서 일을 해왔고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강연하고 신문에 기고하고 이것이 제 주 직업이고요.

권지연 : 방송도 많이 하시고 진행도 하시고

김성신 : 출판평론가 자격으로 방송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김용민 : 책을 많이 읽으시는

김성신 : 책읽는 게 직업 사실 옛날 같으면 그냥 100년 서생이잖아요. 그게 이제 현대에서 직업이 됐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권지연 : 책 몇 권 읽으세요. 두 분도 많이 읽으시죠

김용민 : 책을 많이 사는 편입니다. 제목을 많이 읽었습니다. 제가

김디모데 :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으로 보는 분위기가 많아서요. 그럼에도 책을 사서 읽으려고 노력을 많이합니다. 

김용민 : 질감으로 있는 부분도 있거든요. 그냥 눈으로 읽으면 순식간에 올리고 그냥 막 이러다 보면 제대로 읽은 거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김성신 : 그렇습니다. 책의 의미가 좀 많이 해체되고 확장됐다 이렇게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꼭 이렇게 종이 책으로 돼 있는 것들만 의미 있는 책이 아니고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이제 다양한 플랫폼과 다양한 형태들을 통해서 책들을 읽기 때문에 가령 누가 페이스북 같은 곳에다가 일목요연하게 뭔가 잘 정리해 놨다면 사실 책 한 권보다 그게 더 저한테 주는 정보나 지식의 양이 더 많지 않습니까. 그것도 저는 책이라고 보고요. 누구보다도 책을 제일 많이 읽으실 수밖에 없는 분들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김디모데 : 요즘은 성경도  책으로 안 읽고 (소리로) 들으시더라고요. 그러니까 1독 2독했다는 걸 옛날에 성경책을 읽어서 독한 걸로 이제 취급하는데 요새는 성경을 성우가 해주는 거를 빠른 재생으로 듣고 일독으로 치더라고요. 

김용민 : 그건 1청이죠. 

권지연 : 1청. 부끄럽습니다. 책을 좀 읽어야 하는데 점점 책을 못 읽고 있긴 합니다. 

김성신 : 근데 출판평론가로서 그 얘기는 이런 기회에 꼭 한번 해보고 싶은데요. 책을 안 읽는 게 아니에요. 현대인들이. 아까 말씀드렸듯이 책의 의미가 해체돼서 굉장히 광범위해졌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훨씬 더 책을 많이 읽고 있고요. 실제로 우리나라가 연간 책이 7만 종이 새로 나와요.

이게 전 세계에서 한 7등 정도 되는 규모거든요. 출간 종수 규모로 해서. 인구 5천만밖에 안 되죠. 영미권만 하더라도 6억, 스페인어권 10억, 중국도 15억 이렇게 되는데 우리는 인구 5천만 가지고 7만 종의 책이 나오거든요.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오고 많이 읽는다고 봐야 돼요. 그런데 이게 사실 출판사가 경영이 어려운 거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독자들이 책을 안 읽는다 덜 읽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냥 종이책 출판사의 경영이 어렵다는 의미지 실질적으로 독서율이 떨어지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이제 자꾸 우리가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는 거죠. 내가 덜 읽고 있나 보다, 못 읽고 있나 보다, 그런데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책을 가장 많이 읽고 있는 쪽이 아닌가, 책 읽지 않는 나라의 국민이 지금 뭐 선진국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정도의 문화적 수준을 만들 수가 없거든요. 그러니까 앞뒤가 안 맞는 얘기죠. 책 많이 읽으시는 겁니다. 그 얘기 이렇게 유명한 매체에 와서 해보고 싶었어요.(웃음)

김용민 : 옳은 말씀입니다. 또 출판사들이 뭐 양사만 내면 몰라요. 유행에 민감한 몇 달 후에는 갖다 버릴 폐지상에 내놓을 그런 책들도 많이 양산하고. 책이 별로 없었을 때는 도서관의 개념이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1년에 7만종이 나오면 도서관에서는 그 책들을 어떻게 다...

김성신 : 그러니까요. 책을 선별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어떤 역할이 된 거죠. 그래서 공공도서관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의미가 더 중요해졌다.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김용민 : 그 책들이 많아진다고 건물을 더 크게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김성신 : 그렇다고 무조건 그 많은 자료를 다 비치해 놓는다고 좋은 것도 아니거든요.
그 정보가 어떻게 선별되느냐가 더 중요하니까요.

김용민 : 알겠습니다. 오늘 그 얘기를 하려고 모신 것 같지는 않은데 

권지연 : 네 오늘 모신 이유는 나름 신앙인으로서의 고뇌가 굉장히 많으셨던 걸로 제가 알고 있어요. 지금까지 저희가 이제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에 대해서 방송도 하고 지금도 진행하고 있잖아요. ‘내가 기독교인인 이유’를 주제로 오늘 얘기를 좀 나눠보려고 이것저것 여쭤보려고 합니다. 일단 오셨기 때문에 일산은혜교회에 출석하고 계시잖아요. 오신 김에 일단 교단 탈퇴한 후에 교회 분위기가 좀 어떤지 이런 것도 좀 궁금하고요

김용민 : 일산은혜교회는 강경민 목사님 계셨고 지금은 이광하 목사님 계신 교회죠. 최근에 합신교단을 탈퇴를 했어요. 지금은 이제 교단 소속 교회는 아닌 셈이 되지만 왜 교단을 탈퇴했을까. 교단 안에 있어서 좋은 것도 있거든요.

김성신 : 지금 그 궁금증을 저는 이제 전혀 풀어드릴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지금 제가 일산 은산은혜교회에 출석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요. 지금 계속 비대면 상황이라서 담임 목사인 이광하 목사님조차도 제가 그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모르고 계실 겁니다. 어쩌면. 그냥 헌금만 내고 열심히 꼬박꼬박 예배 드리고 

김용민 : 교회 안 나오고 헌금만 내는 주인 만큼 참 이상적인 교인이 없죠 (웃음)

김성신 : 제가 밥도 안 먹었습니다. (웃음)

김용민 : 밥까지 안먹었어(웃음)

권지연 : 근데 교단 탈퇴한 후에 많이 자랑스러워하셨어요.

김성신 : 그러니까 그 말씀을 좀 드리고 싶은데 교회를 어린 시절부터 다니기는 했어요. 별로 중요하지는 않지만 제가 교회를 다녔던 그 이력을 좀 설명 드리면 압구정동 소망교회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장로님이시니까 손잡고 다녔는데 성인이 돼가는 과정에서 이명박 씨가 대통령이 되고 그다음에 그 교회 분위기라든지 교회의 장로님이나 교인들이 대하는 어떤 태도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니까 ‘이 교회를 내가 계속 다니면 안 되겠구나’라는 판단이 들더라고요. 신앙심이 대단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 교회를 안 다녔죠. 그 이후에 어른이 되고 나서. 그런데 교회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제가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까지 잃은 것은 아니었어요. 세월호가 결정적이었는데요. 세월호 이후에 우리나라의 주류 개신교도들이 보여주는 모습, 태도, 이런 것들이 저는 패륜적이고 범죄적이라는 생각까지 저 개인적으로는 했어요. 그래서 내가 계속 여기에 몸담고 있으면 내 영혼까지 파괴 될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느껴졌고 그래서 ‘난 더 이상 기독교인 안 할래’, 그리고 한국에 그때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한국의 개신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변형된 샤머니즘이다’ 이렇게까지 제가 생각을 하면서 그만뒀는데 그러다가 저는 김근주 목사님의 활동이 어느 순간에 눈에 들어왔습니다. 

김용민 : 김근주 목사님 

김성신 : 차별, 동성애자 문제라든지 그런 것들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시는 모습 때문에 관심 있게 지켜봤고 그래서 일산은혜교회를 갔습니다. 그러다가 말씀하신 대로 올해 4월이었지 않습니까. 예장합신에서 ‘김근주 목사님을 해임하라’ 이런 권고가 내려왔고 그런데 이제 그 과정에서 그 교회 교인분들 그리고 이광하 목사님이 어떤 방식으로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지를 정말 유심히 지켜봤어요. 근데 ‘와, 이런 교인들도 있구나, 이런 교회도 있구나, 이런 목사님도 있구나’라고 굉장히 놀랍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들에게 뭔가 용기를 드리고 싶다’ 별건 아니지만 그런 선택과 판단 이후에 교인이 한 명이라도 늘어나면 그것이 응원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헌금을 내는 교회 교인이 됐습니다.

김용민 : 아휴, 정말 엄청난 용단이었을 텐데 그 교회가 일단 의리가 있고요. 한국교회의 파시즘에 결연히 맞서는 종교개혁적 의지도 충만하고요. 정말 너무나 본이 되는 교회입니다. 일산은혜교회가 

권지연 : 그 후에 강경민 목사님이 교단에서 또 퇴출되신 거죠?

김디모데 : 네 그렇습니다.

김용민 : 아주 그냥 좋은 사람들은 다 내쫓네.

김디모데 : 이 사건에 대해서 좀 간략하게 전혀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드리면 일산은혜교회에 이제 김근주 교수님이시고 목사님이시죠. 이분이 협동 목사로 계셨고요. 그리고 이 한선영 여성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근데 합신교단은 여성 목사를 인정을 하지 않고 있는 교단이죠. 

김용민 : 다른 교단에서 안수 받은 여성 목사님이신 모양이군요.

김디모데 : 그렇습니다. 그리고 김근주 교수님의 이 지난 행보가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기독교적 가치에서 보호 해야 된다, 지지해줘야 된다, 이제 그런 스탠스를 취했기 때문에 합신교단이 지향하고 있는 신앙 노선과 맞지 않다. 또 이게 목회적으로 문제가 있다. 그래서 노회에서 이 두 사람을 내보내라 그런 거죠.

권지연 : 그렇죠. 한마디로 쫒아 내라. 

김디모데 : 근데 어떻게 이 둘을 우리 교회 협동목사고 부교육자인데 동역하는 동역자들인데 내보낼 수가 있겠느냐, 그래서 이광하 목사님께서는 교인들과 논의를 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린 내보낼 수 없다. 그렇게 얘기하니까 교단하고 평행선을 달린 거죠. 그럼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되느냐 그래서 또 교인들하고 논의해서 탈퇴를 하신 겁니다.

권지연 : 교인들이 자체적으로 뭔가 기구도 만들고 그래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용민 : 예수님이 율법주의를 타파하고 조건 없는 사랑을 완성하신 분이신데 다시 율법주의를 회복하려고 애를 쓰는 이런 자들, 

김디모데 : 왜 이게 세간의 이슈화가 될 수밖에 없냐면요.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이런 문제가 생기면 당회 차원에서 교단하고 부딪혀봤자 일개 교회가 무슨 이득이 있겠냐, 그리고 괜히 시끄럽게 문제 만들지 말자고 해서 보통은 김근주 목사님과 한선영 목사님한테 정중히 뒤로 나가라고 하는 게 일반적인 교회 모습들입니다. 다 그렇진 않겠죠. 그런데 유독 여기가 왜 이슈가 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겠습니까. 이런 교회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권지연 : 그렇죠

김용민 : 한국 개신교가 워낙에 사회적으로 비난을 많이 받고 또 신뢰가 바닥으로 추락한 마당에 구태의연하다 못해 수구적인 교단에 있어서 뭐 하냐 이런 생각도 있었겠죠. 종교개혁도 그랬습니다. 루터. 로마하고 좀 거리가 있던 독일에서 교황의 절대 권위에 대해서 이제 신물을 내는 사람들이 많은 그곳에서 이제 종교개혁이 출발했듯이 일산은혜교회도 그릇된 교파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반지성주의를 혁파하는 루터 같은 깃발을 드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권지연 : 네 

김용민 : 루터도 나중에 또 이제 맛이 같지만 맛이 있을 때 루터. 

김성신 : 40년 교회에 다니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교인들과 목사님과 이런 분들을 진정한 존경심으로 내가 대해본 적이 있나, 생각해봤는데 저는 일산은혜교회에서 처음으로 그것을 느껴본 것 같습니다.

권지연 : 맞아요. 되게 존경스러우신 것 같아요. 저도 통화하면서 한 편의 설교를 듣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인터뷰가 아니라

김성신 : 그때 제가 연락해서 권 기자님한테 왜 취재 안 하냐고, 빨리 기사 써야 한다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김용민 : 가치를 쫓은 교회 아닙니까. 율법주의 규모 그리고 어떤 시스템에 시스템을 쫓는 것이 아니라. 이런 교회가 많아져야 합니다.

김디모데 : 제가 일산은혜교회 이 사안을 듣고 되게 놀라웠던 지점이요 이 김근주 교수님의 그 신학 노선을 교인분들이 전체가 다 백 프로 또 동의하는 게 아니십니다.
다양하세요. 그런데 민주적 그리고 서로 다른 의견에 있어서 본질과 비본질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되게 유연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거예요. 개신교계 교파가 얼마나 많이 갈렸습니까. 침례를 해서 물에 완전히 빠져야 된다, 약식 세례 하는 거는 가짜다, 통하지 않는다, 이런 세밀한 거 성소수자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여성안수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이거에 그냥 목숨 걸듯이 싸우고 갈리고 그랬거든요. 근데 일산은혜교회의 교인분들이 김근주 교수님이라든지 여러 가지 의견들에 대동단결한 게 아니라는 거였어요. 그러면서도 민주적으로 의견이 합쳐져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거죠. 얼마나 상호 존중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지 교인분들한테 목사님들이 배워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권지연 : 네. 오늘 오셨기 때문에 좀 역사적인 얘기 안 해볼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김재규 장군 실제로 보신 적 기억이 있으시죠?

김성신 : 저는 뭐 10.26이 초등학교 6학년 때였거든요. 그래서 기억납니다. 이렇게 안겨 있었던 기억도 나고 부분부분 표정이라든지 촉감이라든지 느낌, 다 기억이 나긴 합니다.

권지연 : 어떤 분이셨어요?

김성신 : 제 기억에는 인자한 분이었고요. 굉장히 인자한 분이었고 주로 명절 때 자주 뵙거든요. 평상시에 자주 뵙지는 못했는데 그때도 이미 너무 바쁘신 분이라. 세뱃돈을 굉장히 많이 주셨어요.

권지연 : 중요한 포인트네요. 근데 어차피 부모님한테 가지 않습니까.

김성신 : 아닙니다. 제가 다. 좋은 기억으로 갖고 있기도 하고 어쩌면 그 이후에 행하신 일 때문에 제가 성인이 돼 가는 과정들 속에서 더 좋은 기억만 남기게 된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김용민 : 저는 그분을 처음에 목소리 없는 영상으로만 뵀다가 나중에 10.26이후에 군사 법정에 서서 증언하신 내용을 목소리로 듣는데 오디오로만 듣기로는 참 인자하신 분 맞다, 그리고 굉장히 반듯한 분이고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신념이 있으신 분이라는 걸 느꼈어요.

김재규 장군 최후 진술 중 
10월 26일 혁명은 이 나라의 건국이념이고 또한 국시이고 6.25를 통해서 전 국민이 수난을 겪고 수없이 많은 사람이 생명을 바치고 지켜온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혁명을 한 것입니다. 

이 혁명이 어떻게 내란죄의 심판을 받아야 되느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오늘날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대한민국 전체 국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3700만이 다 같이 갈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을 회복시키는데 어찌하여 내란죄에 적용을 받아야 되느냐, 이런 생각이 듭니다. 

또 10월 26일의 혁명은 순수하고 깨끗합니다. 집권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리나 사욕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오로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는 일념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김용민 : 유신의 심장을 쏜 와일드한 분인 줄 알았는데 재판장에서 내내 각하라는 호칭을 쓰면서 박정희를 얘기하는 그 부분도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김성신 : 사형 당하기 바로 전날 저희 어머니가 구치소에서 유언을 들으셨거든요.

김용민 : 그 이튿날 집행이 될 거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김성신 : 딱 그다음 날일 거라고는 정확하게 알고 계시지는 못하시고, 임박했다는 걸 아시고 저희 어머니가 면회 갔을 때 ‘오빠를 위해서 기도할게’라고 이야기를 하셨나 봐요. 그랬더니 ‘나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근혜를 위해서 기도를 해라’

김용민 : 근혜?

김성신 : ‘박근혜를 위해서 기도하라’

김용민 : 박근혜를 위해 기도하라? 와, 이 얘기는 굉장히.. 

김성신 : 시사인 인터뷰에도 그게 나오기도 했는데 결국 (이유를) 다 떠나서 나 때문에 어쨌든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이야기를 하셨죠.

김용민 : 그때가 스물 일곱인가요, 그때 스물다섯인가, 스물여섯

김성신 : 뭐 어쨌든 그 책임감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 알 수 있고 좀 인품도 느낄 수 있는 그런 부분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권지연 : 본인이 어쨌든 암살한 사람의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지금 본인 가족 생각하셔야 될 것 같은데. 

김용민 : 김재규 장군님은 신앙이 있으셨나요?

김성신 : 불교셨는데 이렇게 아주 독실한 신앙인이거나 그렇지는 않으셨고요.
그렇습니다.

김용민 : 차지철은 영락교회 교인이었어요. 어머니가 아주 독실했고 

김성신 : 예 맞아요. 예

권지연 : 역사적인 평가는 갈렸지만 좀 가족들은 어떤 느낌으로 사셨을까요.

김용민 : 역사적 평가가 뭐가 갈려요. 99%가 김재규 장군의 참뜻이나 이런 어떤 진심을 이해나 했습니까. 사실은. 10.26 이후에 김재규 장군도 그렇습니다마는 그 가족들이 겪었을 그런 고통이나 우리 사회가 특히 그렇잖아요. 사회적 편견이나 이런 것도 굉장히 극심했을 것 같습니다.

김성신 : 근데 지나고 나니까 그게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지도 않고요.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렇게 유족으로서 힘들지 않았느냐라는 질문, 질문 자체로만 보면 되게 간단한 질문이잖아요. 근데 막상 유족입장에서는 이 질문이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에요.

김용민 : 저희도 하면 굉장히 무겁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김성신 : 저희 막 되게 힘들었어요라고 얘기하기에는 또 사실도 그렇지 아니하고 또 하나는 또 비루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도 원하지 않고요. 또 그렇다고 해서 저희는 아주 잘 살았습니다. 이러면 사실 이거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대답이 아니거든요. 그리고 또 유족이 여러 명이잖아요. 제가 뭐 유족 모두를 대변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고 각각의 입장들이 다르겠죠. 그게 여전히 부끄러운 일로 ‘왜 그런 일을 벌이셨을까’ 이렇게 보는 유족도 아마 있을 거고요.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저 같은 경우나 저희 부모님은 이제 전혀 아니기 때문에 이제 그쪽에 관한 이야기를 드리면 저희 아버지도 공무원이셨고 그 일로 인해서 처남 매부 사이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80년대에 같이 해직이 되셨고 경제적으로 좀 불안해지는 부분들도 분명히 있었고 아버지는 힘이 드셨겠지만, 아버지는 엘리트셔서 금방 좀 복구도 하셨고 사업을 만드셔 가지고 경제적인 부분이나 이런 부분들에서 이제 가족들을 책임을 지셨기 때문에 사실 경제적으로도 그렇게까지 빈곤한 상태로 가지도 않았었고요. 그냥 표면적으로는 평탄하게 살았거든요.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질문에 저도 이제 최근에야 제대로 대답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재밌게도 10.26때 저희 외삼촌이 연세가 만으로 53세이었거든요. 26년생인데 79년이니까요. 근데 제가 1968년생인데 지금 2021년이라 동갑입니다. 그래서 지금 동갑 정도가 되고 나니까 더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되기도 하고 앞서 ‘힘들지 않았느냐’ 이런 질문에 대해서도 이제 제대로 대답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드는데 저희 부모님이 외삼촌과 또 10.26의 의미에 대해서 굉장히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게끔 저희한테 교육을 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경제적으로는 그 이전보다는 좀 힘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었고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이후까지. 저는 그렇게 생각이 돼요.

김용민 : 그 뒤에 전두환이가 12·12로 국가 권력을 찬탈하긴 했어도 이 전두환도 알았거든, 야 이거 이렇게 박정희처럼 장기 집권했다가는 망하는구나. 그래서 본인도 원해서 그랬겠어요. 7년 단임을 약속했던 것이고 그렇게 해서 또 물러나서 역사의 심판정 위에 서게 된 것인데 그때는 미완의 혁명으로 들렸지만, 우리 역사가 좀 지연되긴 했어도 민주주의로 가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있어서 김재규 장군께서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을 합니다.

권지연 : 그렇죠. 그래서 작년에 40년 만에 가족들이 사법적 그리고 역사적으로 재평가를 요구하는 재심 신청을 했죠.

김용민 : 선생님, ‘남산의 부장들’이라든지 각종 ‘제4공화국’, ‘제5공화국’ 드라마도 있었고요. ‘그때 그 사람들’이라는 영화도 있었고

김디모데 : 백윤식 씨가 나왔었죠. 남산의 부장들은 이병헌 씨가 주연을 했고요

김성신 : 영화사에서도 굉장한 진전이 있었다고 봅니다. 앞서 말씀하셨던 백윤식 씨가 주연했던 영화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그 시대 자체를 희화화해서 볼 수 있게끔 좀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끔 환기시켜 준 면에서 의미가 있다면 

김용민 : 그 영화도 실은 뭐랄까요. 박정희에 대한 그 부담감이 느껴지는 그 영화였어요.
그래서 박정희를 노골적으로 희화화하지 못했고 도리어 김재규 장군을 희화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 영화가 

김성신 : 남산의 부장들 같은 경우에 있어서는 이제 좀 훨씬 더 깊어졌죠. 그래서 김재규라는 한 개인 인물에 깊숙하게 투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좀 만들어 주지 않았나.

김용민 : 고뇌를 잘 반영했어요. 김재규 장군의

김성신 : 그래서 감독한테도 굉장히 감사하기도 하고 저는 지난 2013년도에 저희 아버지 어머니하고 유족 최초 인터뷰를 시사인에서 주선을 제가 했어요. 사실은 그게 우연한 기회가 아니라 제가 나름대로는 고민을 많이 한 끝에 그 시기를 택했던 건데 박근혜 정권 초기였거든요. 박근혜 탄핵까지 예상한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분명히 엄청난 실정을 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판단이 있었고요. 그런데 사실 10.26이라는 문제가 이른바 보수 정권이든 이른바 진보 정권이든 어느 쪽에서든지 간에 다루기가 힘든 문제였잖아요. 

김용민 : 그렇죠. 

김성신 : 정치적 부담도 많이 가고 이른바 진보라고 할 수 있는 분들도 굳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그 연원을 광주로부터 잡는 것도 충분한데 굳이 10.26까지 밀고 올라갈 이유가 전혀 없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느 정권이 와도 계륵처럼 왔다갔다하게 되는 이런 것이 이제 유족 입장에서는 느껴졌는데 박근혜 정권이 들어왔을 때 나라는 굉장히 불행해지겠지만 우리로서는 좀 기회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왜냐하면 큰 반동이 올 것이라는 예측은 들더라고요

김용민 : 아니, 실제로 10.26의 그 뿌리를 따져보자면 최태민 일가가 박근혜를 홀려 가지고 그렇게 해서 그때도 작은 국정농단이 있었던 거죠. 그로인해서 10.26이 발생됐다고 봐야하는 건데 박근혜 정권의 탄생은 결국 멈춰선 10.26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는 그런 양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거는 시대의 반동을 예견할 수가 있었던 것 같아요.

김성신 : 비유가 좋은데요. 사실 유신도 멈춰져 있었던 거거든요. 그런데 그 유신이 정리될 수 있는 기회가 올 수 있겠다는 판단은 좀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이제 제가 저희 부모님하고 심각하게 의논을 드렸어요. 지금이 굉장히 적기다, 이거는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고 판단이 된다. 그러니까 최소한 유족으로서 의무는 다하자. 언론들이 언젠가 다가올 때 다가올 수 있는, 말하자면 좌표를 좀 찍어주자 그런 의미에서 인터뷰 하나를 남겨 놓으시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그 말씀을 그 당시에 시사인의 문정우 대기자님 계실 때 의논을 드렸더니 그분이 또 10.26 전문가이기도 하시거든요. 굉장히 오랫동안 자료를 모으셨던 분이라

그랬더니 이제 그분께서 흔쾌히 오케이 그래서 유족 최초의 인터뷰가 그렇게 해서 걸리고 그게 인터넷 이제 검색이 되니까 그 이후부터는 언론이나 이런 쪽에서 유족들이 인터뷰를 따거나 뭐 이러고 싶을 때 찾아 들어올 수 있게끔 했던 거죠.

그러다 이제 40주년에 맞춰서 남산의 부장들이 등장하고 제가 예측했던 것처럼 저희가 찍어놓은 좌표대로 저희한테로 계속 인터뷰가 오더라고요. 저희한테도 오게 되면 다른 여러 명의 유족이 있으니까 이야기들이 굉장히 다양할 수 있잖아요. 정치적 입장도 복잡하고 각자 갖고 있는 생각들이 다르니까.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그런 부분들에서 굉장히 확고하신 거를 제가 알고 있어서 또 저희 아버지가 같은 고향 선후배이기도 해요. 어머니하고 고향이 동향이시라 아버지 기억 어머니 기억 같이 이제 맞출 수가 있어서 그래서 남산의 부장들 이후에 언론을 많이 타게 된 거죠.

그게 다른 것보다도 사람들이 10.26이라는 걸 통해서 한국의 민주주의의 가치,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서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계기만 되더라도 충분하지 않나 의미가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권지연 : 모든 유족이 다 재심에 찬성하신 건 아니죠?

김성신 : 전혀 아닙니다. 지금도 대부분이 반대하고 있고요. 이렇게 나선 것에 대해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렇게 그래서 제가 다른 유족분들하고 사이도 별로 안 좋고

권지연 : 그래요. 

김성신 : 동생까지는 재심이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가 딱 그 자격을 갖고 계시니까 그렇게 해서 역사에 의미 있는 역할을 좀 하시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저희 어머니께서 받아주셔서

권지연 : (어머니가) 셋째 동생이시죠?

김성신 : 바로 밑에는 남동생이 계시고 둘째 외삼촌이 계시고 딸이 다섯이고 또 막내 외삼촌이 계시는데 저희 어머니가 그 딸들 다섯 중에서 딱 중간 셋째입니다.

김용민 : 초등학생 때 김재규 장군에게서 회의감을 느끼신다든지...

김성신 : 그런데 그거는 제 기억은 워낙 어릴 때니까 그 기억은 제가 떠올린다고 하더라도 저조차도 신빙성을 믿을 수가 없고 그런데

김용민 : 또 조카들 앞에서 또 그렇게 그런 모습을 드러낸다는 거는 

김성신 :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공식적으로 하신 적은 없고 대신에 이제 저희 아버지가 공무원이셨고 또 저희 아버지를 되게 예뻐하셨어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가 유신 막 발표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때 이제 저희 아버지가 젊으셨을 때니까 따로 독대하시고 ‘이거 역사에 같이 책임지셔야 될 일 아니냐’라고 얘기를 하셨나 봐요. 그랬더니 거기에 대해서 대답은 내리지 않으시고 ‘그래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다. 근데 너 좀 입 다물고 공부나 더해라’ 뭐 이렇게 좀 물리셨는데 그걸 갖고 막 야단을 치거나 절대 그렇지 않다거나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게 아니라 상당히 수긍하시는 표정이 인상적이었다고 저희 아버지께서 기억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김용민 : 선생님은 10,26 나고 막 어마어마하게 보도가 쏟아졌잖아요. 참 좋았던 삼촌이 흉한 사람으로 이렇게 언론인들이 막 매도하고 짓밟고 그럴 때는 어떠셨을까요?

김성신 : 제가 어리기도 했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던 것 같아요. 그만큼 가족들한테 저는 신뢰가 굉장히 충분하셨던 분이기 때문에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저희 외삼촌은 좋은 일을 하신 거고 옳은 일을 하신 거고, 그렇게 판단했고요. 참 재밌는 것이요, 제 기억에 그때 학교 선생님들이 계시잖아요. 네 그럼 제가 누군지 알고 계셨거든요. 그런데 그때 선생님들이 저를 차별하거나 뭐라고 하거나 한 분이 한 분도 안 계시고 오히려 저를 더 따뜻하게 대해주신 것 같아요. 

권지연 : 선생님도 잘 만나셨네

김성신 : 아니. 그 학교의 선생님 대부분이 그랬어요. 그리고 또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로 소문이 연결이 돼서 근처 학교니까 제가 누군지, 누구의 조카인지 알고 있었는데 따로 불러서 더 오히려 이렇게 위로해 주시고 그러니까 아마 그때 그 지식인분들 학교 선생님들이 지식인으로서 10.26의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그게 저는 기억에 남아요. 

김용민 : 박정희의 죽음은 그 개인의 사망에 그치지 않고 한 체제와 그 시대의 종말이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우리 민주주의의 꽃이 피겠구나, 서울에 봄이 오겠구나 하는 그런 기대의 출발점이었다고요. 

권지연 : 그런 면에서 혁명이다.

김용민 : 저는 혁명이라고 보고 10.26까지 우리 민주주의의 연원을 따지는 분들은 결국 10.26이 직접적으로는 부마항쟁에서부터 된 거 아니겠습니까, 부마항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이제 차지철과 김재규 장군 간에 의견 충돌이 있었던 거고 거기서 이제 10.26이 났던 것인데. 더 올라가자면 또 YH 여성 노동자들의 그런 사망사고 그 김정숙 열사죠. 그리고 또 더 나아가서는 이미 79년 초에 그 총선에서 공화당이 졌어요. 대패를 했어. 이미 거기서 민심은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이 독재 이대로는 안 된다, 그런데 그걸 묵살 하고 계속 그냥 질주하듯이 밀고 갔다가 김영삼 야당 총재를 제명시키고 부마항쟁 무력진압을 막 획책하고 그런 와중에 이제 10.26이 난 것이지 저는 역사의 순리라고 봅니다. 그렇게 가는 것이 마땅했고 좀 더 앞당겨서 좀 더 진취적으로 그 10.26을 일궈낸 김재규 장군이 이제 역사의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권지연 : 지금 역사적 평가는 얼마나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보실까요?

김성신 :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사육신 그분들이 그때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에 공식적으로 복권되는 데까지는 한 260년이 걸리거든요. 그래서 이번에 재심을 신청을 했는데 판결이 승소하고 이래서 그걸로 역사적 판결이 저는 뒤집히고 그게 의미 있다고 사실 별로 생각하지 않고요. 이번에도 제가 유족 입장문을 발표를 했거든요. 재심 신청을 할 때. 그때 다 이걸 이제 인용을 하던데 궁극적으로 구하고자 하는 바는 판결이기보다는 역사를 좀 구하고자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한 150년, 200년 정도의 과정들이 있지 않나 그런데 지금 방향을 잘 잡아놓고 거기에 제가 조금이라도 일조를 할 수 있으면 제대로 된 평가는 한 100년 150년 200년 후에 대다수의 우리 국민이 10.26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뭔가 의미 있다고 판단을 하고 그게 옳았다고 판단을 한다면 그게 역사적인 재평가인 거고요. 저는 지금 당장 어떤 재평가의 어떤 과정이 있을 거라고는 사실 별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김용민 : 이렇게 해서 역사가 어떻게든 진전이 되는 겁니다. 속도가 느리고 우리가 기대한 만큼 의 보폭으로 진보하지는 않지만

권지연 : 김재규 장군의 그런 결단이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래도 민주주의도 좀 앞당길 수 있었고 하잖아요. 근데 지금 보수 개신교 목사들을 보면 정말 그 박정희를 숭상하다시피 하고 역사의 시계를 다시 되돌리고 싶어 하는 분들이 너무 많아요. 이런 분들을 보면 좀 유족입장에서 어떤 마음이 드실까 이런 것도 좀 궁금하더라고.

김디모데 : 구미에 가면은 매년 (박정희) 탄신제가 열려요.

김용민 : 반인반신이라는 말도 그때 나왔어요. 반은 인간이고 반은 신이다.

김디모데 : 보통은 추모제를 하기 마련인데 탄신제는 그보다 더 영향력 있는 숭상의 대상을 향해 하고 그뿐만 아니라 박정희 추모 예배를 매번 보수 개신교계와 정치인들이 모여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위기에 의하면 이분들 입장에서는 김재규 장군이 원수죠. 극우 목회자들 사이에서는요. 그래서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 어떻게 보시나요.

김성신 : 글쎄요 제가 어떻게 보느냐는 그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한데 뭔가 의미가 있어야 그 부분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거나 판단을 할 텐데, 그다지 의미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김디모데 : 의미없다 

김성신 : 그런 움직임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또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어떤 수순, 당연한 절차 이런 것들이 있지 않나. 언젠가 세월이 많이 지나가게 되면 우리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부터 출발했구나라는 것들을 알 수 있는 그런 지점도 될 수 있지 않을까?우리가 요즘에 다크 투어리즘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출발해서 우리가 얼마만큼 진전했는지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그런 점에서는 의미 있지 않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기독교에서의 가령 어떤 보수성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이 저는 어떤 정치적 판단이라든지 그렇다기보다는 굉장히 사업적으로 유능한 분들이라는 생각은 확실하기는 해요.

권지연 : 사업적으로 유능하다?

김성신 : 당연히 돈이 쉽게 벌리는 쪽으로 비즈니스 쪽은 가게 돼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어떤 정치적인 스탠스라든지 이런 것들은 어떤 판단력이라기보다는 그런 논리, 그런 유익함의 논리, 이런 것들에 대해서 따라간 것이 아닌가 정도로 판단을 하고 있고 깊게 생각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유족입장에서는

김용민 :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자기 아버지에게서 많이 유추된다고 하더라고요.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박정희가 정치적 하나님인 거예요. 전 그렇게 봅니다. 우리에게 밥을 뜰 수 있게 해주신 그런 분, 번영과 성장을 주신 분, 이런 거

권지연 : 전광훈이 실제로 그런 말을 했어요. 밥 먹고 사는 거 하나님 다음으로 박정희에게 감사해야 되는데...

김용민 : 그래요. 보수 개신교계의 역사의식이 이거밖에 안 되는 거예요. 경제 번영을 가져왔으니 독재는 해도 된다?인간의 지성과 정의감 이런 것들을 다 모두 다 그냥 묵살해 버리는 그런 신앙은 뭐 짐승과 뭐가 다른가 싶어요.

권지연 : 김재규 장군의 가족으로 사는 것이 유족으로 사는 것이 평론가님의 신앙 노선이나 색깔에도 좀 영향을 미쳤을까 이런 것도 좀 궁금해지네요. 보면 정말 옳은 가치관을 항상 추구하시고 저한테도 정말 너무너무 도움이 되는 말씀들을 항상 많이 해주시거든요.

김디모데 : 평론가님께서 세월호 사건 때 한국 개신교계 주류의 모습들이 참으로 그 실망을 하면 절망스러운 참담한 모습으로 인해서 영향을 받으셨다고 그러셨는데 그런 발언들을 일삼는 사람들이 대부분 성향이 극우이고, 박정희 대통령을 추억하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게 좀 연결되는 지점들이 있거든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좀 어떤 지점에서 특히 좀 속상함이 오셨고 기존 교회에 환멸을 느끼게 되셨는지

김성신 : 저는 제가 갖고 저도 대단한 신앙관을 갖고 있거나 믿음이 굉장히 어마어마하다 이렇게 볼 수는 없지만

권지연 : 저보다 좋으신 것 같아요.

김성신 : 무슨 말씀을. 앞서서도 그런 말씀드렸지만 ‘누구누구의 조카다’ 이런 것들 때문에 시선을 받을 수도 있고 뭔가 실수하거나 잘못하거나 이렇게 됐을 때는 더 많이 질타를 받을 수도 있는 입장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뭐 약간의 이제 핸디캡 같은 게 있겠죠. 그래서 뭐 10.26이나 이런 것들이 나를 하여금 그 사건이 나를 좀 더 열심히 살도록 만들어준 계기는 된 것 같다고 제가 생각하는 것하고 저는 그 궤가 같다고 생각을 해요. 기왕이면 나 이외의 타인이나 아니면 내가 발 딛고 있는 공동체의 공동선이 될 수 있는 쪽으로 판단하는 것이 남들 보기에도 나쁘지 않고 또 제가 스스로한테도 용납할 수 있고 또 내가 가까운 분 중에서 이렇게 정의로운 분이 계셨는데 내가 그 이름에 먹칠할 수는 없지 않냐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고요, 아마 그런 정도의 영향력을 주지 않았나 뭔가 좀 도덕적인 검토를 스스로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그런 정도의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권지연 : 그런 거는 김용민 이사장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또 목사님이시고 훌륭한 목회자로 또 이렇게 평가받는 분이시니까. 그런 거에 대한 부담이 두 분 다 있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좀 드네요.

김용민 : 감사하고 저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10.26이라는 중대한 분기점이, 때마침 흑백TV와 칼라TV 교체기가 바로 그 시기였거든요. 1980년 12월 1일부터 칼라 방송이 시작됐는데 그 이전 시기가 흑백의 시대였다면 그 이후 시대는 좋은 의미든 부정적인 의미든 칼라의 시대가 왔는데 칼라의 시대에 우리는 다양성을 인정하게 되고 우리 사회의 변화무쌍한 사고들이 수용되고.
흑백 시대는 아무리 표현해 봤자 흰색, 검은색, 회색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였거든요.
그런 시대를 구분 짓는 데 있어서 사상적으로는 10.26이 굉장히 큰 역할을 했다고 보고 물론 또 그 이후에 무참한 5.18 학살도 있었고 전두환이가 권력을 찬탈하는 역사가 있었지만 그러나 우리 시대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결국 진보해 나간다는 것들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우리가 이제 그 시대에 대한 공정하고 성찰이 있는 재조명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권지연 : 지금 하시는 일들을 보면 통일에도 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요. 파주 출판도서관에서도 콘서트도 자주 하시고

김성신 : 제가 출판인이니까. 그게 당연히 대한민국의 지식인의 일원으로서 뭔가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래서 뭐가 옳지? 어느 쪽이 옳지?그러면 반통일보다는 통일이 더 옳은 길이잖아요. 그래서 기회가 있을 때 제 노력을 투여하기도 하고 제 재능을 투여하기도 하고 그런 거지 대단한 거는 아니고

권지연 : 통일 콘서트 같은 거 열심히 해서 내거는 슬로건들을 보면 그 기장에서 내거는 슬로건이랑 되게 비슷해요. 생명, 사랑 이런 것들. 

김성신 : 아무래도 영향을 받겠죠. 의식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제가 오랫동안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제가 살아가면서 선택하게 되는 그런 모든 요소에 어떤 식으로든 작동하게 되지 않나, 기독교 사상이 작동하게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독교는 원래 되게 안 믿어지시겠지만 진짜 좋은 종교잖아요.

권지연 : 그렇죠. 

김성신 : 관용 또 사랑,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 인생을 진정으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그 모든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종교인데 그게 이제 한국에 들어와서 지금 너무 고생하고 있는 거죠.

김용민 : 철저하게 마이너리티를 위한 종교예요. 이 종교가. 얼마 전에 제가 새벽 묵상.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한나가 불임으로 고통을 받았지 않습니까. 10년 동안. 그런데 당시 유대 사회에서 고대 유대 사회에서 불임이라고 하는 건 죄악이었어요. 그러면 남자로 하여금 새 부인을 얻을 수 있게끔 만드는 

권지연 : 아니 남자한테 무슨 문제가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김용민 : 그 당시는 그냥 무조건 여자들이 다 책임을 전가했던 그런 때였죠. 근데 성경에서 보면 사라부터 시작해서 리브가라든지 불임 여성들이 많이 거론돼요. 왜 그러겠어요. 약자의 관점으로 성경이 쓰였기 때문이죠. 또 그렇게 예수님이 활동하신 공간도 갈릴리라는 도심이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런 촌구석이고 또 갈리리는 또 곡창지대다 보니까 수없이 또 수탈당하는 곳이었고 거기서 예수님이 이제 시작을 하신 거 아니에요. 공생애를. 이것만 보더라도 성경은 철저하게 마이너리티의 그 시선이 맞춰져 있고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역사하셨다고 봐야 마땅할 텐데 우리의 교계는 돈 있는 사람 권력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렇게 어 관심을 두고 또 그들을 위한 복음을 만들어 내는 데 여념이 없으니 참 참담한 노릇인 거죠.

김성신 : 목사님이 계셔서 이런 얘기가 어떨지 모르겠는데 제가 한때 교회를 떠나면서 이거는 한국 개신교는 변형된 샤머니즘이다라고까지 제가 얘기했던 건 그냥 기분 나빠서 한 욕설이 아니라 제 나름대로는 오랫동안 교회를 그 당시까지 다니면서 제가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였거든요.

종교이기 때문에 특히 기독교 같은 경우에서는 내세관이 가장 중요하지 않습니까. 죽어서 내가 가게 되는 곳, 영원히 사는 곳, 여기에 대한 믿음 그건 우리 주기도문에도 들어가고 가장 중요한 핵심 사상인데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내세관이 아예 없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스니다. 
왜냐 하면 살아서 복 받고 그 복은 이제 금전으로 환산되는 복이겠죠. 살아서 그 복을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지 내가 죽어서 그다음에 어떻게 천국에 간다라는 거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들이 없는 목사도 관심 없고 교인들도 관심 없고 그렇다면 기본적인 종교관은 사실은 종교관이라기보다는 샤머니즘 쪽이 훨씬 강하지 않습니까. 그게 이제 살아서 복 받기 위한 그 마음 이런 것도 굉장히 오랜 유구한 인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어떤 종교관이기도 한데 거기서 채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 아니면 한국에 토착화 하는 과정들 속에서 그것과 어쩔 수 없이 결합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어쨌든 간에 그렇다면 이거는 온전한 기독교 온전한 개신교라고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한때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생각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듯합니다.

권지연 : 다행히 일산은혜교회 같은 곳이 있어서 

김성신 : 그교회 때문에 제가 구원을 받는 거죠.

김용민 : 소망교회에서 얻지 못한 것을 일산은혜교회에서 얻었습니다. 

권지연 : 이거 딴소리인데요. 해도 돼요. 하지 말까요?

김용민 : 뭔 내용인지

권지연 : 아까 성경에 나온 여성들 부인 얘기하셔서 제가 항상 하는 얘기가 있거든요. 제가 나중에 이제 연애 강의를 하게 되면 꼭 이 본문을 사용하고 싶다. 이런 게 있었어요. 예를 들면 사라가 본인이 애를 못 낳으니까 너무 미안한 마음에 남편에게 이렇게 하갈을 취하라고 먼저 제안하잖아요. 이때 아브라함이 했어야 하는 말은?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때 아브라함이 했어요 하는 말은?

김용민 :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마누라를 둘이나’?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판에

김디모데 : 저한테도요? 저는 이런 게 아주 구절을 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열 자식 부럽지 않도록 당신 하나만으로 이미 족한데 애가 없는 게 그게 무슨 상관이냐. 이 구절을 제가 결혼을 앞둔 청년들에게 외우라고 하죠.

김용민 : 그런데 결국에는 받아들였지 않습니까. 립서비스가 중요합니다. 

권지연 : ‘나는 당신만 있으면 돼’ 이 말이 저는 정답 얘기하는데 그러면 시대적 배경이 어쩌니 막 이래요. 그런 거 다 소용없고 시대를 불문하고 여자의 마음은 똑같다고 본다고 저는 이렇게 얘기를 했었습니다. 저에게 연애 강의의 기회를 주시면 이런 예시를 가져가겠습니다.
얘기하다 보니까 좀 시간이 흘렀는데 선생님 신앙인으로서도 고뇌도 많으셨고 김재규 장군의 가족으로 살면서도 또 여러 가지 남들보다 좀 더 이렇게 도덕적으로 또 이렇게 살기 위해서 애쓰신 것도 있고 그래서 그런지 항상 얘기를 나눌 때 보면 뭔가 여유가 있으세요. 뭐라고 할까요. 이미 다 통달을 한 것 같은 도사 같은 이미지가 좀 있으시거든요.
평화나무가 공명선거감시단 활동도 하고 그러면서 김디모데 목사 얼굴 보세요. 벌써 썩어가고 있거든요. 네 이런 분들에게 좀 위로가 될 수 있는 책을 추천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김성신 : 저는 이 질문이 제일 좋아요. 이제 제 직업과 관계되는 분이 그래서 제가 신나서 사실 이 질문할 거라고 저한테 미리 알려주셨잖아요. 서가에서 책을 하나 뽑아왔어요. 이 책입니다.

권지연 : 너무 두꺼운데요.

김성신 : 1천 페이지 조금 넘는

김용민 : ‘죽음 앞의 인간’

김성신 : 저는 이 책은 평생 한 번은 꼭 읽어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특히 목사님들이 좀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이 필립 아리에스라는 석학이 지은 책인데 간단해요. 죽음의 역사가 있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 하면 인간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크게 지금까지 한 5번 정도가 바뀌었다. 원시시대에서부터 중세까지는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거의 일관됐대요. 워낙 신앙심이 강하고 그랬던 시대라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단지 외롭게 죽어가거나 이런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내가 죽으면 천국 갈 텐데 죽음이 두려울 리가 없었다는 거죠. 

김용민 : 내세에 대한 강력한 어떤 그런 믿음이 있었으니까. 

김성신 : 근데 점차 근대로 넘어오고 현대로 오는 과정들 속에서 특히 현대로까지 넘어오게 되면 죽음을 완전히 소외시켜버리는 대표적으로는 우리가 사랑하는 아버지의 죽음조차도 거의 지켜볼 수 없는, 그 잠깐 그 타이밍을 놓치면 임종을 지켜볼 수도 없고요. 병원 같은 데서 이렇게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시면 혼자 돌아가시는 거잖아요. 그러고 난 다음에 바로 입관해버리고 이렇게 해버리면 죽음을 보려고 하지 않죠. 인간이 점점 죽음으로부터 공포를 느끼고 멀어지는 이 과정들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역사적인 사료들을 동원해서 그걸 입증해 나가고 있는 책이거든요.

그래서 죽음에 대한 태도만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고 죽으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오는 거니까요. 그래서 죽음을 성찰해 볼 수 있다면 정말 한국 기독교도 지금처럼 이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저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모습이지 않을까.

안 죽을 것처럼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망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누구나 죽는데도 불구하고 

권지연 : 웰다잉을 생각하면 웰빙 할 수 있다는 얘기네요. 

김용민 : 제가 잠깐 이 책 리뷰를 기사를 통해 봤는데 이런 내용도 있다면서요. 16세기 이후 이 중세로 넘어오면서 죽음이 이제 실질적인 공포 내세가 없을 수도 있다는 그 이후부터는 이제 해부학이 어마어마하게 발달했다고. 왜냐면은 죽은 사람은 어떤 상태일까, 뭐 그런 것도 있었고 심지어는 뭐 시신을 상대로 성관계를 하기도 하고. 시간이라고 하죠. 

김성신 : 이거 정말 흥미진진하고요. 꼭 읽어볼 만한 그런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김디모데 : 그런데 평론가님의 설명을 딱 들으니 이미 읽은 느낌이 들죠.

권지연 : 오늘 나와주셔서 감사하고 책 추천까지 해 주셨는데 마무리로 우리가 또 웰다잉 얘기하셨으니까요. 나는 어떻게 살다 죽고 싶다. 마무리를 한마디씩 하고 마치겠습니다. 

김용민 : ‘죽음 앞의 인간’ 소개를 해주셨는데 김재규 의사라고 부르시는 분들이 계시잖아요. 김재규 장군을 보면 이분은 돌아가신 게 아니다. 사형을 당했지만 돌아가신 게 아니다. 아직도 남아서 또 앞으로 어떻게 평가가 달라질지 변화무쌍하게 이 세상에서 그 이름이 어떻게 재해석될지 너무 궁금해지는 주인공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육신이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인생이 어떻게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무너졌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의미에서 보면 2천 년 전에 돌아가신 예수는 아직도 지금도 살아계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 살아 있을 때 이득을 당기고자 하는 인간들 좀 부끄러운 줄 알고 죽어서도 그 이름이 빛날 수 있도록 죽은 이후에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김디모데 : 갑자기 죽음 얘기하니까 숙연해지는데요. 저는 신앙이 되게 보수적이라 천당을 믿습니다. 천당의 실존을 믿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르침을 따라 살면 이타적으로 살고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과 사회적 약자 그리고 구조학에 대한 변화를 위해서 어떤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처한 영역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다가 나중에 천당 가서 상급 받고 한 자리를 하고 싶은 솔직한 욕망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 죽고 싶습니다.

김성신 : 오늘 제가 배운 것 중에 하나는요, 절대 목사님 뒤에 서면 안 된다. 서려면 앞에 가야 된다, 뒤에 서게 되면 좋은 말씀을 너무 다 해버리시기 때문에 (웃음) 뭔가 앞에서 어설프게 해버려야 목사님들이 이제 딱 정리도 해 주시고. (웃음)
저는 그런 말씀 드리고 싶어요.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가치 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야 하지 않나, 저는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외삼촌의 죽음이 가치 있었기 때문에 저는 수많은 사람이 40년이 지나도 지금 이렇게 기억해 주시고 그 사건을 계기로 또 여러 가지 생각들도 펼치시고 사회적 논의를 계속 이어가고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저는 거기에 대한 확신을 또 이렇게 다시 한번 하게 됩니다.

권지연 : 저는 세 분이 그렇게 사시는지 잘 감시하면서 귀엽게 살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마칠까요. 오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김용민/김디모데/김성신 : 네.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평화나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