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언제나 옳은 말을 한다. 말 자체만 놓고 보면 그렇다.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은 당연히 옳은 말이고, “사법개혁은 사회적 강자에 대해서도 엄정하게 수사할 수 있는 공정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다”라는 말도 옳은 말이다. “국민만 바라보고 일하겠다”라는 말도,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검찰을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범죄자뿐”이라는 말도 흠잡기 어려운 옳은 말이다.

그래서 한동훈 장관의 말을 반박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동훈 장관은 논리적 모순을 발견하기 어려운 언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한동훈 장관이 구사하는 언어가 가진 진짜 힘은 사실 다른 곳에서부터 나온다.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논리가 가장 강력한 힘을 갖게 되는 순간은 화자의 삶이 그가 말하는 진리와 일치할 때다.

나는 우리 아이에게 “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길가에 쓰레기를 버려본 적이 있다. 나의 이 부끄러운 과거가 아이에게 알려지는 그 순간, 아이에게 쏟아내는 반박 불가능한, 그럴듯한 설교 따위는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한동훈 장관이 구사하는 언어의 힘이 강력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가 속했던(지금도 속한 것처럼 보이는) 검찰이라는 조직은 강력한 권위를 지닌 정보를 독점한다. 대한민국 검찰은 대한민국이 부여한 수사권과 기소권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 시중에 떠도는 정보는 흔하디흔하지만, ‘카더라’를 넘어 공신력 있는 ‘팩트’가 되는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주체는 검찰과 경찰, 특히 검찰이다.

검찰 출신 인사들이 입만 열면 정의와 공정, 상식을 부르짖고 있지만, 이들의 삶이 정의와 공정, 상식에 부합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이들 자신밖에 없다. 한동훈 장관이 “누구도 법 위에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우리는 평가할 수 있지만 그 평가의 근거를 찾는 일은 그가 속한 그 조직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 내내 검찰 개혁을 부르짖고, 많은 국민이 촛불을 들고 검찰 권력 분산을 외쳤지만, 이 싸움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더탐사의 저널리즘

다 아는 얘기를 굳이 길게 꺼낸 이유는 최근 시민언론더탐사가 한 일련의 보도 때문이다. 더탐사는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그리고 김앤장법률사무소의 소속 변호사 30여 명이 자정이 넘은 시각 청담동의 고급 술집에서 만났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언론은 수사기관이 아니다. 국가가 수사권을 부여한 검찰과 경찰의 수사도 헛발질의 연속인데, 수사권조차 없는 언론의 의혹 제기가 언제나 정확할 수는 없다. 언론은 설령 완벽하게 확인된 사실이 아니더라도 합리적 의심이 가능하다면 의혹만을 놓고 보도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모든 의혹을 잡히는 대로 보도할 수는 없다. 저널리즘은 지켜야 하는 선이 있다. 의혹이 제기됐더라도 그 의혹에 대한 철저한 검증은 언론의 책임이다. 하지만 더탐사가 이 검증을 철저히 했는지는 의문이다.

더탐사는 해당 술자리에 참석했다는 당사자의 남자친구로부터 제보받았고, 이 남자친구의 제보내용은 그 자리에 자신이 있었다고 주장한 첼리스트와의 전화 통화였다. 현장의 녹음도 아니었고,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과 가깝다고 인정할 만한 인물의 증언 녹취도 아니었다. 더욱이 녹취를 사용하면서 첼리스트 당사자와 남자친구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지하면서도 첼리스트의 직접 증언을 확보하지도 못했다.

물론 현장에 있었다는 이세창 전 자유총연맹 총재 대행의 증언은 있었지만, 이세창 대행의 증언이 술자리에 대한 것이었는지는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다면 함께 술을 마셨다는 김앤장 변호사, 혹은 술을 마셨다는 술집 직원들의 증언이라도 충분히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더탐사의 보도는 첼리스트의 주장이 들어가 있는 녹취, 그리고 술자리에 대한 이세창 대행 발언의 뉘앙스,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결국 이세창의 휴대전화 위치 기록, CCTV, 블랙박스 기록. 그리고 결정적으로 첼리스트의 경찰 진술 등으로 의혹 제기는 반박당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언론의 의혹 제기가 반드시 정확한 것만은 아니지만, 더탐사의 보도는 게이트키핑 기능 자체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맞다.

그리고 이 섣부른 보도는 한동훈 장관의 언어에 더 큰 힘을 실었다. 늘 그랬듯 한동훈 장관은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언어를 이용해 자신을 거짓과 불의와 맞서 싸우는 투사로 만들고 있다. ‘검찰 출신’이라는 사실상의 면책특권을 가진 그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거론하며 싸움을 벌였을 때, 이 보도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가 됐다.

한동훈의 법치

하지만, 더탐사의 보도 문제와 언론을 대하는 한동훈 장관의 태도는 분명히 나눠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한동훈 장관은 거짓과 불의에 맞서는 법치의 수호자로 본인을 생각하는 듯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게 제기되는 모든 의혹. 심지어 ‘불쾌함’까지 모조리 법으로 심판하려 들고 있다.

물론 언론은 자신들의 보도에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단순히 언론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면책특권을 갖고 있다는 환상 따위도 버려야 한다. 그런데도 한동훈 장관의 대응은 지나치다.

한동훈 장관은 자신을 자꾸 권력과 맞서 싸우는 약자로 보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는 행정부의 일원인 법무부 장관이다. 그 자신도 본인을 ‘일국의 장관’이라 칭했다. (물론 추미애 장관에게는 ‘일개 장관’이라고 했지만) 일개 장관이든 일국의 장관이든 법무부 장관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동시에 가진 검찰을 지휘 감독하는 강력한 권력자다.

한동훈 장관이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기사가 되고, 필요하면 자신의 SNS나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을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권력을 감시하는 언론의 보도가 억울하고 불쾌하다며, 수사기관을 통해 이를 응징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부적절하다. 설령 보도의 악의성이 과도하더라도 수사기관을 관리 감독하는 그가 수사기관을 통해 자신의 사건을 맡기는 건 적절하지도 않다.

실제로 한동훈 장관의 고소라 그런지, 수사기관의 대응도 지나치게 과도했다. 더탐사가 한동훈 장관을 취재하겠다며 그의 집 앞으로 찾아가 벨을 누른 바 있는데. 이런 방식의 취재에 대한 호불호는 갈릴지라도, 그 초인종을 누른 행위를 두고 장관이라는 권력자가 이를 고발하고, 그의 지휘를 받는 수사기관이 취재진에게 구속영장까지 청구하는 광경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다. 구속영장뿐 아니라 경찰은 지속해서 더탐사에 대한 압수수색도 이어왔다.

결국 법원은 더탐사 기자들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구속의 필요성이 성립된 사건이 아니었다. 검찰은 과거 강진구 기자가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이유로 도주의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논리는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한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검찰의 법치주의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사건으로 역사엔 기록될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들의 실체를 알아낼 수 없을 것이라 자신하겠지만, 역사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 이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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