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유기농수도사
'입례', '꽃들도'
건반 : 백미
진행 : 이경은

원래 요한계시록은 다루지 않을 수 없어서 핵심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려고 했으나, 계시록에 대한 오해가 너무 많아 명료하게 정리하고 가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번 주는 지난주에 이어 예언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려고 한다. 

모세와 아브라함은 예언자인가?

질문을 하나 하겠다. 모세와 아브라함은 예언자인가? 예언을 미래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당연히 모세와 아브라함은 예언자가 아니다. 그러면 성경은 이들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신명기에서 모세는 자신을 스스로 예언자라 말하며, 앞으로 주께서 자신과 같은 예언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실 것이라 말한다(신 18:14~18). 또 민수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비방하는 아론과 미리암에게 예언자에게는 환상이나 꿈으로 말하겠지만, 충성스러운 모세와는 얼굴을 마주 보고 명백하게 말한다고 하시며 두 사람을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민12:4~8). 아브라함은 어떤가? 아브라함은 소돔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막기 위해 중재를 했던 인물이다(창 18:16~33). 하나님은 이러한 아브라함을 예언자라 불렀다(창 22:7). 이를 볼 때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계시록의 저자

다시 계시록으로 돌아가자. 우선 계시록의 저자를 사도 요한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은데, 정말 그런지 따져보겠다. 요한은 자신이 저자임을 계시록의 여러 곳에서 밝혔다(계 1:1, 2, 4;  22:8). 그런데 이 요한이 사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계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2세기 초기 기독교 변증가인 이레니우스이다. 그는 계시록이 ‘창조의 근본이신 이(계 3:14),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계 19:13), 죽임 당한 어린양(계 5:6)’ 등 요한복음의 표현과 신학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사도 요한이 계시록의 저자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레니우스의 주장은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 감독 디오니시우스에 의해 반박된다. 그는 계시록이 문체와 단어에 있어 히브리어와 아람어적인 요소가 많으므로 유려한 헬라어로 쓰인 요한복음과는 다른 저자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유명한 계 22:20의 마라나타도 아람어이다).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도 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는 견해다. 

그러면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누구일까? 우선 그는 소아시아(오늘날 튀르키예) 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던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 추정된다. 계시록에는 히브리-아람어의 특징 외에도 그가 유대교 전통에 해박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계 10장의 두루마리 환상은 에스겔 3장의 두루마리 환상을 인용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스스로 예언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데(계 1:1~3; 22:7, 10, 18), 특히 그가 사도들과 예언자들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것을 볼 때(계 18:20) 그가 사도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계시록의 저자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도라 칭한 적이 없다. 따라서 계시록을 쓴 사람은 사도 요한이 아니다.

환란을 겪고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편지,  계시록

요한은 계시록을 쓸 당시 예수의 환란에 동참하여 밧모섬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계 1:9). 밧모섬은 소아시아의 서남부에 있는 섬이다. 그곳은 반란자들의 유배지였다. 그는 아마도 유대-로마전쟁(66~70년)을 피해 소아시아로 이주해 온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 교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도자로 추정된다. 그는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입증했기 때문에 반란범으로 몰려 그 지역 유배지에 갇힌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배지에서 환란을 겪고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며 이 편지, 즉 계시록을 기록했다.

요한이 겪은 환란?

그러면 요한이 겪은 환란은 구체적으로 어떤 시대의 환란일까? 이 환란을 규명하면 계시록이 쓰인 연대를 추정할 수 있다. 계시록의 기록 시기에 대해서는 3가지 설이 존재한다. 첫째는 네로황제의 재임 기간인 54~66년설이다. 네로가 기독교를 박해한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네로 황제를 상징하는 짐승의 수 666이 이 주장의 근거이다(계 13:18). 둘째는 네로 사망 후 혼란기였던 68~69년설이다. “또 전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이 여덟째 왕이니(계 17:11)”이라는 구절이 이 주장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계시록 17장에 로마를 바벨론으로 표하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러한 표현은 문헌학적으로 예루살렘이 로마에 멸망한 70년 이후에 쓰인 것으로 특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70년 이후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 상황이 극심했던,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라고 추정할 수 있다. 

도미티아누스 때  박해 받는 교회들에게 희망을...

도미티아누스 때에는 어떤 박해가 있었을까? 우선 도미티아누스는 모든 공문서에 자신을 하나님으로 표현했고, 에베소 지역에 큰 신전을 세웠다. 그리고 자신을 신으로 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본보기로 처형했다. 또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걷었는데, 종족적 유대인을 넘어 유대인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자들까지로 그 범위를 확대했다.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들은 종교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큰 박해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예언자 요한은 이러한 박해 상황에 있는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에 희망을 주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편지를 쓴 것이다. 그의 이름이 본래 요한이었을 수도, 존경받는 사도 요한의 이름을 빌려 이 편지를 쓴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계시록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 주부터는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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