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유기농수도사
'내 맘의 문을 여소서', '우리에게 향하신'
건반 : 백미
진행 : 이경은

두아디라 교회 (계2:18-29)

두아디라는 기원전 190년경에 로마에 편입되었지만, 로마 황제를 위한 신전은 없었다. 그래도 황제를 위한 제단과 황제 숭배를 안내하는 사제들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상업과 무역이 아주 활발했다. 그래서 온갖 구두 제작, 아마포노동자, 염색공, 제철구, 공업, 도공, 재단사, 가죽노동자, 직물상인 등 다양한 분야의 상인 조합들이 있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으로서 자색 옷감 장수였던 루디아가 바로 두아디라 출신이었다.(행16:14)

이 지역 상인 조합들이 수호신으로 섬기는 신이 있었는데, 바로 아폴론이다. 그리스어로는 아폴론이고 로마어로는 아폴로인데, 이 아폴론은 제우스의 아들이다. 18절에서 굳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신의 아들이 아폴론이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말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상인 조합들을 로마 지배 문화에 소속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 모두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을 신의 아들로 섬기고 있었는데, 요한계시록 저자는 '과연 진정한 신의 아들은 아폴론이냐? 예수님이냐?'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참고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막1:1)"라고 했을 때,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신의 아들 하면 누구나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떠올렸다. 그는 유대 로마 전쟁을 끝마치고 네로의 뒤를 이어서 황제로 등극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서도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22:20의 세금논쟁 기사에서 주화의 티베리우스 황제 그림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떠올릴지 모르지만, 로마인 대부분은 황제를 떠올리거나, 두아디라에서는 아폴론을 떠올렸던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칭찬

19절에서 두아디라 교회를 칭찬하는데, ‘네 행위와 네 사랑과 네 믿음과 섬김과 오래 참음을 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행위 안에 속한 네 가지 즉,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수동적 인내라기보다는 비폭력적 저항을 통한 인내)이다. 두아디라 교회가 이것을 잘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 알고 있고,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더 훌륭하다고 함은 진보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교회에 대한 전체적인 맥락은 엄청난 칭찬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책망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이라는 여자가 들어와서 예언자 활동을 한 것으로 책망받는다(24절). 그래서 그녀의 가르침을 아직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여자가 지금 이 교회를 흔들 위험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이 교회가 이것에 대해 처음부터 경계했어야 하는데 지금 이 여자의 예언 활동을 쳐낼까 말까 하는 애매한 상황에 있는 것으로 예측된다. 실제로 이세벨이 이 여자의 본명은 아니고 이 여자가 하는 행위가 바로 구약의 아합왕의 부인이었던 이세벨과 같았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초대 교회의 예언자는 남자나 여자나 동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예언자를 자처한 이 여자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 했던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발람, 이세벨 같은 니골라당 계열이 하던 행위이다. 이들의 가르침은 얼마든지 너희는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아폴론 신전에서 상인 조합이 개최하는 아폴론을 위한 축제에 참여해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전혀 문제가 없으니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깊은 뜻은 훨씬 더 큰 자유에 있는 것이지, 그렇게 율법 가지고 따지는 게 아니라고 두아디라에 들어온 예언자가 얘기했을 확률이 엄청 높았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의 저자는 경고하며 거기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세벨의 자녀들을 죽게 할 것인데, 그때 모든 교회는 그 분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살피는 분임을 알게 되고, 또 그들이 하는 대로 갚아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세벨은 어떤 여자인가?

그렇다면 이세벨은 어떤 여자인가? 이세벨은 아합의 부인이다.(왕상16:29-33) 아합왕이 다스리던 북이스라엘은 이때가 다윗과 솔로몬 이후에 가장 번영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이세벨과 정략 결혼한 후 그녀의 악행을 고발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다. 나봇이란 사람의 포도원에 아합왕이 자기 정원을 꾸미고 싶었지만 거절당하자, 남편이 속앓이하는 것을 보고, 이세벨은 깡패 같은 놈들 두 명을 섭외해서 나봇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고 거짓 증언하게 만든 후, 그를 죽여버리고 땅을 뺏어서 아합왕에게 주었다. 또한 이세벨 밑에서 녹을 먹던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이 있었는데, 야웨 전통의 이스라엘에게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 문화를 강력하게 심어서 제국주의를 꿈꾸게 했던 여자가 바로 이세벨이었다.

그러나 그런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끌고 들어오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나봇같이 억울한 사람들이 엄청 늘어난다. 사회적 양극화와 빈부의 차이가 심해진다. 그러면 하나님만 왕이시라고 하는 평등주의적인 이상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두아디라의 상인 조합들이 벌이는 축제와 로마의 상업 문화 속에서 부유한 자들만이 떵떵거리며 사는 상황에서,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 섬기며 사랑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세벨이라는 예언자의 말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 예수님과 같이 온 민족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겠다고 약속한다.(계22:16) 그리고 뒤에 있는 사람은 하늘의 밝은 빛처럼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한 사람은 별처럼 영원히 빛날 것이다.(단12:3)

사데교회(계3:1~6)

사데는 B.C.680년부터 546년에 존재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 사르디스인데, B.C.133년 로마에 편입되었으나 A.D.17년에 큰 지진으로 망했다. 그러나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고대 왕국의 수도를 재건하도록 돕자, 백성들은 시저의 사데라고 칭송한다. 인구는 10만 정도이고, 금광 산업, 상업, 모직이 발달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신전과 아데미 여신 신전도 있었다.

문제는 ‘살아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라는 요한계시록 저자의 평가와는 반대로, 사데교회 교인 스스로는 교회를 열심히 섬기며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키벨레의 여신 제사 의식에는 사제들이 황소의 피로 옷을 적시면서 정결하는 예식이 있었다. 이처럼 사데교회는 로마의 제국 문화에 완전히 동화된 교회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데교회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었다. 남아있는 몇 사람만 흰옷을 더럽히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과 동행할 자격이 있는 것이고,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인데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리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5절)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이것은 칭찬하는 말이 아니라, 사데교회의 실상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과연 지금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있는 것인가? 아니면 실상은 죽었으나, 자본주의의 돈으로 살아있는 것인가?

정리/천광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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