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유기농수도사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내 모습 이대로'
건반 : 백미
진행 : 이경은

빌라델비아 교회

빌라델비아는 BC 159~138년, 버가모 왕 아탈로스 2세가 세운 도시이다. 당시 왕이었던 아탈로스 2세는 형 유메네스에게 왕위를 양보했는데, 여기서 형제의 도시, ‘필라델피아(‘philos’ 사랑 + ‘Adslpos’ 형제)‘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AD 17년 대지진이 있은 후에,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의 도움으로 재건되었으며, 농업과 공업 발전한 도시였다. 빌라델비아에는 로마 황제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신전이 존재했다.

요한계시록 3:7~13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편지이다.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열쇠’라는 표현은 이사야 22:22(엘리야김이라는 왕을 세우면서 다윗의 열쇠를 그에게 주겠다고 약속하며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는 내용)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계시록이 ‘다윗의 열쇠’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메시야는 다윗에게서 나온다’는 전승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보인다. 계시록은 예수님은 천국 뿐 아니라 심판의 열쇠도 가지고 계신다고 전하며,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마 16:19)에 비할 수 없는 예수님의 권세를 드러낸다.

빌라델비아 교회 칭찬

요한계시록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늘문을 열어 둔 교회라 칭찬만을 받는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교회였고, 세력은 적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으며 감옥이나 재판에서도 예수님을 증언하던 교회였다. 서머나교회와 마찬가지로 ‘사탄의 무리’라 불리던 유대인들의 거짓 증언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계시록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타협하지 않았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그들이 네게 와서 꿇어 엎드리게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걸 보여주겠다’(계 3:9)는 위로의 말씀을 전했다. 또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문을 열어두었다’, ‘네 손에 맡기겠다’고 전하는 내용은 내세가 아닌 가까운 미래에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 교회는 천국에 ‘간다’라고 표현하지만, 계시록을 비롯한 성서는 천국이 ‘온다’, ‘이 땅에 임한다’고 가르친다. 계 3:10~11은 이미 빌라델비가 교회가 생명의 면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면서, 내가 곧 가겠다는 말씀을 전하는데, 이것은 하늘, 땅과 같은 공간개념으로서 하늘에서 땅으로 예수님이 재림하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함께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맞다.

빌라델피아 교회 상징

계 3:12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성전 기둥이 될 것이라 전한다. 계 21:22에는 성전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는데 그럼에도 성전 기둥이 될 것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이 성전이 되시는 때에 엄청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계 3:12의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이사야 62:1~3가 전하는 내용, ‘네게서 의가 이루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뭇 왕이 네가 받은 영광을 볼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부를 때에, 주님께서 네게 지어 주신 새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하는 내용과 의미가 같다. 로마의 지배, 유대인 방해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켜낸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해 불의 가운데 정의가 드러날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을 알리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빌라델피아 교회는 작은 교회로, 세력도 작고 힘도 없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냈던 교회였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미 면류관을 얻은 교회였으며, 끝까지 그것을 빼앗기지 않고 지킬 때에 보상받을 것이라 약속도 받은 교회였다. 계시록은 이런 빌라델비아 교회의 모습과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약속을 통해 세상은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 전한다.

라오디게아 교회

라디오게아는 BC 253년, 안티오코스 2세가 건립한 도시이다. 안티오코스 2세의 아내 이름, ‘라오디케’를 따서 이름을 지었고, 133년에 로마에 편입되었다. 라디오게아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였다. 라디오게아에는 신전은 없었으나 도미티아누스 황제 제단은 존재했다고 한다. AD 60년 대지진 때 도시가 붕괴되었으나, 로마의 도움도 거절하고 스스로 도시를 재건할 만큼 부유한 도시였으며 상업, 무역, 섬유, 금광업, 은행, 의학교를 비롯해 약품 생산도 할 정도로 부유한 도시였다. 바울이 직접 선교한 도시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바울과 분명한 연관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골 4:13~16).

계 3:14~22 이런 라디오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는 분은 ‘아멘이신 분, 곧 진리에 직접 참여하시는 분(이사야 65:16)이시며, 그 분은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며, 하나님 창조의 처음이신 분(요 1:1)’, 곧 예수님 이라고 전한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책망

라디오게아 교회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는 책망을 받는다. 이것은 신앙의 정체성이 애매모호하다는 의미였다. 로마 지배에 적당히 순응하면서 적당히 신앙생활하려는 라디오게아 교인들에 대한 책망이었으며, 라디오게아 교회의 모습은 자본주의에 순응하고 권력에 적당히 기웃거리며 신앙생활 하는 오늘날 한국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는 표현은 라디오게아 지역이 골로새 지역의 차가운 물과 시에라볼리 지역의 뜨거운 온천수를 수로로 받고 있었는데 수로로 오는 동안 찬물도, 뜨거운 물도 미지근해졌던 상황을 비유했던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라디오게아 교회가 로마 지배에 적당히 순응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1세기 그리스도교가 당시 사회에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평등의식이었다. 반면 평등을 강력히 거부했던 것이 바로 로마 제국의 사회 구조였다. 분명한 계급으로 사회를 유지하는 로마 제국에 순응했다는 것은 평등에 반하는 제국의 사회 구조를 인정했다는 의미였다.

계시록은 이렇게 적당히 두 발을 걸쳤던 라디오게아를 향해 분명한 진리이신 예수님,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을 전한다. 그 분의 명확한 삶을 제대로 따르지 않고 적당히 로마 문화에 기웃대며 동화 되어서 적당히 즐기는 행태를 비판한 것이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징

계 3:17은 라디오게아 교인들을 향해 가난하고 벌거벗었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라디오게아는 양모 사업이 발달해 비싼 옷을 입고 다녔다. 비싼 양모를 입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가난하고 벌거벗은 상태와 같다는 비판이었다. 이런 라디오게아 교회가 진정으로 부유하게 되기 위해서 계시록은 세 가지를 권면한다. 불에 정련한 금(신앙을 순수하게 만들어라)을 내게서 사고, 흰 옷(로마제국에 물들지 않는 것)을 사서 입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는 것이다. 이 권면은 금광과 양모, 약품 사업이 발달했던 도시 상황을 비유해 권면한 것이었다. 계시록은 세 권면에서 모두 ‘사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거저 받지 말고, 희생하고 헌신하며 노력하라는 의미였다.

이 세 권면을 계 3:20은 예수님의 문 두드림으로 표현한다. 이 두드림에 대한 응답은 개인이 아니다. 개인이 마음의 문을 연 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회개하고 문을 열어서 예수님이 들어오시게 하라는 의미이다. 계시록은 라디오게아 교회가 이렇게 할 때에 하늘의 권세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한다.

칭찬받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라디오게아 교회처럼 부유하면서도 평등과 같은 주님의 가치를 찾아볼 수 없는 교회가 아니라 작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교회가 아닐까? 우리가 만들어가는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정리/심민정준목

 
저작권자 © 평화나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