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온 땅의 주인', '주님의 은혜 넘치네'
건반 : 백미
진행 : 이경은

하늘의 예배

4장 1절부터 8장 5절까지는 일곱 봉인에 관한 새로운 또 하나의 환상이다. 먼저 4장은 하늘 보좌에 대한 이야기로, 소제목(새번역)에 ‘하늘의 예배’라고 소개하는데, 이는 마치 하늘 문이 열리고 환상 가운데 천사와 예수님이 집전하시는 장면을 상상케 한다. 중요한 것은 그 속뜻이 무엇이고, 당시에 왜 그렇게 이해했으며, 오늘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다. 고대인의 언어는 당시의 논리로 읽어야 실제의 의미를 알 수 있으므로, 그들이 신화적 이야기로 쓴 것을 우리가 자연과학적 이야기로 이해하면 안 된다(불트만의 ‘탈신화화’ 참조). 예를 들어, ‘예수님이 물 위를 걸었다’라고 할 때, 예수님이 온갖 악의 세력을 짓밟았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성경이 실제로 우리 믿음에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

‘하늘 문이 열리고(1절)’라고 할 때, 그 인식 속에는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가 있는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가 승천했고, 예수님도 하늘로 승천하셨고, 욥기서에는 하나님이 천상회의를 집전하는 모습등, 고대인들은 이렇게 이원적 생각을 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영적, 초월적) 세계와 눈에 보이는 땅의(사회, 문화, 정치적) 세계가 있다고 말이다. 한편 땅의 세계를 다스리는 왕들도 있었는데, 고대인들은 이 왕들이 땅을 다스리는 권세를 하늘에서 받았다고 여겼다. 일례로, 중국의 은나라는 최초의 조상신이 하늘신과 만났는데, 하늘신이 신하(조상신)에게 권위를 줬기 때문에, 은나라가 주변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다고 여겼다. 그런데 주나라가 은나라를 멸망시키면서, ‘민심이야말로 천심’이라고 여겼다. 훗날 이런 사상이 신화적 세계관에서 인문주의 세계관으로 바뀌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듯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사회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하늘의 신께서 주관하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종교에는 가시적 세계, 물리적 법칙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들의 신비 체험 있다. 그러나 신비 체험이 단순히 의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물질 차원까지 가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의식 차원에서 일어난 ‘하늘을 갔다 왔다’라는 신비한 경험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체험이 없으면 이런 논의들이 불가능하다. 이런 체험들을 고대에는 하늘의 세계가 있고, 땅의 세계가 있고, 하늘도 1, 2, 3층이 있는 실제의 세계로 이해한 것이다. 이처럼 고대에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하늘의 하나님 섭리에 의해 벌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던 것이다. 예수님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은 예수님도 그렇게 하늘의 세계를 믿었고, 거기서 무엇인가 이루어졌으니 이 땅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면서, 하늘의 세계에서 이루어진 가치관이나 이상 세계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오늘날은 자연과학적 세계관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삶의 문제를 자연과학적만 해결할 수 없다. 여전히 의미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21세기는 성경을 의미와 해석으로 읽어, 이 사건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신학이 발전했다. 그러므로 오늘날은 눈에 보이는 유한한 물질세계와 자연과학적, 사회과학적 정치 질서 속에 살면서, 이 모든 가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초월적 힘에 대한 믿음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얘기하는 것이다. 나아가 물질적이고 어려운 이 땅의 현실에 비록 박해받고 핍박당할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겨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늘의 세계를 본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요한 저술 당시는 땅과 하늘이 나눠진 이원적 세계관, 신화적 세계관으로 설명을 했다. ‘하늘의 문이 열려 있다’라고 할 때, 하늘은 초월적 세계관이고 땅은 주로 로마 제국을 뜻한다.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땅에는 인간이 있다. 그래서 인간 세계에서 생기는 어려움, 로마의 박해를 받는 이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이 세상을 넘어서는 더 강력한 신적 존재를 의지했음을 알 수 있다.

하늘보좌에 계신 분

이제 하늘에서 나팔 소리가 들린다. “이리로 올라오너라. 이 뒤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주겠다.”라고 말한다. 이 뒤에 일어날 일들은 4장부터 시작해서 22장 전체를 말한다. 올라 보니 하늘에는 보좌가 하나 놓여 있고, 보좌에 한 분이 앉아 계셨다. 그런데 여기에 아우구스투스(황제)는 없다. 이것이 로마 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황제 숭배와 불의한 지배에 대한 저항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이 세계가 로마 지배 아래 있는 것 같지만, 하늘을 열어 보니 하늘 보좌가 있고 거기에 하나님 한 분만 계시다면, 실제로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실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시103:19 참조)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을 묘사하는데(3절), 그 모습이 벽옥(홍옥)같고, 보좌 둘레에는 비치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다. 모든 종교 전통에서는 신을 그대로 볼 수가 없기에 이렇게 묘사하는 것이다.(딤전6:16 참조) 지금까지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지만, 놀랍게도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이라고 말하면서까지 희망을 주고 싶은 것이다.(계22:4 참조) 그리고 그 보좌 둘레에는 24장로의 보좌가 있는데, 그들은 흰옷을 입고, 머리에는 금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었다(4절). 흰옷은 거룩한 의를 상징한다.(계19:8 참조)

이제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천둥이 나고, 보좌 앞에는 횃불 일곱 개가 타고 있다. 일곱은 완전수로써, 완전한 하나님이 등장하심을 나타낸다. 보좌 앞에는 빛남을 상징하는 유리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둘레에는 앞뒤에 눈이 가득 달린 네 개의 생물이 있었다. 눈이 가득 달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백성의 고통을 알고, 모든 것을 다 살피신다는 의미이다.

‘오실 분(8절)’은 과거, 현재, 미래까지 역사를 주관할 뿐만 아니라, 이제 곧 오실 것이며,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셔서 보좌에 앉아 계신 분으로, 네 생물들이 ‘거룩하다’를 반복하며 그분께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는데, 이때 24장로도 그분께 경배드리며 자기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내려놓는다. 이것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경배드리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가장 높은 권위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4장은 로마 제국 시대에 다른 나라 왕들이 황제 앞에 절하던 상황에서 진짜 경배받을 분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말년에 기록되었다. 도미티아누스가 보내는 공문서에서 ‘주님’이라는 표현은 황제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11절에 ‘우리의 주님’이란 단어를 하나님께 사용하며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라고 명시했다. 이것은 저항과 투쟁을 불러일으키며, 요한계시록 4장에서 이렇게 하늘 보좌를 소개한다. 이것은 박해받는 사람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지만, 반대로 이교 문화를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정리/천광우목사

저작권자 © 평화나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