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천광우목사
'비전', '죽임 당하신 어린양'
건반 : 백미
진행 : 이경은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오늘은 한 애청자의 질문으로 시작하겠다. “요한복음을 비롯한 요한 계열의 책을 바탕으로 성육신과 삼위일체 등의 교리가 만들어졌다고 배웠다. 하지만 예수가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리스도론 신학은 공감하기 어렵다. 이러한 요한 계열의 신앙이 역사적 예수의 삶을 희미하게 만들 뿐 아니라 기독교를 예수님을 따라 제자로 살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는 종교로 변질시켰다고 생각한다. 과연 속죄의 신학, 성육신과 삼위일체의 그리스도론 교리가 지금도 믿고 따라야 할 진리인지 궁금하다.”

십자가 사건의 해석

그리스도론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십자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다윗과 같이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존재로 믿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끔찍한 십자가형으로 돌아가셨다. 그런데 부활 경험으로 예수님의 현존을 느낀 제자들은 십자가를 재해석하게 된다. 첫 번째 해석은 속죄신학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고통을 당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하셨다. 이 사건은 일회적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한 분이시기에 한 번의 사건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속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해석은 로마의 불의함 증명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의인이시다. 의로우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단 로마는 불의하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는 로마제국의 불의함을 만천하에 폭로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해석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으니, 십자가는 곧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해석이다.

속죄 신앙의 21세기적 의해

교리대로 믿는다면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러 오신 분이시다. 그러면 예수님은 속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사실 예수님은 죽기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불의에 맞서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로마제국의 죄를 만천하에 폭로하고. 이후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죄를 줄여가도록 한 것이다. 우리가 죄로 당해야 할 고통을 그가 먼저 겪으심으로, 우리를 회개케 해서 죄를 줄이는 것, 이것이 속죄 신앙의 21세기적 이해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예수님의 존재론에 집중하게 된 이유

성육신과 삼위일체는 그리스도론과 관련된 것인데, 모두 요한복음의 고백이다. 하지만 공관복음은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펼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예수님이 펼치신 하나님 나라 운동은, 병자(약한 것)를 고치고, 귀신(악한 것)을 축출하고, 함께 공동식사(평등)를 나누고, 복음(하나님 나라)을 가르치고 선포하신 것으로 요약된다. 이를 알고 있던 요한복음의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예수님으로 인해 요한의 공동체가 유대교로부터 축출당했기 때문이다. 유대-로마전쟁 이후 거의 소멸된 유대교는 80년 경 바리새파의 유대교 재건운동으로 인해 되살아난다. 그 때 구약의 정경화 작업을 했고, 이단을 축출했는데 ‘나사렛파’도 그 중 하나였다. 나사렛파는 더 이상 유대교 공동체가 아니었기에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더욱 중요해 진 것이다. 그래서 유대전통에도 근거하고 헬라철학으로도 설명 가능한 말씀 즉, 로고스(요 1:1~18)를 가지고 예수님을 설명한 것이다(로고스는 헬라철학에서 이 세상을 운행하는 원리로 이해된다).

성육신

그러면 말씀(로고스)이 육신(사르크스)가 되었다는 이야기(요 1:14)는 왜 나왔나? 당시 고대 근동의 가장 중요한 종교는 영지주의인데, 영지주의는 썩어 없어질 육신을 거부한다. 육체는 정신의 감옥이기에 정신은 감옥에서 해방되어 신령한 세계로 돌아가야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육신을 학대하고, 또 쾌락을 즐겼다(양쪽 모두 육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기에 본질은 같다). 하지만 유대-기독교전통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육신을 악하게 보지 않는다. 그래서 높은 곳에 있는 로고스가 낮은 곳인 사르크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이것이 요한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삼위일체

유대교에서 하나님을 따르려면 율법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사람 들은 율법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다. 그들은 하나님은 볼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려고 했다. 그들에게 예수님과 하나님은 구별되지 않는 존재였다. 그들이 유대교로부터 축출당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한 후 모진 박해를 받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때, 그들은 예수님의 현존을 느꼈다. 그래서 예수님의 현존을 느끼게 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그 존재를 예수님이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으로 이해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어떤 논리가 아니라 신앙적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말한 이유

그러면 요한복음의 저자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까지 말하고 싶었던 이유는 뭘까? 요한 공동체가 정말 말하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다’이라는 사실이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요한 공동체는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일치가 아닌 기능적 일치를 말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일하셨듯, 우리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기능적 일치는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은 ‘예수 숭배’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의 장벽을 허문 예수님을 통해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믿음을 구원의 수단으로 삼아 저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하자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요한 공동체의 그리스도론이다.

정리/오광석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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