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죽임당하신 어린양', '사랑스런 주님 음성'
패널 : 오광석
진행 : 이경은

 일곱대접의 심판

14만 4천은 구원받은 사람들을 상징했다. 이제 그들을 괴롭혔던 짐승의 세력들을 심판하는 일곱 진노가 펼쳐진다. 드디어 일곱 대접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다. 일종의 새로운 환상이 펼쳐진다. 그 환상 속에서, 하늘에 있는 증거의 장소인 장막 성전이 열린다(이단 유재열이 자주 사용). 장막은 출애굽기에서 모세의 회막 또는 성막을 상상하게 한다. 회막에서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두고 예배드렸기에, 거룩한 회막, 성막이라고 부른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을 넣어 하나님과 계약 맺은 백성이라는 증거를 삼았다. 계시록 환상의 장소인 장막 성전은 출애굽의 현재화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현재 애굽이라고 볼 수 있는 로마 제국을 탈출시킬,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흰 옷을 입은 천사

이어서 성전으로부터 깨끗하게 빛나는 모시옷을 입은 천사가 나왔다. 이들은 옳은 의를 행한 자들을 의미한다. 가슴에는 제사장 옷의 한 모형인 금띠를 했다(출39:5, 계1:13 참고). 이 천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특별한 의의 일을 행하며, 제사장의 역할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 역할까지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자라는 것을 의미한다(단10:5 참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 채운 금대접이 나오는데, 이 금대접은 성도들의 향기로운 기도가 담긴 대접이었다. 이제는 그 안에 그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다. 그리고 일곱 재난이 끝나기 전까지, 연기 가득한(하나님의 임재 상징) 성전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방해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제 심판때 까지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기에, 임박한 재난에 피할 수 없는 막을 수 없는 강력함을 상징한다.

첫 번째 대접

일곱나팔과 일곱대접은 아주 유사하다(16:1-9). 일곱 나팔을 불 때처럼, 첫 번째 대접은 땅에 쏟았고, 두 번째는 바다에, 세 번째는 강과 샘물에 쏟았다. 이렇게 첫 번째 대접을 땅에 쏟았는데,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우상에게 절하는 자들에게 악성 종기가 생겼다(출9:8-12 참고). 일부는 강력하게 로마 제국에 붙어 부역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부역하는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모두 로마 대제국을 유지하는데 일조한 것은 사실이다.(참고: 예수님이 거라사 지역에서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쫓아낼 때, 돼지 떼를 전부 몰아냈는데, 돼지 떼를 키우는 목장의 주인들은 얼마나 손해인가? 그러나 돼지 떼야말로 로마 군인의 식량이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로마가 전쟁을 일으키는데 협조한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 대접

이제 두 번째 대접을 바다에 쏟으니 피처럼 되었고, 바다의 모든 생물이 죽었다. 로마가 일으킨 수많은 해전으로 인해, 피바다가 되었던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똑같이 갚아주는 것이다.

세 번째 대접을 강과 샘물에 쏟으니 모든 물이 피가 되었다. 고대 문명은 강가나 바닷가처럼 물이 풍부한 곳에서 발상했다(출17:6 참고). 나일강의 물은 풍부했고, 소돔과 고모라도 사해 아래쪽 사해 평원에 있었다. 그에 반해 광야는 물이 없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을 상징한다. 그런데 이제 살기 좋은 땅은 모두 피바다가 되고, 살 수 없는 광야에서는 마실 물을 경험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이 세상 왕국이 번영만을 추구하며 피로 물들인 역사가 극명하게 대조된다.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호칭이 달라진다. 그리스-로마 철학에서는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미래에도 계실 분”이라고 표현하지만, 성경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장차 오실 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에서는 더이상 “장차 오실 이”가 아닌, “지금 여기로 오고 있는 분”이라고 표현한다. 이미 그분이 지금 오셔서 이미 심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대접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담긴 넷째 대접을 해에다 쏟았더니,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운다. 이들에게는 화형의 트라우마가 있다. 로마의 처형법은 사자굴에 던지기도 하고, 참수하는 등 다양한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화형이었다. 그러나 인간을 태워 제사 지내는 것을 하나님은 매우 싫어하셨다(레18:21, 신18:10 참고). 그래서 하나님이 똑같이 갚아주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비방하며 회개하지 않았다.

이제 다섯 번째(16:10-16). 다섯 번째 대접이 짐승의 왕좌에 쏟아지니, 짐승의 나라가 어두워진다. 사람들은 서로 부딪혀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물고, 악성 종기로 말미암아 괴로워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더이상 해와 달의 빛이 필요 없이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양이 그 등불이 되는 곳이다(계21:23-24, 22:5 참고).

여섯 번째 대접

이어서 여섯 번째 천사가 그 대접을 유프라테스에 쏟으니, 강물이 말라버린다. 모든 생명의 젖줄이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왕들이 동방으로부터 다 모여서 하나님과 마지막 대결을 준비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마겟돈 전쟁’이다. 그들은 귀신의 영으로서 개구리 같은 모습으로 기이한 이적을 행하면서 왕들을 찾아 돌아다녔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에 일어날 전쟁에 대비하여 왕들을 모은다.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이라는 표현이 중요하다. 소예언서에는 ‘야훼의 날’이라는 표현이 있다(욜2:11 참고). 이스라엘은 약소국이라 제국에 의해 늘 핍박당했다. 그래서 이 표현이 처음에는 야훼 하나님이 오시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메타포로 사용되다가, 소예언서에서는 야훼의 날이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도 심판받을 사람들이 있음을 경고하는 표현으로도 사용되었다. 이렇듯 야훼의 날은 정의가 되살아나고 불의가 사라지는 날이다. 그때를 대비하여 한쪽에서는 지상의 왕들이 끝까지 회개치 않고 동맹을 맺는데, 그 장소가 ‘므깃도 산’이다. 히브리어로는 ‘하르 므깃도’인데 그것을 ‘아마겟돈’으로 음역한 것이다. 사실 므깃도 지역은 산이 없는 평지이지만,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최대의 격전지였다. 이곳은 사사 드보라가 가나안의 시스라 왕과 맞서 전쟁하여 이겼던 장소이고, 요시야 왕이 애굽의 느보 왕과 싸우다가 전사한 곳이 바로 므깃도이다. 이제 곧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옷을 갖춰 입고 깨어 있어야 한다. 그날이 도둑처럼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일곱째 대접

마지막으로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으니, 성전 보좌로부터 “다 되었다”라는 큰 음성이 울려 나왔다(16:17-21). 마침내 하나님께 대적한 모든 바벨론 성들이 무너지고 세 조각난다(사 24:19-20 참고). 그리고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1달란트=32.27kg)이 사람들에게 내리는 재앙이 이어진다(출9:24-26 참고. 소돔과 고모라 멸망 시 유황과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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