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내 맘이 낙심되며', '오직 주로 인해'
패널 : 오광석 / 진행 : 이경은

성서란 과연 어떤 책인가?

성서란 과연 어떤 책인가? 성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 속에서 어떻게 하나님 말씀 또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 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의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히 4:12)

사람은 자기만의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만의 이야기가 있는데, 그 이야기의 핵심이 성서다. 성서 이전의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은 볼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이야기는 알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을 보여주신 예수도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분으로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예수가 그리스도다.”라고 고백하는 종교가 그리스도교다. 그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 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기준이 성서이다. 가령, 산 위에서 홀로 텐트를 치고 문득 밤하늘의 별을 봤는데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진다고 했을 때, 그것이 개인에게는 하나님을 만난 소중한 체험일 수 있지만, 기준은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전통은 성서를 그리스도인의 삶과 정체성을 형성하는 기준으로 결정했는데, 이것을 ‘캐논(정경)’이라 한다.

새로운 개혁과 변혁을 위해서는 성서를 제대로 읽는 그리스도인의 조직된 힘이 필요하다. 지금 그리스도교가 세상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게 된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 성서를 안 읽는다. 둘째, 성서를 잘못 읽는다. 잘못 읽는 경우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내 생각대로 읽는다. “성서가 말하는 것을 성서로 말하게 하라.”라는 종교 개혁 정신이 있다. 성서가 말하는 것을 안 듣고, 내가 가진 생각을 성서에서 찾아 그것만 성서 말씀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성서가 기준이 아니라 내가 기준이 된 것이다.

성서를 잘 못 읽는 또 다른 경우는 성서를 교리로 읽는다는 것이다. 교리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교리는 그리스도인이 믿는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그러나 교리는 시대 상황에 맞춰 만들어지고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언제나 진리이기는 어렵다. 어떤 한 시점에 만든 교리로 원출처인 성서를 해석하면, 성서의 복잡하고 풍성한 뜻을 단순하고 획일적인 뜻으로 재단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셋째는 성서를 아는 것에서 행동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이 세 가지만 해결될 수 있다면, 한국 개신교는 문제 없을 것이다.

성서의 저자와 시대적 배경

만약, 성서에 기록된 언어가 인간의 언어라고 하면, 저자는 인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저자는 하나님이다. 창세기 1장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라고 기록하는데, 하나님이 저자면 “태초에 내가 천지를 창조했다.”라고 써야 한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하나님이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우리는 성서를 하나님 말씀이라고 말한다.

다음 구약의 예를 보라. 셋은 아담의 둘째 아들인데, 그가 에노스를 낳았다. 그때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을 불렀다(창 4:26 참고). 주님의 이름은 ‘야웨’다. 그러나 이 이름은 출애굽기에 처음 나온다(출 6:3 참고).

신약의 예를 보자면, 마가복음에서는 한 사람이 다가와서 예수님을 부를 때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예수님이 “어찌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라고 말한다(막 10:17-18 참고). 그러나 마태복음은 똑같은 사건을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른 후, ‘선한 일’을 묻는다. 그러자 예수님이 “선한 일을 나한테 묻느냐?”라고 말한다(마 19:16-17). 그렇다면 이 사람은 과연 ‘선하신 선생님’이라고 했을까? ‘선한 일’이라고 했을까? 하나님이 저자라면, 이렇게 틀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존할 수 있는가? 누가복음에서는 저자가 “내가 썼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심지어 “나보다 먼저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많다.”라고 말한다(눅 1:1-4 참고). 바울도 “나 바울은 친필로 인사의 말을 씁니다(고전 16:21).”라고 말한다. 이런 구절들을 볼 때, 기독교 전통 안에서 정경(캐논)이 된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겠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 속에 담겨 있다. 성서의 저자들은 저술 시 하나님 말씀이라 생각하지 않고 썼을 수도 있다.

성서를 읽다 보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 어려운 구절도 있다. “살인하지 말라.”라는 십계명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다 죽여라(삼상 15:1 이하 참고).”라는 명령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이 양쪽의 하나님 말씀 사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근친상간, 노예제도(출 21:20-21), 여성차별(민 5:11-31; 고전 11:3), 폭력(잠 13:24)과 살인, 생리현상(레 12:1-5; 15:16), 인권유린(창 19:8; 출 21:20-21), 장애인차별(레 21:16-21) 등,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읽을 때, 얼마나 위험한지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성서는 시대 상을 반영하는 인간의 언어 안에 담긴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1차적으로 인간의 언어를 읽어야 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인간의 언어가 어떤 상황에서 쓰였는지를 알아야 한다. 성서는 ‘지금 여기’에서 쓰인 것이 아니라, ‘그때 거기’에서 쓰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 속에 담기면서 당시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적 한계와 사유의 한계에 갇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계에 갇힌 인간의 문화와 사유를 문자 그대로의 하나님 말씀으로 잘못 읽어내어 오늘날 그대로 적용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는 반드시 지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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