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전하세(Pass it on)', '때로는 너의 앞에
패널 : 오광석 / 진행 : 이경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그때 거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에 담겨있다고 할 때,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렇다면 어떤 상황의 인간 언어에 담겨있느냐?”이다.  성서는 ‘지금 여기’가 아니라 ‘그때 거기’에서 쓰인 것이다. 성서는 약 1000년의 시간 동안, 다양한 저자들이 자기 상황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어떤 감동 속에서 쓴 것이다. 21세기의 독자가 기원전 100년 또는 기원후 30년의 이야기를 아는 것은 어렵기에, ‘그때 거기’에 주목해야 한다.

성서가 기록된 시기는 자연과학이 없던 시절이다. 그러나 현대인은 발전된 자연과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성서를 읽을 때 충돌한다. 예를 들면, ‘태양이 멈추었다(수10:12-13 참고).’라는 기록을 객관적 사실로 볼 것인지, 주관적 느낌으로 볼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 현대인은 해가 뜨지 않고, 지구가 자전한다는 객관적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21세기 기상 캐스터는 ‘해 뜨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때로는 습관적인 언어의 사용이 객관적 사실을 호도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이런 표현을 들은 사람들은 정말 해가 뜨고, 지는 것으로 인지한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태양의 멈춤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승리했고 하나님께서 승리할 수 있도록 낮에 충분한 시간을 확보해 주셨다는 체험에 대한 고백이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보다 신화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대에 쓰인 성서를 읽을 때, 성서의 기자들이 아직 태양이 있음을 경험하고 ‘하나님이 태양을 멈춰 놓으셨구나!’라고 그들의 신앙 고백적 언어로 쓴 것을 객관적 사실로 투영해서 읽으면 모순이 생긴다.

성서를 읽는 이유?

성서를 읽는 이유는 성서를 통해서 내 삶이 변화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성서를 과학적 지식으로 읽은 후, 하나님의 말씀이니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 한 예로, 어떤 사람이 창세기(창30:37-39 참고)를 읽고 자연과학적 지식이라 생각해서, 야곱처럼 양을 교미 시킨다면, 원하는 무늬의 양이 나올 것인가? 오히려 자연과학적 상식에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구름 타고 가는 느낌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그런 사고이다. 승천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성층권에 계신가? 대기권에 계신가? 아니면 우주 어디에 계신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사건은 ‘언제나 보편적으로 어디나 계시는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갔다.’라고 재해석해야 한다. 이것을 객관적 사실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세부적인 묘사들이 객관적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고, 묘사로 읽어야 한다.

일례로, 출애굽 당시 장정만 60만 명이 나왔고, 남녀노소 합치면 200만 명 이상으로 예상한다. 200만 명은 고센 지역부터 가나안까지 일렬로 손잡고 설 수 있는 인원이다. 그러므로 이를 객관적 사실로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성서는 왜 60만 명으로 기록했는가? 성서는 오래도록 민담이나 전설로 구전되다가 기록되었기에 감동과 재미를 위해 부풀려진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출애굽 사건 자체가 거짓은 아니다. 분명히 애굽에서 신음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머물며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이룬 역사는 사실이다.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감동스럽게 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 묘사된 그대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을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셔서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가나안 땅에 오기까지 지켜주셨다는 신앙고백은 변함이 없다. 이처럼, 유한한 인간은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초자연적 언어로 표현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기적에만 매어두면 안 된다. 기적도 있지만, 사랑이나 은혜로도 하나님을 전할 수 있다. 신앙은 기적만을 나타내지 않고, 오히려 아픈데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않고 더 놀라운 삶을 살아내는 모습에서 드러난다.

유의미한 해석 필요

인간의 언어를 하나님 말씀으로 치환하기 전에 인간의 언어가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의 말은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고, 어떤 사태를 묘사할 수도 있고, 사람을 설득하거나 명령을 내리고, 맹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시, 소설, 수필, 편지, 설명문, 논설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이 있고, 그것이 요구하고 의도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성서를 읽을 때 쉽게 범하는 잘못은 장르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말씀 그대로 읽거나 역사적, 과학적 사실로만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청개구리 동화에서 이야기의 사실 여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삶을 변화시켜 올바른 길로 향하게 만드느냐다. 문학적으로 청개구리 이야기를 적용해보자. 청개구리는 왜 엄마 말을 안 들었을까?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등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다. 특히, 등장인물 중에 아빠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혹시 청개구리는 한부모 가정이 아닌가? 한부모 가정을 사회가 잘 돌보지 않았다면 외벌이로 힘들었을 테고, 만약 친구랑 싸우면 그 친구는 아빠가 도와주는데 청개구리는 그럴 수 없고, 따라서 울분이나 스트레스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청개구리가 다수가 아닌 소수 개구리라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읽으면 청개구리는 유색인종이다. 한 걸음 더 들어가,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과 결혼한 한국여자가 전쟁 후 미국에 갔는데, 남편이 죽고 아이와 홀로 남겨졌을 때, 유색인종이었던 그 아이는 청개구리와 같은 상황을 마주하지는 않았을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성서를 읽어야 한다.

또 다른 예로,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는 이야기를 가장 생생하게 기록한 것은 누가복음서다. 마리아는 천사에게 직접 수태고지를 듣고, “나는 아직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당시 유대교에서 여성들의 결혼 적령기는 열세 살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이 어느 날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받았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까? 당시 문화에서 남자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임신하면, 동네에 끌려나가서 남자들이 돌을 던져 죽였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떻게 이처럼 차분할 수 있었는가? 이런 방법으로 접근해야 성서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교리로만 읽으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그 이상 고민하지 않는다. 이는 성서를 읽지 않고, 교리를 읽은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처녀의 잉태 여부를 따지는 것은 저차원적인 성서 읽기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과연 당사자는 어떤 체험으로 구분했나? 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나?’라는 해석이 중요하다.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도 그런 일이 벌어질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거기서 실제적인 힘을 얻을 수 있고, 그때 성서가 내 삶에 유의미한 방식으로 적용되는 것이다.

저작권자 © 평화나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