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내 영혼은 안전합니다', '삶의 작은 일에도'
패널 : 오광석 / 진행 : 이경은

흔히 서양사에서는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고·중·근·현)를 기준으로 나눈다. 이것을 또다시 고대·중세와 근대·현대로 묶어 나눌 수도 있는데, 그 분기점에 과학이 있다. 과학적 방법론의 발견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다. 그리고 이 분기점의 핵심에 17세기의 뉴턴이 있다. 17세기 뉴턴의 과학적 방법론이 너무나 탁월했기 때문에, 18세기에는 사회로, 19세기에는 역사에까지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한다. 그래서 자연과학만이 아니라, 인문학, 사회학에서 사회과학, 인문과학 등 과학이라는 말을 붙인다. 자연과학적 방법론을 역사에 적용한 시기는 19세기다. 이런 흐름에 따라,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200여 년의 문헌들도 자연과학적인 세밀한 실험과 관찰과 분석을 성서에 적용하면서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다.

성서에 들이대는 과학적 접근 '성서 비평학'

그러나 최근 100년 동안 발전한 성서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일은 마치 과학계의 수술 메스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에 들이대는 것 같기에, 그것 자체가 두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앞서 다룬 것처럼 성서는 하나님의 뜻을 담은 인간의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라도 메스를 대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앙의 공든 탑(신념, 굳센 믿음)이 전부 무너지는 경험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단계를 뛰어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이것은 인간의 지식이지, 하나님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메스를 들고 성서를 세부적으로 분석하는 눈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성서 전체를 읽는 눈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일례로, 영화의 어떤 한 장면이 뇌리에 꽂혀 그 장면만 분석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영화 전체를 보는 눈을 막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기독교 변증가들의 성서 읽기 4가지 방법

초대 그리스도교 변증가들(흔히 교회의 아버지들, 교부)의 성서를 대하는 네 가지 태도를 기준으로 보려고 한다. 오늘날 19세기, 20세기 성서비평학 시대에도 이 자세는 여전히 유효하다.

첫째, 성서를 분석하더라도 언제나 성서 전체를 읽어야 한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바울, 야고보 등의 신학이 따로 있다. 이 관점들이 서로 분열하고 부딪쳐 반대될 때, 독자는 그중 어느 한쪽에 손드는 것을 선호하지만, 양쪽 모두를 잡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둘째, 성서를 읽는 목적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에서 그리스도교가 세워졌기에, 독자는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데, 그 기준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론(기독론)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에 놓고 읽어야 한다. 구약과 신약이 부딪치면 신약에 더 무게를 두고, 신약 안에서 부딪치면 예수 그리스도에 더 무게를 두고 읽어야 한다.

셋째, 개인의 영달, 욕망, 위로, 안전을 위해서도 성서를 읽지만, 성서는 그리스도교의 경전(캐논)이므로, 성서를 읽을 때 개인적이기보다 공동체적으로 읽어야 한다. 초대 교회 기독교 반증가들은 “성서가 그리스도교 교회 전체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세계 교회의 일원으로서 이 세상을 위해서 어떻게 성서 말씀이 이해되는가?”를 질문하며, 공동체적으로 성서를 읽었다. 그러므로 공동체 구성원들의 상호 신앙적 이해와 협력을 도모하기 위해 성서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를 고려하면서 읽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읽을 때도 개인의 영성 형성의 과정에서 읽어야 한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이 성서 읽기의 목표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 그 씨앗을 발화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을 충분히 펼칠 수 있는 나무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웨스트민스터 신앙 교리 문답의 첫 질문이자 답이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을 때, 영성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목적(성화)으로 읽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는 말씀을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리고 말씀을 외워야 한다. 외우면 마주한 상황에 무의식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삶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 침묵 훈련을 해야 한다(오늘날은 침묵할 새가 없이 떠드는 새만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위의 네 가지 성서 읽기 태도를 염두에 두면서, 인내와 경청과 기억(암기)과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으로 성서를 읽었다.

성서 읽기의 난제 

성서를 읽을 때 글로 읽는다는 것이 가장 큰 오해를 낳는다. 성서가 쓰인 시대 뿐만 아니라, 성서가 쓰인 후에도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성서는 눈으로 글을 본 것이 아니라, 입으로 말해지고, 귀로 들려졌다. 당시 문맹률이 높았기에, 누군가가 성서를 읽어주면 사람들이 듣는 방식의 신앙생활을 했다(신6:4, 롬10:17 참고). 똑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은 쉽지 않고 구술 언어는 한 번 듣고 사라지는 휘발성이 강하다. 반면에 문서 언어는 객관적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구술 문화와 문자 문화

그러므로 구술 문화와 문서(문자) 문화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구술 문화는 듣고, 직접 참여하면서 반응하는 속도가 빠르기에, 사유가 상황 의존적이고, 종합적이며, 통일적이다. 그런데 문서 문화는 반복해서 읽거나, 시간차를 두고 읽을 수 있기에 상황보다는 거리를 두고 읽는 추상적(논리적) 사고가 가능하다. 그래서 오늘날 문자 시대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보다 더 추상적이고,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다. 구어체와 문어체가 다르듯이 문화도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톱, 나무, 망치, 손도끼 네 종류 사물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 문자 문화권에 사는 사람은 톱, 손도끼, 망치를 하나로 묶고, 나무를 따로 분류한다. 도구와 도구가 아닌 재료로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구술 문화권에 사는 사람은 나무, 손도끼, 톱을 하나로 묶고, 망치를 따로 분류한다. 나무하러 갈 때는 손도끼나 톱을 들고 간 후, 집에 돌아와 잘라 온 나무에 무엇을 박고자 할 때 망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망치는 못 박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도구이기에 상황 의존적인 사유를 하는 것이다.

문자 문화권 사람들은 객관적 사물을 중심으로 관찰과 실험을 통해 지식을 조직한다. 그러나 구술 문화권 사람들은 사물보다도 인간의 말과 행동 속에서 경험된 것을 통해 내면의 지식을 쌓아간다. 그래서 문자 문화권 사람들은 성서를 읽다가 앞뒤 논리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구술 문화권에서는 그것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연과 더 밀착되어 있다. 말이 곧 사람이다. 사람의 말과 사람은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이미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기호다. 이처럼 성서는 문자문화 시대보다는 구술 문화 시대를 기본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성서를 읽어야 한다. 문자 문화권에서 ‘삭개오 이야기’나 ‘잃은 아들의 비유’는 객관적 거리를 두고 추상적으로 읽기에, 나의 이야기로 다가와서 크게 감동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구술 문화권에서는 상황 의존적으로 반응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정이입이 되고, 더욱 생생하게 나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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