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주는 길이요 진리 생명', '찬양하라 내 영혼아'
패널 : 오광석 / 진행 : 이경은

사건 아닌 이야기에 더 주목하는  문학 비평

인간은 사건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고, 다른 사람들의 평판을 청취한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발생한다. 성서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사건이 아니라 이야기에 더 주목하는 것이 문학비평이다. 이야기에는 여러 저자가 있다. 이야기를 기록한 실제 저자와 책 내부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함축적 저자가 있다. 이 저자는 실제 저자와 다를 수도 있다. 함축적 저자가 모든 이야기를 기획하고 그려내지만, 이야기꾼은 설화자이다. 실제 독자와는 또 다르게 읽는다. 이런 것을 세밀히 분석하는 것이 설화비평이다. 텍스트 안에 숨겨진 구성을 살펴서 이야기가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효과를 미칠지 생각하는 것이다. 이야기의 역할은 가르치고, 대화하고, 위로하고, 증언하고, 기분 전환을 시켜주는 등 다양하기 때문이다.

문학비평의 첫 번째 관심사? '성서 이야기의 구성'

문학비평의 첫 번째 관심사는 ‘성서 이야기는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이다. ‘내재적 저자는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효과를 얻고자 하는가?’, ‘내재적 저자는 독자의 관심을 어디로 향하도록 하고 싶었는가?’, ‘독자가 에피소드를 이해할 때 도움을 주는 요소들은 무엇인가?’처럼, 이야기의 구성은 시간, 공간, 등장인물, 플롯 등을 모두 살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 ‘하늘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주인과 같다.’라고 시작한다. 그렇다면 주인이 일꾼을 고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윤을 남기는 것이 목적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함축적 저자는 예수라는 설화자와 몇 가지 장치들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막는다.

성서의 이야기꾼

성서의 이야기꾼이 자신을 드러내는 경우와 숨는 경우가 있다. 누가복음의 데오빌로가 실재 인물인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상징적 인물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야기꾼은 자신을 드러내고, 심지어 독자도 드러낸다. 그리고 욥기 1장 1절에서는 욥 자신이 아닌, 알 수 없는 사람이 욥을 소개한다. 실재 독자는 이야기꾼을 믿어야 비로소 읽을 수 있고, 숨겨진 이야기꾼들은 전지적이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3장 2절에서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기 위해 그가 안식일에 사람을 치유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이처럼 이야기꾼은 사람들의 심리를 알고 있다. 마가복음 5장 30절에서도 예수님은 몸에서 능력이 나간 것을 느꼈는데, 이야기꾼은 그 사실마저도 알고 있다. 한편 누가복음의 이야기꾼은 1장 1절부터 4절까지만 등장하고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데, 이를 ‘이중설화자’라고 한다. 반면에 사도행전 16장 10절에는, 스스로도 등장하는 ‘우리’라는 이야기꾼이 있는데, 이를 ‘동종설화자’라고 한다. 또 마가복음의 이야기꾼은 외부에서 보고 모든 것을 아는 ‘외부설화자’다. 반면에 예수님은 이야기 안에서 비유를 말씀하시므로 ‘내부설화자’다. 이처럼 이야기 안에는 이야기꾼이 있고, 설화자는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지만, 이러한 이야기의 모든 장치를 기획하는 것이 함축적 저자이다.

성서의 저자가 상정한 독자와 실재 독자

독자도 나눠진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은 실재 발화자이고, 설교는 이야기,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청중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태가 들려주는 이야기된 역사다. 산상 설교는 마태복음에만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함축적 저자가 예수님과 제자들을 등장시키고, 무리를 앉힌 후에, 예수님이 설화자가 되어 발언하도록 기획한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권위가 서기 때문이다. 함축적 저자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독자는 이렇게 깨닫고, 이렇게 살겠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때 그가 생각한 독자를 ‘함축적 독자’라고 한다. 이처럼, 마태의 함축적 저자가 이야기를 만들 때 상정한 독자와 실재 독자가 있다. 그러므로 실재 독자가 마태복음의 이야기를 읽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역사 비평적으로는, ‘예수님이 그때 청중에게 이 이야기를 왜 하셨을까?’이고, 문학 비평적으로는, ‘함축적 저자가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마태공동체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라는 십계명을 두고, “모세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며 모세율법을 재해석하는데,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고 들었으나, 형제에게 ‘라가(바보)’라고 욕하는 사람도 살인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함축적 저자는 상정한 독자들에게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것도 살인일 수 있다.’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는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효과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와 사건을 다루는 각각의 성서 이야기

성서의 이야기는 어떤 역사와 사건을 다룬다.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실재 사건이나 역사는 아니며, 이미 이야기가 되었다면 그것은 이야기에 대한 역사다. 그래서 그것은 실제 사건과 다를 수 있다. 이야기된 역사를 들려주는 목소리가 바로 설화자다. 예를 들어, 사무엘하 24장 1절에는 주님께서 다윗에게 인구 조사를 명하시는데, 인구 조사라는 실재 사건에 관한 연구는 역사비평의 몫이고, 문학비평은 설화자를 통해 이야기된 역사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인구 조사를 명했다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한편 역대상 21장 1절에는 사탄이 다윗을 부추겨 인구를 조사하게 했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설화자는 미세한 차이를 통해 다른 목소리를 낸다. 사관에 따라 들리는 목소리도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사관을 통해서 독자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가? 모든 제국의 꿈은 부국강병이다.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백성의 증가가 최선책이므로 인구 조사는 필수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의지하는 죄의 결과를 낳기 때문에, 역대기의 설화자는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사탄의 유혹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화 된 역사와 그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비교하면, 전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마가복음 12장 6절에서 예수님의 비유도 마찬가지다. 악한 종에게 포도원을 맡긴 주인 이야기는 마태(마21:37), 마가, 누가복음(눅24:13)에 모두 나온다. 그런데 각 복음서 설화자의 이해가 조금씩 다르다. 마가는 ‘단 한 사람’ 사랑하는 아들에게 관심 있지만, 마태는 ‘마지막으로 마침내’ 아들을 보냈으며, 누가는 ‘설마’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세미한 늬앙스의 차이로 이야기의 의도가 달라진다. 또 다른 예로, 물 위를 걸은 예수님 이야기(막6:45-53, 마14:22-34; 요6:16-21)를 문학비평으로 꼼꼼히 읽지 않으면,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라는 메시지로만 끝난다. 그러나 마가의 설화자에게 제자들을 먼저 보낸 후, 혼자 기도하는 예수님은 외로운 분이다. 그리고 물 위를 걸어오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계속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래서 이후에도 ‘그들은 예수님이 빵을 먹이신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무뎌져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마가의 설화자는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기적보다 예수님의 마음을 모르는 제자들로 인해 예수님이 고립되어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반대로 마태는 ‘베드로가 자신도 걷고 싶다.’라는 말을 추가했을 뿐만 아니라, 사제 관계가 친밀해지고 있으며, 베드로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고, 그것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마태복음 전체에서 무릎 꿇는 대상은 하나님인데, 그 대상이 예수님으로 바뀐 것이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이 결국 하나님이 되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만약 물 위를 걷는 기적으로 인해 예수님이 하나님처럼 보인다면, 이는 요한복음 설화자의 의도이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이 일부러 제자들을 재촉해서 보내지만, 요한복음서는 날이 저물 때 제자들 스스로 바다에 내려갔고,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신 이야기로 끝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신비롭고, 그의 정체에 대한 궁금증이 있다. 이처럼 문학비평을 통해 꼼꼼하게 이야기를 읽으면, 기적을 넘어 그 안에 담긴 진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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