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기독교의 가짜 뉴스, 왜 위험한가?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안타깝지만 사람은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물이다. “이웃집 아무개가 착한 일을 많이 해서 봉사상을 받았대요”라는 소식보다 “이웃집 아무개가 도둑질을 해서 감옥에 갔대요”라는 소식에 우리는 훨씬 더 귀를 기울인다. 이런 경험 다들 해보지 않았나? 험담이나 저주가 칭찬이나 격려보다 훨씬 더 빨리, 훨씬 더 강력하게 전파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이를 부정성 효과(negativity effect)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루카스(elizabeth lucas)의 유명한 실험을 따라가 보자. 

어린이 심리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루카스에게 딸기 한 상자가 선물로 도착했다. 살펴보니 딸기 중 약 15%가 먹을 수 없는 상한 딸기였다. 이때 루카스에게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이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 뒤 첫 번째 그룹에게는 “얘들아. 먹을 수 있는 싱싱한 딸기를 골라줘”라고 부탁을 한다. 반면 두 번째 그룹에게는 “얘들아. 먹을 수 없는 상한 딸기를 골라줘”라고 부탁을 한다. 

결국 똑같은 부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그룹의 결과물은 완전히 달랐다. “싱싱한 딸기를 골라줘”라고 부탁한 아이들은 정확하게 85%의 싱싱한 딸기를 골라냈다. 반면 “상한 딸기를 골라줘”라고 부탁한 아이들은 놀랍게도 절반 이상을 상한 딸기로 분류했다. 상한 딸기는 15%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이것이 바로 부정성 효과다. “싱싱한 딸기”라는 긍정적 표현보다 “상한 딸기”라는 부정적 표현을 들었을 때 사람의 뇌가 훨씬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래서 멀쩡한 딸기를 상한 딸기 취급을 한다. 이건 아이들이라서 저지른 오류가 아니다. 루카스가 성인을 상대로 이 실험을 했을 때에도 결과는 비슷했다. 

부정성 효과는 생존 본능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심리학자들은 이런 심리가 인류의 생존 본능과 관련이 있다고 해석한다. 알다시피 원시 인류는 매우 나약한 존재였다. 그래서 부정적인 소식을 들으면 화들짝 놀란다. 이렇게 놀라고 두려워해야 생존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열매가 많은 나무를 발견했어”라는 긍정적 소식을 들으면 조금 기쁠 뿐이다. 하지만 “마을 주변에 사자가 나타났어”라는 소식을 들으면 “옴마나! 어쩌면 좋아! 우리 가족 다 죽겠네!”라는 엄청난 강도의 공포를 느낀다. 그래야 사자의 위험으로부터 목숨을 건질 수 있다. 

딸기도 마찬가지다. 모양 좋고 맛있는 딸기를 먹으면 그냥 조금 행복한 거다. 하지만 상한 딸기를 먹으면 병에 걸려 죽을 수 있다. 당연히 인간은 상한 딸기라는 부정적 뉴스에 훨씬 예민하다. 

오클랜드 대학교 심리학과 크리스틴 한센(Christine Hall Hansen) 교수의 연구도 흥미롭다. 한센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군중 속에서 특정 인물을 찾는 과제를 내줬다. 당연히 군중 속에서 목표물을 정확히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실험 결과, 참가자들은 목표물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을 때보다 분노한 표정을 지었을 때 훨씬 쉽게 목표물을 찾았다. 

한센은 이를 분노 우월 효과(anger superiority effect)라고 불렀는데 이것 역시 부정성 효과의 일종이다. 인간의 유전자는 행복한 표정을 짓는 사람보다 분노한 표정을 짓는 사람이 나에게 더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잇다. 그래서 생존 본능에 따라 분노한 사람을 더 잘 찾아내는 것이다.

한발만 더 나아가보자. 그렇다면 진보적인 사람들과 보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부정적 뉴스를 대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네브라스카링컨 대학교 정치학과 존 히빙(John R. Hibbing)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이다. 진보와 보수 양쪽 사람들에게 부정적 뉴스를 전한 뒤 생체 반응을 측정하면, 진보보다 보수의 반응이 훨씬 격렬하게 나타난다. 

이것도 잘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보수란 현상유지와 생존에 가치를 두는 이념이다. 반면 진보는 현상유지보다도 도전과 변화에 더 큰 가치를 둔다. 현상유지에 큰 가치를 두는 보수가 생존에 훨씬 민감하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도전을 즐기는 진보에게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각오하는 용기가 있다. 

보수 기독교의 가짜 뉴스는 생각보다 위험하다

정리를 해보자. 인간은 원래 긍정적 뉴스보다 부정적 뉴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보수가 진보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부정적 선동은 진보건 보수건 대중을 이끌 강력한 무기인데, 이게 진보보다 보수에게 훨씬 더 잘 먹힌다는 게 문제다. 

기억을 되살려보자. 이명박, 박근혜가 집권했던 시절 진보언론은 당연히 정부를 비판했다. 민주정부 시절 보수언론도 당연히 정부를 비판했다. 이는 양쪽 다 매우 당연한 전략이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우리 편의 우수한 점을 선전하는 것보다 상대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이 훨씬 위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피차 비슷한 양의 공격을 하더라도 효과는 보수언론이 민주정부를 공격할 때 훨씬 강력하다. 보수가 진보에 비해 부정적 뉴스에 훨씬 민감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뉴스의 양이 비슷하지도 않다. 나도 <민중의소리>라는 진보언론 소속이지만, 진보언론이 보도하는 뉴스의 양은 조중동을 비롯한 보수언론의 뉴스 양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나는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할 기독교 목사들이 “대통령은 빨갱이”라느니 “순교할 사람을 조직하겠다”느니 하는 악의적 선동을 하는 것이 매우 불편하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불편함과 별개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런 선동은 매우 효율적이라는 점이다. 설교를 듣는 기독교인들의 성향이 보수적이라면 악의적 선동의 효과는 배가된다.

“해결할 방법이 있느냐?”고 물어도 딱히 답이 없다. 부정성 효과는 인류가 오랫동안 진화하며 형성한 유전자의 본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진보는 언제나 보수보다 어려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정의로운 기독교인들의 역할이 그래서 중요하다. 보수 목사들의 저열한 선동이 의외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상대를 얕잡아보고서는 제대로 된 싸움을 할 수 없는 법이다. 

불리한 지형이라고 낙담할 일이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뾰족한 수가 없다면, 결의를 다지고 더 치열하게 싸우는 수밖에 없다. 언제 우리가 유리한 지형에서 싸워본 적이 있었던가? 우리에게는 불리한 지형을 이겨낼 의지가 있다. 정의에 대한 선한 열망이 부정적 뉴스로 대중을 선동하는 사악한 무리들을 이겨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완배 민중의소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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