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세상의 유혹 시험이'
패널 : 오광석 / 진행 : 이경은

성서에서의 수사학 기법

설득을 위해 연설자, 청자, 연설문, 장소(법정, 토론장, 종교적 제의 장, 교육의 장) 등을 통틀어서 고려하는 것이 수사학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주제 설정, 이야기 자료 수집 및 배열, 자료 설명을 위한 문학적 기교와 표현 정리, 암기, 전달 5단계로 정리했다. 또 구두로 설득하려면,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고려해야 한다. ‘로고스’는 논리정연하게, ‘파토스’는 감동을 주면서, ‘에토스’는 사람의 성격과 윤리적 됨됨이 등을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사학적 방법론으로 성서를 비평하기 위한 전제는, 성서 자체가 누군가를 설득할 목적으로 쓰인 연설문과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 혹은 편집자가 수사학적으로 어떤 신학적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는지를 밝히는 것이 ‘수사비평’이다. 양식비평처럼 수사비평도 이야기의 단위를 설정한다. 설득하려는 단위를 설정한 후, 그 단위가 어떤 양식을 사용하는지 살피는 것은 양식비평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문학적 기교를 밝혀서 어떤 신학적 의도가 있는지 살피는 것은 편집비평의 영향을 받았다. 편집비평은 역사비평에 속하며 원래 저자의 의도를 밝히지만, 수사비평은 연설자의 의도를 밝힌다. 이처럼, 수사비평은 역사비평과 문학비평 양쪽을 조합한 방법론이다. 역사비평의 방법론(양식비평)을 가져왔는데, 그것이 다루는 것은 역사적 배경과 상황이 아니라, 문학비평의 연설문이다.

수사학 사용의 예시, 바울과 모세

신약성서에서는 바울이 설득을 위해 수사비평을 많이 사용했고, 구약성서에서는 모세의 설교나 선지자들의 하나님 심판 선포 등, 예언서 연구에 수사비평이 많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설득하기 위해서, 부모 자식 사이, 종과 주인 관계라는 비유를 통해 설득한다(사1:2-3 참고). 또, 바울의 아레오바고 법정 연설에서도 수사비평이 사용되었다(행17:22-31 참고). 그런데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2:14-36 참고)와 바울의 아레오바고 설교를 비교하면, 바울의 설교에는 구약성서와 관련하여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고, 심지어 예수님 이야기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데반 설교(행7:2 이하 참고)에서는 구약의 역사를 다 훑는다. 바울이 설득하는 장소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온갖 신들과 상징물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청중 친화적인 언어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마지막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불사’의 내용을 부활이야기로 승화시킨다. 이처럼, 청중에 따라 선택한 단어가 다르고, 전하는 방식이 다르기에, 수사비평에서는 청중 연구가 중요하다. 또, 수사비평에서는 범위설정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서에서는 3장 1절과 4장 1절에 ‘돌아오라(히, 슈브)’라는 표현을 중복 사용하여, 이야기가 끝나는 4장 4절까지를 하나의 문학 단위(인클루시오=샌드위치 구조)로 설정한다. 그리고 ‘메노라의 촛대’처럼 교차대구법(A-B-C-D-C’-B’-A’) 구조와 반복되는 병렬 구조(A-B-A‘-B’) 등의 수사적 단위를 설정한다. 그리고 반복되는 단어 또는 언어의 특징들을 찾아,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 무엇을 설득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설득적 상황을 발굴한다. 예를 들어, 사사기에서는 ‘싸웠다’라는 말이 짧은 두 구절에 네 번이나 반복되는데(삿5:19-20 참고), 이것은 싸움 상황이고, 이 상황에서 싸움을 부추길 것인지, 말릴 것인지를 찾는 것이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종교심이 큰 아테네 사람들을 긍정적, 혹은 부정적으로 판단하는지 알기 위해, 수사비평에서는 단어들이 어떤 성격을 갖는지 판단한다. 그리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연설자의 어조와 진행 방법 등을 살펴야 한다. 가장 좋은 예가 요나서다. 요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의식을 깨려는 목적의 문학 작품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충격을 주는 장치가 요나의 등장이다. 요나는 예언자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전하고 실천하는 사람인데, 정반대로 인물을 설정하면서 처음부터 충격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극적 효과를 위해 요나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거기서 풍랑을 만나는데, 그때 이방인 선원들은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잘 듣지만, 요나는 오히려 잠을 자고, 결국 자기 탓이니 자기를 죽이라고 말한다. 이런 구조를 발견하는 것이 수사 비평이다.

수사학적 재평가, 미리암의 노래

또 다른 예로, 출애굽 장면 이후 모세의 노래와 미리암의 노래가 나온다. 이것은 거룩한 전쟁 후 부르는 승전가다(출15:1-18 참고). 이렇게 수사학적 단위를 설정한 후, 시작부(1절)와 맺음부(18절)를 빼면, 2절부터 6절까지 1연, 7절부터 11절까지 2연, 12절부터 17절까지 3연으로 맞아떨어지는데, 1연에서 ‘야웨여’라는 호칭을 2회, 2연에서 1회, 3연에서 다시 2회 외친다. 그리고 5절에 ‘돌처럼 잠겼다’, 10절에 ‘납덩이처럼 잠겼다’, 16절에 ‘돌처럼 잠겼다’라는 표현이 세 번 나온다. 이처럼 1연, 2연, 3연은 병행구조로, 1연의 2-3절, 2연의 7-8절, 3연의 12-13절은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찬양한다. 그리고 1연의 4-5절, 2연의 9-10절, 3연의 14-16절은 원수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1연의 6절, 2연의 11절, 3연의 17절은 다시 찬양으로 하나님께 화답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보여주고, 적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명백한 구조가 드러난다.

이렇게 놓고 분석하면, 1연을 시작할 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노래로 주님을 찬양한다. 주님을 찬양한 이유는 그분이 말과 기병을 바다에 쳐넣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기분이 좋고, 속이 시원하다. 그런데 2연으로 넘어가면 하나님의 원수가 명백하지 않다. 주님께서 큰 위엄으로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을 내던졌다. 1연을 생각하면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은 애굽의 병거와 군대다. 그런데 3연으로 오면 갑자기 바뀐다. 주님께서 오른팔을 내미시니 땅이 대적을 삼켜버렸다고 하더니, 갑자기 14절에 이야기를 듣고 여러 민족이 두려워서 떤다. 블레셋, 에돔, 모압의 권력자들도 무서워 떨고, 가나안의 모든 주민도 낙담한다. 이야기 내부에서는 이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적이 없다. 그런데 왜 이들이 떠는가? 더 심각한 것은, 깊은 물과 바다가 그들을 덮쳤고, 그들이 모두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공포와 두려움이 늘 덮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의 권능의 팔로 인해, 주님의 백성이 다 지나갈 때까지 주님께서 속량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지나갈 때까지 대적자들은 돌처럼 잠잠하였다. 그러므로 애굽을 칠 때는 해방자 하나님이지만, 여러 민족을 두려워 떨게 하면서까지 이들을 치는 것을 용납할 수 있는지는 다시 물을 수 있다. 즉, 이스라엘 역사에서 그들이 가나안까지 들어갈 때의 침략 전쟁을 마치 옹호하는 것처럼 해석하게 되면, ‘하나님이 과연 해방자인가, 침략자인가?’를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은 3연이 없어야 좋다. 모세의 노래 바로 다음에 나오는 미리암의 노래(출15:19-21 참고)에서는 ‘해방자 하나님’만 찬양한다. 그런데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부른 노래에는 침략이 있다. 반면, 여성들이 춤추면서 부른 노래에는 해방만 있고, 침략은 없다. 이렇게 21절에서 출애굽 이야기는 끝나고, 22절부터는 광야 이야기다. 그렇다면, 전체 이야기 속에서 과연 독자는 모세의 노래에 집중해야 하는가? 아니면 미리암의 노래에 집중해야 하는가? 출애굽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이처럼, 수사비평을 통해, 연설자의 의도를 분석해 보면 신학적인 방향을 재해석할 수 있다.

이영미, 『이사야의 구원신학 여성 시온 은유를 중심으로』, 2004.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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