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세상의 유혹 시험이', '때로는 너의 앞에'
패널 : 오광석 / 진행 : 이경은

수사학으로 읽는 성서

수사학의 다른 예로, 1절과 5절에서 ‘처녀 딸 바벨론아’라고 시작하는 이사야서(사47:1-15)의 1연(1-4절)과 2연(5-7절)은 병행 구조다. ‘처녀 딸 바벨론아’는 히브리어로, ‘배툴 베트 바벨’로 BBB도식이고, 2인칭 여성 단수 명령형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강조 접미사 ‘키’로 이어지고, ‘내가 이렇게 하겠다’와 같이, 하나님 스스로 할 일을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한다. 또, 3연(8-9절)과 4연(10-11절)도 병행 구조다. 8절과 10절은 바벨론의 잘못된 기대를 나타내고. 9절과 11절은 그것에 대한 심판을 선고한다. 그리고 5연(12-13절)은 ‘구원하려면 구원해 보라’면서 조롱하지만, 6연(14-15절)은 강력한 심판을 강조한다. 이처럼 수사학적으로 전체 구조를 분석하면, 이사야서는 요한계시록의 음녀 이미지처럼 악한 여성의 이미지를 반영하여(예: 치마를 걷어 올려 다리를 드러내고), 바벨론의 완전한 몰락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애굽의 재해석

한편, 출애굽 이야기(출1:1-15:21)를 하나의 수사학적 단위로 설정할 수 있는데, 마지막은 ‘미리암의 노래’로 끝난다. 그런데 앞부분에도 여인(산파) 이야기가 나온다. 70명으로 시작한 히브리 민족은 거대한 민족이 되었고, 7년의 기근 속에서 그들을 구원한 요셉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었다. 그런데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장하여 그들을 괴롭힐 때, 히브리 산파들의 이야기(출1:15-22)가 등장한다. 이 이야기로 수사학적 단위를 설정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것은 데칼코마니 구조다. 이집트 왕이 십브라와 부아라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칙령을 내린다(A: 15-16절). 그리고 같은 칙령이 또 나온다(A’: 22절). 이어서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라는 말이 나온다(B: 17절). 그리고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즐거워한다(B’: 21절). 이어서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서 그들을 꾸짖는다(C: 18절). 그리고 산파들이 대답한다(C’: 19절). 가운데가 핵심이다.

이집트왕 바로의 모순적 명령, 생명을 받는 산파에게 생명을 죽여라! 

이것은 이집트 왕과 히브리 산파의 대결이다. 왕과 종, 남자와 여자의 대결에서 지위 높은 사람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지위 낮은 여자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출애굽 이야기에서 첫 번째로 기억되는 이름이 십브라와 부아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기록된 이름이 미리암이다. 그동안 모세만 기억되었던 출애굽 이야기의 앞뒤를 장식하는 이름은 바로, 여성이다. 한편, 이야기의 핵심 부분(19절)인 여인의 대답을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히브리 여인과 이집트 여인은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십시오. 그들은 기운이 좋아 산파가 그들에게 도착하기 전에 아이를 낳아버립니다.” 이때 사용된 “보십시오”는 강력한 저항 이미지다. 강력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5절부터 22절까지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산파’ 때문이다. 산파는 생명을 살리는 사람인데, 이집트 왕은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집트는 당대 최고의 제국이었다. 구약성서의 지혜문학에 나오는 잠언들은 이집트 제국의 왕실 교본에서 많이 채용된 것이다. 그런데, 지혜로워야 할 왕은 산파에게 생명을 죽이라 명령하고, 산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로서 왕을 이겨낸 것이다. 수사학을 통해, 이집트 왕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생생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되어야 할 이름은 무엇인가? 십브라는 ‘아름답다’라는 뜻이고, 부아는 ‘고대 공주의 이름’이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 아름다운 공주이다.

생명을 살리는 여성들, 히브리 여인들과 바로의 딸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갓 태어난 남자아이들을 모두 강으로 던지라는 명령으로 상황은 악화된다(2:1-10 참고). 그때 레위가문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난다. 레위가문의 특징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까지 죽이면 하나님마저 지는 것이다. 태양신 ‘라’를 섬기는 파라오와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가문의 싸움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자, 어머니는 아이를 갈대 상자에 넣어 강에 띄워 보낸다. 그 상자가 노아의 방주와 같은 단어(히, 테바)다. 노아는 심판의 때, 방주를 만들어 생명을 살린 구원의 인물이다. 그러므로 상자에 담긴 아이도 훗날 노아처럼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아이의 누이 미리암이 등장한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면서 아이가 울고 있는 상자를 발견했고, 히브리 사람의 아이인 것을 알고도 살려준다. 여기서 수사학적 기교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의 명령에 대한 거역은 히브리 여성으로부터 일어났고, 살리는 사람은 바로의 딸이다. 히브리 산파로부터 시작해서 대제국 내부의 여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살리는 일을 한다. 출애굽 이야기를 전쟁모델로 읽으면, 자칫 남을 침략하는 이야기로 쉽게 변질될 수 있다. 그러나 수사비평으로 여성 이야기에 주목해서 읽으면, 하나님은 침략자가 아닌 해방자로서만 남게 된다. 더불어 모세를 살린 것은 결국 여성들이기 때문에, 남성중심적 사회에 대한 비판 메시지도 전달할 수 있다. 비록 출애굽기의 원저자가 이것을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이와 같은 수사비평을 통해 독자는 더 좋은 신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힘이 아닌 사랑으로 구원을 이루는 사람들

출애굽 이야기와 같은 구원 신화는 중요하다. 그렇다면 동·서양의 구원 신화는 어떻게 펼쳐지는가? 서양은 대체적으로 슈퍼맨, 베트맨, 앤트맨, 스파이더맨, 아이언맨과 같은 영웅적 ‘맨’이 등장한다. 그는 세상을 구원하는 사람, 곧 구원자다. 그리고 반드시 세상을 망치는 악인이 등장한다. 그러면 구원자가 등장해서 악인을 물리치고 결국 세상을 구원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악인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이 파괴되는 등, 선인들의 피해도 막중하다. 그렇다면, 영웅은 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왜 시금치 통조림을 미리 먹지 않는가(뽀빠이 이야기 참고)? 그래서 구원 신화가 폭력적 행위를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이 과연 맞는가를 두고, 오늘날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물어야 한다. 반면, 동양의 구원 신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이야기에서 말하는 구원은 온갖 악귀가 목욕탕에 와서 씻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과 동양의 구원 신화의 내용과 방식이 다르다. 그렇다면 출애굽 이야기에서 과연 독자는 어떤 방향의 구원 신화를 따라야 하는가? 폭력적 구원 신화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십브라와 부아, 모세의 어머니와 누이 미리암처럼 당당하고 재치 있게, 그리고 아이를 살리려는 여공주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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