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한문덕 목사 (생명사랑교회)
찬양인도 : 유기농수도사
'주님 앞에 섭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패널 : 오광석 / 진행 : 이경은

독자반응비평이란?

독자반응비평(이데올로기비평)은 같은 성서를 읽어도 독자마다 반응이 다를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 이유는 성서를 읽는 사람의 상황(컨텍스트)이 다르기 때문이다. 독자는 자기 경험에 빗대어서 성서를 읽기 때문에, 성서만이 아니라 성서 앞에 놓인 독자도 분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치에 동조하는 신학자와 저항하는 신학자는 같은 본문을 서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또 전통적인 기독교 문화에서 생활하던 유럽의 신학자들과 독재 정권에서 노예처럼 생활했던 사람들이 읽는 성서는 다르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흑인 여성과 아메리카의 백인 여성이 읽는 성서도 다르고, 결혼해서 아기를 낳아 기르는 여성과 출산 경험 없는 독신 여성의 성서 읽기도 다르다. 또 독일의 정치신학, 남미의 해방신학, 한국의 민중신학과 여성신학적 관점이 다르고, 유교, 도교라는 고등종교 전통의 동아시아인이 읽는 성서의 느낌이 다르다. 이처럼,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이 독자반응비평이다.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간극

그렇다면 이것이 왜 필요할까? 사형제도, 안락사(존엄사), 낙태, 투표권 나이, 영상물 등급 등 현대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 근거는 없을 수 있고, 미루어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또한 같은 성서 구절을 독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며 부딪치는 경우도 발생한다. 성서 구절이 문제가 아니라, 독자의 삶의 문제다. 이처럼,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간극이 오히려 성서에 없던 의미로 도출되기도 한다.

이천 년 서구 역사에서 덧칠해진 교리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비평 방법, 민중신학

다음 네 개의 성서 구절(요14:6; 행4:12; 고전3:11; 딤전2:5)의 공통점은 구원을 주실 이는 예수밖에 없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르는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에게 이 말을 적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독자반응비평이 필요하다. 교리는 성서에서 나왔고, 성서는 시간 안에서 작성되었는데, 시간 안에서 살아가는 독자에게 무시간적 교리에 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기독교 교리와 종교를 운영하는 방식들은 자칫 성서와 부딪칠 수 있고,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과 배치될 수도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민중신학은, 그리스도교 이천 년 서구 역사에서 덧칠해진 교리의 틀을 벗어나기 위한 비평 방법이다. 그래서 민중신학은 실제로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에 집중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다음 세 본문(고전15:3-8; 빌2“6-11; 행2:22-36 참고)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그분이 구원자가 되셨다는 공통된 교리를 말한다. 그러나 성령 잉태, 십자가 죽음과 부활, 재림과 심판 등의 교리만으로는 그리스도교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앙 고백적인 교리를 넘어, 예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었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심지어 바울 사도는 예수님의 삶은 빼놓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만으로 그리스도가 되셨다고 편협하게 말한다. 그동안 기독교 이천 년 역사에서도 그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은 필요가 없었고, 내 죄를 속하기 위해 대신 죽을 누군가만 필요했다. 예수님의 삶을 통한 사역은 등한시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래서 민중신학은 이런 문제를 극복하려 했다(천안살림교회 최형묵 목사의 ‘민중신학 개념지도’ 참고).

삶  그  다음 이론,  남미의 해방신학

민중신학을 이해하기 위해 남미의 해방신학을 예로 들면, 신학 지식을 가진 가톨릭 신부들이 남미에 파송되어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들의 먹고사는 문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미의 신부들은 독재 정권에서 핍박당하는 소작농들에게는 지식인들의 관념적 신학이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남미의 밑바닥 공동체로 들어가서 먼저 그들의 문제와 아픔과 소망을 깨닫고 토론한 결과, 먼저 이론을 적용하여 사는 게 아니라, 살아보고 이론을 적용하자는 결론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1970년대 박정희 독재 정권에서 신음하던 민중들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피폐했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한 대속의 교리는 실제적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의 사건이 벌어졌다. 민중 신학자들은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적 교리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울부짖는 민중들의 삶에서 들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민중들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증언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여겼다. 그리고 성서를 보니, 성서가 달리 보였다. 예를 들면, 서양 신학자들과 민중 신학자들은 ‘안식일 밀밭 사건(막2:23-28)’에 대한 분석의 차이를 보인다. 서양 신학자들은 양식 비평을 통해 이 이야기를 논쟁 사화로 분류한다. 논쟁의 주체는 바리새파와 예수님이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사람을 더 위하라는 것이 메시지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고, 이 말을 전하는 분이 예수님이기에, 서양 신학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인권을 중시하는 도덕 교사로만 이해한다. 그런데 민중 신학자들은 여기서 중요한 것이 말보다 행동이라고 분석한다. 예수님은 복음을 선포하고 일을 계속하신다(막1:14-3:6 참고). 예수님은 안식일에 먹어서는 안 될 것을 먹는 행동을 하신 것이다. 배고파서 무리와 함께 먹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행동은 먹은 것이다. 그러면 독자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말을 중요시할 것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들이 안식일에 이것을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연구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이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 것인가에 대한 사건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말을 하면서 결국 하려고 했던 것은 행동이다. 이처럼, 무엇을 더 중요시하면서 읽어야 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민중신학이다. 그리고 배가 고픈 민중들이 이 본문을 읽을 때, ‘오죽했으면 지나가다가 그거라도 먹었겠냐?’라는 느낌으로 읽는 것이 독자반응비평이다. 배고픈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읽을 때 반응이 다르기 때문이다.

민중 신학이 바라보는 역사 현장의 예수님

한 걸음 더 들어가면, 논쟁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 때문에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책임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 공동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자신을 따랐던 무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고, 제자들에게 기억되었고,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예수님은 민중 속에서만 예수님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서양의 개인주의는 예수를 따로 떼어놓아서 그를 신으로 받들지만, 동아시아 전통에 있는 독자는 ‘우리’ 공동체의 활동 속에서 예수님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무리와 한시도 떨어져서 움직이지 않았다. 예수님을 개인의 구원자로만 숭배하는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 현장에 가지 않는다. 개인적 구원을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며 하나님으로 받들지만, 예수님이 실제로 행했던 하나님나라 운동에는 아무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실제로 활동하고 역사하는 사람들은 사건 현장에 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하나님나라 운동 사건의 유대교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이 일으키셨던 출애굽 사건은 노예를 자유인으로 불렀던 사건과 그 사건들을 함께 일으켰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독재자의 폭력에 억압당하면서도 그것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복음은 그런 사람들에게서 매번 사건으로써 재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성서는 누구에게 읽히는가? 한 인물을 숭배하는 독자에게 읽히는가? 아니면 예수 사건을 재현하는 독자에게 읽히는가? 사건 현장에서 예수님이 일으켰던 운동을 재현하는 사람들 속에서만 성서가 제대로 읽힐 수 있다. 예수님을 도덕 교사로 생각한 후, 도덕적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한 사건들을 어디에서든지 독자가 지속적으로 활약하려는 것이 올바른 성서 읽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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